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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살기, 꽃과 나의 투쟁은 닮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18. 14:50

 

아름답게 살기, 꽃과 나의 투쟁은 닮았다

등록 : 2012.05.18 19:33수정 : 2012.05.23 11:46

 
 
야속한 봄날씨처럼 꽃은 속절없이 져 내리고, 몇 송이 남아 있는 꽃송이에서 작년에 보았던 만개한 복사꽃을 떠올리는 듯 김선우는 환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강릉/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토요판] 최재봉의 공간
⑯ 시인 김선우의 주문진 복사꽃밭

터널을 지나자 비의 나라였다. 뿌연 안개가 그물처럼 덮쳐 왔다. 일정한 방향 없이 바람에 휘몰아치는 비가 차창을 마구 때렸다. 차단막이 쳐진 듯 시야가 불량했다. 비상등 깜빡이를 켜고 차의 속도를 뚝 떨어뜨렸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갑작스런 변화였다. 터널에 들어서기 전까지 날씨는 화창했다. 춘천의 하늘은, 천국의 날씨가 있다면 이렇겠다 싶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파란 하늘에 치밀한 미학적 계산의 결과인 양 떠 있던 구름 몇 점. 세상 전부가 내게 안겨 오듯 탁 트인 시야. 쾌적한 온도와 습도. 그리고 대기 중의 꽃향기까지. 그런 춘천에서 의암호와 중도를 내려다보며 마시는 커피 맛조차 황홀했다. 오늘의 주인공인 시인 겸 소설가 김선우의 헐렁하면서 알록달록한 퀼트 바지 차림새가 들뜬 봄소풍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했다. 횡성 시내를 통과한 뒤 대관령을 향해 고도를 높여 갈수록 늦게 핀 산벚꽃들 또한 나들이의 기대를 높여 주었다.

 

“떴다 비행기, 콜타르 같은/ 인간의 마을은 아득한데/ 아, 허공은 따뜻하구나/ 시속 팔백, 구백 킬로미터로/ 시든 어머니께 꽃 따 드리러 가는 길/ 스러지며 타닥, 초록 불씨를 지피는/ 산벚꽃나무 봄산에 만발하였네”(김선우 시 <떴다, 비행기> 부분)

 

 

아뿔싸! 만발한 복사꽃밭을 기대했건만…

 

오늘의 목적지가 횡성 둔내 즈음의 산벚꽃 만발한 야산이었다면 좋았을 게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리 복사꽃마을이 그곳이었고,

그리로 가기 위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세계는 그렇게 얼굴을 바꾼 것이었다. 흡사 세계가 터널 이쪽과 저쪽, 아니 터널 이전과 이후로 나뉜 것 같았다. 일단 터널을 지나온 다음에는 터널 반대쪽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조차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영(嶺)의 동쪽에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듣고 나선 길이었음에도 차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다시 고도가 낮아지면서 비바람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영 너머에서 만났던 쨍한 햇빛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흐린 날씨와 복사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데…. 복사꽃 아래서 술 한잔 하자면 날씨가 도와줘야 할 텐데…. 아니, 이런 날씨면 아예 복사꽃이 다 져 버리진 않았을까? 만발한 복사꽃밭을 겨냥한 취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건 아닐까? 추상적인 불안이 아닌 현실적 불안이 엄습해 왔다. 때는 5월 초. 남쪽의 복사꽃은 벌써 진 뒤였다. 그래도 이곳은 위도가 높아 기대할 만하다며 나선 길이었다. 복사꽃마을의 축제도 바로 엊그제 아니었던가. 애써 불안감을 다독이며 남은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아뿔싸! 한발 늦었다.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장덕리 야트막한 언덕바지의 복사꽃밭은 황량했다. 꽃들은 대부분 져 내리고, 꽃받침과 암술 수술만이 열매를 기약하고 있었다. 야속했다. 친구들이 다 진 뒤에도 늦게까지 남아 지각한 여행객을 맞이해 주는 몇 송이 복사꽃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복사꽃만 꽃이냐며, 여기도 한번 보라는 듯 활짝 핀 사과꽃과 돌배나무꽃이 반가우면서도 얄미웠다.

 

“작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왔었는데, 그땐 축제 기간이고 꽃도 한창일 때라서 사람이 많았어요. 꽃나무 아래 돗자리 펴고 앉아 음식도 먹으면서 한나절 잘 놀았는데….”

김선우의 말끝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앙상한 복숭아나무 가지에 작년에 보았던 만개한 꽃을 피우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눈길이 아련해졌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러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도화 아래 잠들다> 부분)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도화 아래 잠들다>는 사실 장덕리 복사꽃밭에서 쓴 작품이 아니다. 이 시의 무대는 장덕리보다 더 유명한 영덕 복사꽃밭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한 2003년 봄 여행길에 영덕 복사꽃밭을 지나는데 그 고적한 아름다움과 아침 텔레비전 뉴스로 본 전쟁의 참상이 겹쳐지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나더라고 시인은 돌이켜 말했다. 복사꽃의 화사함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포화와 죄, 무덤 같은 낱말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복사꽃을 대신해 활짝 핀 돌배나무꽃 아래에서 마지막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김선우 시인. 강릉/신소영 기자
도화살이 나쁜가요
절정을 향한 노동이고
생의 에너지인걸요

한진중, 강정마을, 쌍용차…
절망하더라도 살아야 하니까
힘껏 희망을 만들어야죠
꽃이 저를 피우려는
몸부림에 박수를 보내야죠

 

봄의 연례행사, 어머니와의 꽃놀이

 

