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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누구를 위한 예술정책인가?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2. 2. 22:05

이슈 & 이슈

누구를 위한 예술정책인가? / 나호열( 시인, 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문화관광부는 문화관광체육부로 명칭이 바뀌고 새로이 유인촌 장관이 취임했습니다. 명시적으로 새정부의 문화정책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그간 장관의 기자회견, <새 정부 문화체육관광정책 대토론회>, <순수예술 육성을 위한 토론회>에서 간접지원·사후지원 등을 거론하며 지원정책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슈 & 이슈>는 새 정부의 문화정책과 관련한 각계의 주장과 견해를 싣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예술정책인가? / 나호열( 시인, 한국예총 정책연구위원)

지난 연말 대선을 앞두고 대선 후보들에게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설문을 보내고 응답내용을 검토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토론자들도 동의한 바 이지만 새롭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부응하는 정책을 제시한 후보들이 없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가 한 묶음으로 편하게 말하는 '문화'와 '예술' 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그 누구도 명확한 지형도를 그릴 능력이 없거나 아예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반증이라고 예기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고 보니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건 200여개에 달하는 국정 아이템에도 문화예술에 관련된 항목은 불과 서 너 개에 불과했다.

이를 두고 필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문화예술정책은 쉽게 그 기반을 흔드는 변혁보다는 창조적 계승이 필요하고 사탕발림식 대 국민 홍보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터라 오히려 거창한 정책을 제시하지 않은 현 정부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면한 현실은 예상과는 달리 문화예술계를 둘러싼 논쟁과 불협화음은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문화부 장관 인선을 비롯한 유관 공공기관장의 임면을 둘러싼 대립,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진로를 놓고 전면적인 개혁이냐 아니면 부분적인 보수를 할 것이냐 등등 그동안 잠재되어 왔던 여러 문제들이 봇물 터지듯 불거져 나왔던 것이다.

민주사회의 장점이자 특징은 다양한 목소리들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바람직한 하나의 대안을 도출하는 시스템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과정의 투명성과 합리성이 마땅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형국은 제대로 그 의미도 짚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도는 보수와 진보의 힘겨루기, 문화부와 예술위의 샅바싸움, 예총과 민예총 등 서로 색깔을 달리하는 단체간의 보이지 않는 알력 등 얽히고 설킨 난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얽힌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기에는 시간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실타래를 푸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지 모르기에 분명하고 매력적인 해결책은 쾌도난마식의 정책 전환일 것이다. 이 방식은 지난 정부들이 다 같이 전가의 보도로 휘둘러온 지침이다. 과거의 방식을 일거에 부정하고 새로운 기둥을 세우는 것, 그러면서도 외면상으로는 민주적 절차와 모양새를 갖춘, 국민을 떠받드는 태도 말이다.

여기서 몇 가지의 중요한 쟁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우리는 문예진흥기금 자원의 고갈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국가의 예산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부처와 문화부의 입장의 차이가 분명한 상태에서 문예진흥기금의 안정적 확보는 국가적 결단에 속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술위원회는 복잡한 예산 확정 과정을 거처 문화부의 지침을 따를 수 밖에 없다. 팔길이 원칙을 내세우는 예술위원회의 집행부와 예산을 관리하는 문화부의 시각은 편차가 크다. 최근에 불거져 나온 예술위원회의 예산집행의 불투명성은 더욱 이러한 시각의 간격을 넓힐 수 있는 소지가 크다. 누가 기금의 안정적 확보의 열쇠를 쥐고 있는가?

