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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메르스 사태는 일과 양심 사이에 딴 계산 끼어든 탓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7. 14. 11:25

표절·메르스 사태는 일과 양심 사이에 딴 계산 끼어든 탓

인간적 사회를 위해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제435호 | 20150712 입력

 

 

당사자 본인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기에 재론하기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소설가 신경숙씨의 소위 표절 사건은 보다 복잡한 맥락 속에서 생각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표절이라고 하면, 그것은 정직성 그리고 양심의 문제에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작가의 정직성, 양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이것을 생각해보려는 것은 사회 속에 사는 사람의 양심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거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대란과 같은 일도 이러한 문제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학문적 저작의 경우에 표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표절은 학문이 추구하는 사실과 진리의 영역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업적이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이다. 물론 사실이나 명제의 출전을 호도하는 것은 그것의 검증을 어렵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학문의 기본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크든 작든 진리 추구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학문에서 참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잘못 전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사실과 진리 추구의 공동 작업을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줄기 세포 연구에서의 증거 왜곡이 그럴 수 있듯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표절은 작품 전체에 보탬이 되는가가 문제
예술작품은 사실과 진리를 자료로 사용하지만 그러한 자료의 사실성이나 진리됨을 주장하지는 아니한다. 그렇다고 예술작품이 진리 시험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험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럴싸하다는 느낌,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일단의 예술적 진리라고 하겠는데, 그 느낌을 주지 못하는 예술작품이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다. 이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구상력 또는 상상력이다. 그것은 작품을 일체적인 것으로 구성해내는 힘이다. 특히 서사적인 작품은 이 구상력으로써 세부적 묘사들을 하나로 종합한다. 물론 세부 사항이 그럴싸하지 않고서 전체가 그럴싸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또 세부 사항은 전체 속에서만 그럴싸한 것이 된다.

이러한 세부와 전체의 관계는 학문 특히 과학 논의의 어떤 조건에 비교될 수 있다. 학문과 과학에서 사실 확인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지만 조금 더 추상적인 이론에 관계되는 연구에서는 사실들을 종합하는 이론의 틀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연구는 이론과 사실의 상호 검증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호검증이 세부와 전체 사이에 진행된다. 그리고 이 세부와 전체는 삶의 현실 그리고 그 진실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의 세부와 전체를 반영한다.

표절의 경우 표절보다는 다른 작품에서 빌려온 부분을 말하는 것이지만 일단 작품의 전체에 보탬이 되는가 아니 되는가가 문제 될 수 있다. 빌려온 부분은 다른 작품의 상황을 연상하게 하여 작품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그 모방을 비판적으로 또는 풍자적으로 보게 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빌려 온 부분의 출처를 독자가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빌려온 부분을 포함하여 작품 또는 작품이 그리는 진실은 작가의 구상력에서 나와야 하고, 이 때 그것은 그려내는 진실과 완전히 일치하여 움직인다. 이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작가의 양심이다. 여기에서 일치는 다른 이해관계의 개입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조금 긴 우회가 되지만, 작가의 양심이 어떠한 것인가를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

 

 

예속되는 것 거부하는 ‘예술가의 길’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20 세기 서양문학에서 가장 이름난 성장소설의 하나이다. 이 소설은 제목에 나와 있듯이,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되는 한 젊은이가 갖는 고민과 방황과 결심의 경과를 그려내는 것이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독자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진로를 선택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위한 결심에서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 마음의 핵심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다. 그것은 삶의 진로만이 아니라 사람의 바른 마음가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성장소설의 공식대로 이 소설은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가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성장과정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알게 되는 감각과 관능, 그 중에도 성의 유혹, 그 반대의 정신세계의 강력한 인력(引力), 고독과 가족과 교우 등의 문제를 삽화적인 이야기나 일기, 독백 등을 통해 그려 나간다.

주인공은 이러한 모든 것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독자적인 의식을 가진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에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큰 테두리는 가족과 종교 그리고 사회와 민족의 현실이다. 아일랜드의 젊은이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영국의 식민지로서의 사회·정치 현실이다. 소설에서 이것이 본격적인 주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수시로 화제가 되고 토론의 주제가 된다. 그리고 아일랜드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도 종교가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치는 나라이다. 가톨릭 신앙은 모든 사람의 삶과 의식에 깊이 삼투해 있다. 주인공 디덜러스는 한때 신부가 될 것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신부의 금욕적 삶과 감각적 관능적 삶의 유혹 사이에 고민하다가 결국 신부가 될 생각을 포기한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은 주인공에게 감정적 지주이고 위안의 근거이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그것은 벗어나야 하는 관습의 굴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이러한 크고 작은 속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물론 이것은 속박일 뿐만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 테두리이기도 하나-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결심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는 어떠한 이데올로기, 사회적 요청 또는 가족에게도 예속되고 봉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한다. 그것이 예술가의 길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양심을 영혼에 녹여 재생산

 

 

