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誤讀(오독)을 悟讀(오독)하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8. 17. 23:22

誤讀(오독)을 悟讀(오독)하기
 
한승원 / 소설가

나 코흘리개 시절에 한 어른이 말했다. 개의 눈에는 바람은 보이는데 눈(雪)은 보이지 않는단다.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이 말을 나는 나이 팔십이 눈앞에 이른 지금까지도 머리에 굴리고 산다. ‘문 없는 문 통과하기’라는 뜻의 책 ‘무문관(無門關)’을 저술한 조주 스님을 찾아온 한 수좌가 “개에게도 불성(佛性·수도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성품)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 스님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주 분명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화두인데, 헤아림이 천박한 자는 있다 없다는 분별심(이념 다툼)에 걸려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우리 마을 아래 골목 끝에 사는 머리털 허연 송 영감님은 어느 화창한 초여름날 분무기통을 짊어지고 고추밭과 콩밭에 무슨 농약인가를 뿌렸는데, 다음 날부터 고추나무와 콩나무들이 잎사귀들을 축 늘어뜨린 채 시들부들 앓다가 황갈색으로 말라죽었다. 사람들은 글씨를 해독하지 못하는 송 영감님이 살충제로 알고 제초제를 뿌렸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내가 바닷가 모래밭으로 산책을 나갈 때면 늘 그 송 영감님을 만나는데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네면, 그쪽에서 “등산 가시는가” 하고 대꾸를 한다. 이 영감님이 ‘등산’과 ‘산책’을 구별 못하는구나 하고 치부하면서도 나는 허리 굽혀 공손히 절하며 “네”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문득 그 영감님의 ‘등산 가시는가’ 하는 말에 미끄러지면서 아하 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미끄러진다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세계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 영감님이 나의 산책을 등산으로 오독(誤讀)한 것을 내가 오독(悟讀)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기막힌 시가 되었다.

‘해산(海山)’을 나의 딴 이름으로 삼아온 지 오래이다. 해산은 그저 바닷가에 있는 가시적인 산이 아니다. 짙푸른 심해(深海) 속에 암초처럼 발달한, 비가시적인 숨어 있는 산이다. 그 비의(秘意)를 송 영감님이 알 리 없고 그가 그것을 말했을 리 없지만, 나는 그것을 스스로 다음과 같이 깨쳐 읽은 것이다.

‘바다 속에 내(산)가 있고, 나는 날마다 꾸준히 그 나(산)를 탐색하며 오르곤 하는데, 그 등산으로 인하여 부처님의 사리 같은 각성이 나의 모래밭에 깔리는 것이고 나는 그것들을 헤아리며 삶을 엮는 것이다. 산책(등산) 자체가 깨달음의 한 방책인 것이다.’

누군가가 잘못 읽어준 오독을 통해 큰 깨달음(오독)을 얻기 위해서는 영혼이 깨어 있어야 한다. 영혼을 깨어 있게 하려면 시를 써야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생각의 묵은 찌꺼기(고정관념)를 벗어던지기이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기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은 그의 ‘어부사(漁父辭)’에서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衆人皆醉我獨醒·중인개취아독성)”고 읊었다.

선(禪)을 공부한 스님들은 선문답을 자주 한다. 선문답은 ‘오독의 오독하기’와 다름없다. 선은 언어도단(言語道斷)에서 새로이 시작되는 새로운 진리이다. 백 척이나 되는 작대기 꼭대기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사람에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라고 명하는 것(百尺竿頭進一步·백척간두진일보)은 언어도단의 적절한 예이다. 누군가가 언어도단에서 새로운 진리가 열리는 것을,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 길은 열린다고 살짝 바꾸어 표현했다.

선문답하듯이 시를 쓰는 일은 환장하게 재미있다. 시에는 ‘쓰는 시’가 있고 ‘쓰여지는 시’가 있다. 쓰는 시는 제작 의도를 가지고 쓰는 시요, 쓰여지는 시는 쓰려고 하지 않는데, 가슴안에 보석 같은 깨달음의 사리가 앙금처럼 침전되듯이 자연히 생성되는 시인 것이다. 늙은 시인들은 쓰여지는 시를 많이 쓴다.

덴마크에 여행을 갔다가 온 다음에 시 한 편을 썼다. 그 시는 썼다기보다 그냥 주운 것이다.

지금 나는 고생스럽게 쓰지 않고 그냥 주운 시의 작품성의 좋고 나쁨보다는 그러한 시 쓰는 재미(풍자)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다.

국민소득 4만7000달러라는 덴마크의 의회 의사당엘 갔는데 마당에 검은 색깔의 보통 자전거들만 가득 줄지어 서 있었다. 국민소득 2만6000달러인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타는 고급 대형 승용차들은 한 대도 없었다. 덴마크 국회의원들은 비서관이나 보좌관도 없이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세상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며 민의를 수렴한다고 했다.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인 나로서는 거짓말만 같은 사실이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한 사람이 받는 세비는 7억 원 이상(보좌관과 비서관의 인건비와 차량 유지비 및 사무실 운영비 등 포함)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들 중 몇몇이 하는 짓들을 보면 세비가 너무 아깝고, 지껄이는 말들을 들어보면 구역질이 나온다. 우리들의 선량(選良)이라고 내세우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자들이 한둘 아니다. 요즈음 정치라는 말은 ‘어두운 곳에서 부정직하게 술수를 잘 쓰는 자들의 부끄러움 모르는 행위’로 변질되었다.

내가 ‘어떤 국회의원’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편 썼는데, 그 전문은 이러하다.

‘욕실에서 목욕을 하면서 사용한 암황색 바탕에 화려한 붉은 꽃무늬가 있는 고급한 수건을 하얀 속옷 빨래들과 함께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나서 찬란한 햇발 쏟아지는 빨랫줄에 그것들을 털어 널면서 나는 경악했다. 하얀 속옷들이 모두 똥색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본 아내가 말했다. 그 수건 말린 다음에는 방바닥이나 발 닦는 걸레로 써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