두 번째 로 창작자 중심에서 향유자 중심의 지원 방향 전환의 문제이다. 창작자인 예술가들은 더욱 더 직접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요구하고 한편에서는 향수자의 요구에 부응하고 문화적 삶을 고양시키는 향유자의 능동적 참여를 촉발하는 예산의 집행을 추진해 온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창작자 직접지원보다는 기반시설 확충등의 간접지원의 방향이 합리적이라고 보고 있고, 수 십 년간의 문예진흥기금의 직접 지원 발식이 조 단위를 넘어섬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에 있어서는 기대치에 미흡하다는 경영적 측면의 진단도 덧붙여지고 있다. 더 나아가서 문화산업의 큰 테두리 안에서 예술을 포섭하려는 시도들도 순수예술가와 대립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 번 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여전히 이념적 편가르기가 종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다양성이 강조되고 존중되는 사회에서 한 단체가 지니고 있는 이념적 코드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예술계 스스로 자정해야할 문제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우리가 보낸 지난 시간들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이 노출된 시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지난 10 년 동안의 문화예술정책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상의 과잉에서 비롯된 실패의 과정이었다고 본다. 한국적 상황을 도외시한 채 선진국의 문화예술정책을 입식하려고 하는데서 발생한 문제들을 또 다시 해석을 달리하여 받아들이려고 하는 태도는 온당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관료의 입장에서 추진하는 조직과 문화예술정책이 잘못되었다면 민간기구로 새 출발한 예술가 중심의 문화예술정책은 과연 온당하고 합리적인 대안과 실천력을 보여주었는가? 오늘날 예술위원회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원회 집행부와 사무처 조직과의 갈등은 조직을 장악한 예술가들의 한계와 오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 없다

현재 문화부와 예술위원회는 각 장르별 공청회와 토론회를 연일 개최하고 있다. 예술위원회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위한 민주적 절차를 밟고 있는 셈이다. 몇 달 후면 제 2기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선임이 있게 되고, 위원회 조직, 권한과 책무 등의 조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졸속적이고 근시안적인 대안이 도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게 되는 것은 지난 시절 예술위의 행적 때문이다. 소위원회를 포함한 위원회 위원 선임 과정의 불명료성, 지원 심사를 둘러싼 공정성에 대한 의심 등을 덮어둘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위원회의 무용론이나 다른 체제로의 전환 요구는 또 다른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문화부의 주도 아래 새로운 문화예술정책의 얼개가 발표된 바 있다. 기존의 지원체제를 일신하고 보다 합리적인 대안을 도출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전지원방식에서 사후지원 방식으로의 전환, 선택과 집중, 직접지원에서 간접지원 방식으로의 전환 등 기존의 방식을 개편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여러 반응들이 나오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예술위원회 노조는 그들의 노보를 통해서 문화부가 입안한 정책안에 대해서 반대의 의사를 표명했고, 그러면서도 같은 노보에서는 예술위 사무처 인사에 있어 균형을 잃어버린 위원회 집행부를 성토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서 원론에는 찬성하나 각론에는 반대하는 입장과 원론과 각론에 대해서 모두 거부하는 태도도 드러나고 있다. 충분하게 우리는 각계 각층의 다양한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다양한 목소리들을 화음으로 재구성하는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새 술은 새 통에 넣어야 한다'는 논리에 강박되다 보면 자칫 득보다 실이 더 큰 낭패를 보게되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해서 나온 결과가 무엇이었나? 비정규직들의 안정적 고용을 위한다고 만든 법이 사회적 약자들을 더 많이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음은 현실의 논리보다 이념적 이상에 빠져든 뼈아픈 교훈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새 정부에 거는 기대는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문화예술정책을 입안해 달라는 것이다. 그 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변질되고 왜곡되는 정책이 아니라 누구나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고 즐길 수 있는 정책의 기반 조성에 힘써 달라는 것이다.

누구나 문화적 삶의 고양을 원하지만 그 기반에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풍요가 조성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또 어느 정도의 경제적 풍요가 주어졌다고 해도 학습되지 않은 문화적 삶을 기대할 수가 없다. 분명히 말하건대 학습되지 않은 삶은 소비지향적이고 단편적인 문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학습된 예술의 가치는 창조적 삶의 역동성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국가의 문화예술정책은 문화예술교육 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과 같이 황폐해진 예술교육 현장을 방치한 상태에서 어떠한 정책도 사상누각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대학입시에 몰입하고 있는 국민적 정서를 전환시킬 수 있는 방안을 문화예술교육에서 찾아야 한다. 예술가와 단체들은 대중들이 예술적 안목을 높이고 향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어야 한다.

문화 예술계를 둘러싼 논란과 새로운 정책은 다수의 말 없는 국민들을 위한 방향으로 설정되고 수렴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너무 소박한 희망인가?

[출처] 문화정책동향 2008_11 (스페이스 빔 커뮤니티) |작성자 minoon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