그리고 디덜러스는 예술가로서 그가 하여야 할 일을 “나의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민족의 양심을 다져내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은 모순되고 오만한 선언으로 들린다. 집단적 삶의 테두리의 압력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이 주인공의 깨달음이었는데 민족의 양심을 다져내겠다는 것은 그 굴레 안으로 다시 되돌아가겠다는 것인가? 그 양심을 “창조되지 않은 민족의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19세기 말 이후만 해도 이 소설에서도 언급되는 유명한 찰스 파넬을 비롯하여 많은 자치 그리고 독립을 위한 운동가들이 있었고, 주고받는 대화에서도 정치 화제는 격정을 일으키는데, 어떻게 하여 새로운 양심을 창조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디덜러스의 선언은 그러한 양심을 주어진 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녹여 재생산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거의 새로운 양심을 다져 내는 일이 된다. (우리 전통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 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수련되지 않은 자기를 내세우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현실 인식에 바치는 일에서 시작된다. 양심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경험에 100만 번 쯤 부딪치겠다고” 말한 다음이다. 그리고 예술가의 자유를 위한 그의 결단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여러 경험과 깨달음이 선행, 수반한다. 공중을 나는 수리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늘의 바람 속으로 자신이 풀려나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에 삶의 충동의 외침을 듣는 것도 그러한 경험의 하나이다. 또는 주인공은 해변의 소녀의 모습에서 삶의 현실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깨닫기도 한다. 소설에 묘사된 이러한 광경들은 그의 예술가의 자유를 위한 결단이 단순히 이념적 결단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결단은 그에게 하나의 계시(啓示)처럼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가리키는 조이스의 유명한 용어가 에피파니, 현현(顯現)이다. 그것은 직관적 진실 파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디덜러스에게 그리고 조이스에게는 지적인 체험도 그러한 정신적 깨달음의 체험이 된다. 어떤 사물의 사물됨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도 그러한 체험이다. 사물의 사물됨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것을 전체성·균형·밝음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감정 체험, 지적 인식 모두가 이러한 현현의 체험으로 계시된다. 예술가의 양심이란 이러한 사물 인식이 직접적인 깨달음 또는 느낌으로 일어나게 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 다음에 디덜러스는 아일랜드를 떠날 생각을 한다.

이러한 마음의 과정에서 주목할 일의 하나는 양심의 직접성이다. 거기에는 여러 현실 인식, 자아 인식이 녹아 하나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결심에서 일체적인 원리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작품 또는 사물 자체의 진실과 양심 사이에는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지 못한다. 시장의 이익, 독자 확보, 여론, 이데올로기, 편의 등 외적인 계산이 개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수익성·관료화에 오염된 의료제도

 

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행동에도 그러한 양심이 작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그 양심은 사물과 진실의 인식, 맡은 바 일과 행동을 하나가 되게 하면서, 다른 이해관계에 대한 궁리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직접성의 원리이다. 그러면서, 작품에서와는 달리, 상상력이 크게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 세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원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최근 메르스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인데, 무엇보다도 과학적 이해가 부족하고, 신속한 협조를 위한 체제가 준비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할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양심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일 수 있다. 또는 사회에 그것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착의 미국의 한 잡지(New York Review of Books, June 4-24)에는 미국 의료제도를 논한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었다. 서평은, 원저도 그렇겠지만, 주로 인턴 레지던트 교육의 후퇴에 중점을 두고 미국의 의료제도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비판의 핵심은 제도가 비인간화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병원 제도의 수익 지향 그리고 제도의 대규모화와 관료화가 비인간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과도한 수의 환자를 받고, 건강보험의 보상을 겨냥하여 입퇴원의 속도를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하고, 의료기기를 사용한 과도한 진료를 실시하는 등의 일이 그에 따르는 폐단이다. 인턴 레지던트 교육의 부실화도, 병원의 이권화, 거대화, 관료화에 주요 원인이 있다. 그리하여 수련의들과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동시에 환자를 돌보는 일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게 된 것도 또 하나의 부대 현상이다. 앞에 말한 과도한 의료기기 의존 진료는 수익집착에 못지 않게 조직의 비인간화의 결과다. 사람이 할 일을 기계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의료 사업은, ‘의료산업’이 되었다.

 

스스로의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사회돼야

 

 

이 평문을 쓴 사람은 오랫동안 의료에 종사했던 의사이다. 그는 의료제도의 비인간화가 의사로서의 그의 양심에 저촉된다고 느낀다. 그의 비판은 다분히 그의 개인적 경험에도 관련된다. 가령,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수련의의 노동 시간이 일주 100시간에서 80 시간 또는 그 이하로 줄어들게 되었지만, 이것으로 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이 순번에 따라 교대 근무하는 사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환자 한 사람을 계속 돌보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서평자는, 자신의 경험으로는, 단축 된 시간의 기계화된 노동보다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장시간의 노동이 오히려 직업적 만족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로는,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의사직에는 도덕적 차원이 존재했다. 의사는 단순한 직업이라기보다는 박애(博愛)적 사명을 가진 직업이며 의료 종사자는 환자의 복지, 공적 봉사에 주력하면서 그것을 직업의 참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교육도 전문지식과 함께 그 정신을 전수하는 일이었다. 병원의 크기를 적절하게 제한하고, 환자 수도 한정하고, 의료비를 최소화하고, 자선 의료를 베풀고 빈곤한 사람에게는 무료치료를 실시하는 것이 의료활동의 관례였다. 그러나 상업주의의 침투는 이러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의료 전문인의 본래적 사명감을 환기하려고 노력하는 의료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평 대상이 된 책의 저자인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 의대교수나 뉴멕시코 산타페의 한 병원의 폐질환 전문의인 서평자와 같은 사람이 그러한 의료인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메르스와 관련하여 우리 의료계의 많은 사람들도 놀라운 헌신과 희생을 보여주었다. 처음의 잘못된 대책이 비인간화된 의료 체제 그리고 금전과 권력의 체제에 관련된다면, 의료인이 보여준 희생적 봉사는 일에 임하여 자기의 직업적 양심에 충실하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해야 할 일과 양심 사이에 다른 계산이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적 사회란 스스로의 일에 그대로 충실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사회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