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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사라지는 필름, 사라질 歷史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9. 4. 23:18

사라지는 필름, 사라질 歷史

입력 : 2015.09.03 03:00

귀중한 현장·인물 기록한 필름 보관 어렵고 50年 수명 다 돼가
無償 스캔·보관 제의하는 이들 價値 모른 채 '공짜 사용' 요구
시간 지날수록 더 빛날 史料를 국가가 나서서 지켜주어야

조인원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조인원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광복 70주년이 되는 올해는 어느 때보다 많은 기록 사진이 쏟아졌다. 사진들은 빈손에서 시작한 한국현대사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나온 한영수의 사진집 '꿈결 같은 시절'은 전후(戰後)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서울의 모습과 거리에서 노는 아이들을 모았다. 어른들의 삶은 척박했던 시절이었지만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은 놀랄 만큼 밝았다. 부서진 돌담 아래서 뛰어노는 아이들. 까까머리에 고무신을 신었지만 소년들의 눈은 빛났다.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시소를 타는 소녀의 웃음엔 장난기가 가득하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진 속 풍경과 사람들은 모두 눈물겨운 우리들의 역사가 됐다.

1952년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 통신사를 차린 임인식(1920~1998)도 수많은 현장을 다니며 역사적인 사진을 찍었다. 해방되기 전부터 사진을 찍었던 그의 사진들은 세월이 흘러 많이 변해버린 공간들을 증명하고 있다. 그가 찍은 1946년 서울 태평로 사진을 보면 자동차가 드물어선지 인도(人道)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1954년 촬영된 항공사진은 지금은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광화문과 태평로 주변이 고만고만한 기와지붕들 한가운데에 이제는 사라진 중앙청과 경복궁만 우뚝 서 있었다.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사진은 추억이고, 지금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기록이 됐다.

하지만 임인식이 찍은 40여만 장의 사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1940년대부터 촬영한 그의 필름들을 보관하고 있는 아들 임정의(71·건축사진가)씨는 "꺼내서 정리할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임씨는 "촬영한 필름들이 50년이 넘어가니 상자에서 꺼내볼수록 필름막이 손상된다"면서 "해마다 2~3%의 사진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안다"며 안타까워했다.

1970년대부터 시인·소설가·수필가 등 문인(文人) 사진을 찍어온 김일주(73)는 집에 10여만 컷을 찍은 필름이 있다. 그가 촬영한 문인들만 해도 2000명이 넘는다. 문예지 기자였던 그는 사진만 찍지 않았다. 작가들이 원고지 위에 직접 쓴 육필(肉筆) 원고를 모았고, 인터뷰 때나 문인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녹음했던 녹음 테이프, 행사 팸플릿 등의 자료가 1.5t 트럭 한 대 정도의 분량이 있다. 거기엔 박경리가 직접 쓴 '토지 2부' 원고부터 소설가 한승원이 술자리에서 부른 구성진 육자배기까지 있다. 전부 박물관에 가야 할 우리 문학사의 유산이다. 하지만 필름은 보관이 제대로 안 되어 눌어붙고, 원고지는 세월에 삭아 먼지가 되어가고 있다. 기록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가 모은 사진이나 자료들은 곰팡이 피는 쓰레기일 뿐이다.

[조인원의 사진산책] 사라지는 필름, 사라질 歷史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많은 사진가가 사진 정리나 보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부분 촬영한 필름을 꼼꼼히 기록하고 완벽히 보관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자기 돈을 들여서 사진집을 내거나 전시회를 연다. 하지만 사진집이나 전시회는 돈과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에 내놓을 사진들이 있어야 겨우 마음을 먹고 시작할 수 있다. 전시도, 사진집도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1960년대부터 한국현대사의 현장들을 사진으로 기록한 일본인 구와바라 시세이(桑原史成)도 사진 보관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그의 집엔 세 평 정도 되는 방이 있는데 정리 안 된 필름과 프린트된 사진들이 천장까지 가득 찰 정도라고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많은 필름이 사라져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필름에 찍힌 사진들이 사라지고 있다. 상온에서도 필름을 제대로 보존하기 어려운데 우리나라는 계절마다 기온 차가 커서 더하다. 촬영 후 현상한 필름은 화학약품을 거친 결과물이기 때문에 제대로 보관하지 않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사진을 찍은 상(像)이 사라진다.

필름은 수명을 보통 50년으로 본다. 온도가 낮고 습도가 적어야 필름의 변형을 막을 수 있다. 보통 영상 4도, 습도 40% 이하 상태라야 제대로 필름이 보존된다고 한다. 결국 냉장고의 냉장실에 필름을 보관해야 한다는 것인데 어느 누가 자기 집 냉장고에 필름 앨범을 넣어두고 살까? 대부분 종이 박스에 대충 담겨 장롱 위나 책장 위에서 먼지가 쌓여간다.

사진가들은 왜 필름들을 안 좋은 상태로 계속 갖고만 있을까? 그동안 몇 번 제안이 있었지만 모두 필름을 스캔해서 보관해줄 테니 사진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제안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진이나 기록물의 역사적 가치를 여전히 잘 모르는 우리 사회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2004년 이름을 바꾼 국가기록원은 국내 유일한 기록물 관리 기관이다. 정부나 국민의 관심이 될 만한 기록물 외에 사진자료도 모은다. 하지만 사진가들은 아쉬움이 많다. 정해진 예산 안에서 빠듯이 집행하기 때문에 민간 기록물까지 수집하고 보관하는 데에는 한계가 많다. 다른 국공립박물관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시는 내후년 착공을 목표로 도봉구 창동에 사진박물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국내에 흩어져 있는 사진들을 얼마나 모으고 전시할지 사진계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역사는 기록으로 전해진다. 필름으로 기록한 사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빛나지만 제대로 보존하려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 역사적 가치를 지닌 사진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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