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벽에 막힌 사람들 애환 스민 ‘뼝대’
강원도 정선 사투리에 ‘뼝대’라는 게 있다. 여행 좋아하는 황동규 시인도 종종 ‘뼝대’라는 시어를 구사하는데, 표준말로는 절벽이나 벼랑에 해당한다. 그러나 온전한 풀이는 못 된다. 뼝대에는 이 궁벽한 땅까지 떠밀려온 밑바닥 삶의 시선이 포개져 있다.
정선의 산은, 줄기가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 않고 직각으로 꺾여 낭떠러지를 형성한다. 하여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산은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 되레 눈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벽에 가깝다. 벼랑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俯瞰)의 시선이 반영된 말이라면, 뼝대에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앙감(仰瞰)의 시선이 투영돼 있다. 뼝대에는 절벽 아래에서 절벽에 막혀 사는 사람들의 애환이 배어 있다. 그 한스러운 벽을 돌고 돌아 동강이 흐른다.
|
동강할미꽃은, 우리가 뼝대라 부르는 동강 변 석회암 벼랑에 매달려 산다. 이 척박한 석회암 바위에서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뿌리를 내린 것인지, 바위 절벽에 새치름히 피어 있는 한 송이 동강할미꽃을 보고 있노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용하고 장하다, 왠지 딱하다. 가파른 뼝대 중간에 얹혀사는 신세여서 햇빛이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동강할미꽃은 할미꽃 부류 중에서 예외적으로 꽃대가 휘어져 있지 않다. 하늘을 향해 뻣뻣이 고개를 쳐들고 앉아 있다.
(탐방정보=올봄에는 꽃이 일러 동강할미꽃도 일찍 피었다. 예년에는 4월 중순이면 절정이었지만, 올해는 4월 중순이면 질 것 같다. 동강할미꽃마을(idonggang.com) 033-563-3365.)
소년이 찾은 백룡동굴이 동강 살려
백룡동굴은 1976년 평창군 마하리의 소년 정무룡이 발견했다. 마하리 일대 뼝대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동굴이 여러 개 있었다. 개중에서 마하리 소년들의 놀이터가 됐던 동굴이 있었다. 안쪽 200m까지 뚫린 제법 큰 동굴이었다.
소년 정무룡은 어느 날 동굴 맨 안쪽 바닥에서 구멍을 찾아냈다. 주먹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었다. 바닥에 엎드려 코를 갖다 댔다. 차가운 바람이 구멍 저쪽에서 불어왔다. 소년은 사촌동생들을 불러 모아 탐사대를 꾸렸고, 소년 탐사대 다섯 명은 사흘 동안 구멍을 팠다. 마침내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소년은 기어서 구멍을 통과했다.
|
긴 시간이 흘러 1996년. 한동안 잊힌 이름이었던 백룡동굴이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정부가 동강댐 건설 계획을 발표하자 환경단체와 주민이 “백룡동굴을 지키자!”며 반대 시위를 벌였다. 댐이 들어서면 동강 수면보다 겨우 10m쯤 위에 있는 백룡동굴은 그대로 수장될 참이었다. 정부는 백룡동굴과 동강할미꽃의 가치를 인정해 2000년 동강댐 건설사업을 접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2010년. 여태 일반인의 접근을 일절 막았던 백룡동굴이 개방됐다. 그렇다고 함부로 열어젖히지는 않았다. 안전모·장화·헤드랜턴까지 안전장비를 갖춰야 입장을 허용했다. 탐방 인원에도 제한을 뒀다.
소년 정무룡은 이제 쉰 줄에 접어든 중년이 됐다. 지금도 동굴 맞은편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 백룡동굴의 ‘백(白)’은 동굴이 있는 백운산에서 따왔고 ‘룡’은 최초 발견자 이름에서 따왔다. 정무룡씨는 아마도 백룡동굴 주변을 영영 떠나지 못할 것 같다.
(탐방정보=하루에 모두 180명이 탐방할 수 있다. 1일 9회, 회당 20명씩 탐방 인원이 제한된다. 어른 1만5000원, 어린이 1만원. 백룡동굴 생태체험학습장(cave.maha.or.kr) 033-334-7200.)
|
동강은 조선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강원도에서 벌채한 목재가 서울까지 운송되던 길이다. 동강 상류 아우라지에서 떼꾼들이 뗏목을 타고 한강 천 리 길을 내려갔다. 정선군수 월급이 20원이던 시절, 정선에서 떼 한 바닥 타고 갔다 오면 30원이 들어왔다. ‘떼돈’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동강 150리(里) 물길 중에서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일대, 제장마을에서 연포마을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으뜸으로 친다. 굽이굽이 휘도는 물길과 붉은 뼝대, 그리고 정선아라리의 정서가 오롯이 밴 구간이다. 가장 동강다운 풍경이 여기서 빚어진다.
날카로운 굽이를 돌아 나온 동강은 제장마을부터 소사마을, 바세마을, 연포마을을 차례로 만나며 흘러 내려간다. 네 마을 모두 동강 너머로 붉은 뼝대를 마주하고 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제장·바새·연포 세 마을에는 떼꾼이 드나들던 주막이 있었다. 예전엔 제장마을과 연포마을에 들어가려면 줄배를 타야 했다. 강 이쪽 편과 건너편에 줄을 이어놓고 사공이 줄을 당겨 배를 움직였다. 지금은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다.
|
정선 하늘은 세 뼘이라느니, 앞산과 뒷산에 줄을 이어 빨래를 넌다느니 같은 허풍 섞인 농(弄)이 정선 땅에는 전해 내려온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다는 뜻이리라. 연포마을을 둘러싼 산세도 그러하다. 마을 앞에 버티고 서 있는 봉우리 세 개 사이로 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해 연포마을엔 하루에 해가 세 번 뜬다는 말도 있다.
제장마을에서 칠족령을 오르면 동강 12경(景) 가운데 맨 먼저 꼽는 장관이 펼쳐진다. 물길이 거의 360도 각도를 이르며 산 사이를 비집고 흐른다.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다. 눈앞에서만 동강은 크게 세 번 몸을 뒤튼다. 어떻게든 끊어지지 않으려고 이리 비틀대고 저리 꺾이며 몸부림치는 것 같다. 내가 살아온 길도 저렇게 흔들렸다.
(탐방정보=제장마을에서 칠족령 오르는 길은 이정표가 잘돼 있다. 넉넉잡아 서너 시간이면 제장에서 칠족령을 거쳐 연포까지 갈 수 있다. 정선군청(jeongseon.go.kr) 문화관광과 033-560-2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