복사꽃은 요염하다. 어느 꽃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복사꽃은 보는 이의 기분을 지상 오십 센티미터쯤 위로 들어올리는 부력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복사꽃이 만개한 과수원에 들어 있으면 어쩐지 꿈속을 거니는 듯 아득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옛사람들이 지상에 없는 낙원의 표상으로 무릉도원을 꿈꾸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우가 도화를 탐하는 것이 반드시 복사꽃의 요염함과 아득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도화가 아니더라도 모든 꽃은 현실의 더러운 욕망과 구분되는 무욕한 아름다움을 대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서너 편에 하나꼴일 만큼 꽃에 관한 시를 유난히 많이 쓰는 까닭이 그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복사꽃의 특별함이 있죠. 가령 <도화 아래 잠들다>를 쓸 때 저는 ‘도화살’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부정적인 편견을 흐트러뜨리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적극적으로 색을 탐하는 생의 에너지에 대해 쓰고 싶었던 거죠. 저는 도덕주의자라기보다는 쾌락주의자에 가까워요. 인간이란 그저 이 별에 잠깐 왔다 가는 존재이고,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시간과 가능성을 소중하게, 남김없이 다 쓰고 가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에서부터 김선우의 시가 관능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생태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된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는 또한 어머니를 다룬 시가 적지 않은데, 김선우에게 복사꽃이 지니는 두 번째, 각별한 의미가 바로 어머니와의 이야기에 있다.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바기 아이처럼 졸라대고”(<거꾸로 가는 생> 부분)

앞서 인용한 시 <떴다, 비행기>에서도 보았지만, 김선우는 해마다 봄이면 어머니를 모시고 꽃을 보러 다닌다. 장덕리 복사꽃마을에서 만개한 복사꽃을 보며 음식을 먹은 뒤 가까운 온천에서 같이 목욕하고, 좀더 여유가 있으면 소금강과 진고개를 둘러보고 강릉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팔순의 어머니는 예순살에 뇌졸중을 앓은 데 이어 5, 6년 전부터는 치매까지 찾아와 지금은 “스무 살 전후의 꽃다운 나이를 살고 계시다.” 그 어머니가 나무에 연두물이 오르는 봄이면 밖으로 꽃구경을 가고 싶다며 딸에게 보채는 것.

 

늙고 병든 어머니와 함께 찾는 장덕리 도화원에 무덤 두어 기가 자연스럽게 안겨 있는 모습은 퍽 상징적이다. 복사꽃이 뿜어내는 강렬한 생의 에너지와 고적하고 평화로운 죽음의 세계가 함께 있는 그 풍경이 조금도 이물스럽지가 않다. 그 풍경은 어쩐지 김선우의 첫 시집에 실린 <내력>이라는 작품을 떠오르게 한다.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내력> 부분)

이제는 몸과 마음이 두루 허약해진 어머니를, 스스로 어머니가 된 양 차에 태워 꽃놀이를 다니는 ‘효녀’ 김선우가 올해는 그 연례행사를 치르지 못했다. 3월 초에 네 번째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가 나온데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김진숙 구하기에서부터 시작해 올해의 강정 구럼비바위 살리기와 쌍용자동차 싸움까지 여러 사회적 의제에 매달리다 보니 그만 시기를 놓치고 만 것. 이날의 나들이는 그로서도 올봄 처음이자 마지막 꽃놀이였는데, 낙담이 컸을 게다.

 

망의 시대 생존전략 ‘춤추면서 싸우자’

 

“사실 이 정부 들어선 뒤로는 봄에도 온전히 기쁜 마음으로 꽃을 즐기기 힘들었어요. 다 잊고 좋은 사람들과 봄꽃 아래서 술 한잔 하고 싶어도, ‘세상이 어떤 지경인데,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움츠러들곤 했죠. 비록 늦긴 했지만, 그리고 날씨도 도와주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복사꽃 그늘 아래 서 있자니 무언가 할 일을 한 듯한 뿌듯함은 있네요.”

김선우는 2010년 12월 중순 인도의 생태 및 영성 공동체 오로빌로 건너갔다가 지난해 1월 말에 귀국했다(오로빌에서 그가 보고 겪고 느낀 것들은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는 책에 담겨 있다). 그가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에 관해 처음 들은 것은 3월 초였다. ‘집단행동에 대한 어색함’을 누르고 동료 시인 송경동이 제안한 희망버스에 탑승한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도 여러번 영도를 찾았다. 칼럼 등을 통해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다.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무사히 내려온 뒤에는 곧바로 강정 구럼비바위 살리기 싸움에 뛰어들었다. 올 3월부터 연재하기로 한 소설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동안 구럼비바위 폭파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 한국작가회의가 항의 단식 농성단을 모집한다는 메일을 받고 곧바로 응했더니 ‘1번 타자’가 되었다. 3월31일 홍대앞 인문카페 창비, 그리고 4월27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는 강정마을을 후원하기 위한 시노래 콘서트를 직접 조직했고 지금은 3차 콘서트를 준비중이다. 지난 11일에는 쌍용자동차 문화제에서 동료 시인 송경동·진은영·심보선과 함께 연대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저는 사실 인류라는 종의 미래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에요. 지금처럼 살다가는 지구에서 추방되거나 지구 멸망을 앞당기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절망하더라도 살아야 하니까, 있는 힘껏 희망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건 일종의 생존전략이라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춤추면서 싸우자!’는 공허한 레토릭이 아니에요. 춤추듯이 즐겁게 싸우다 보면 진짜로 낙관의 힘이 생기고 생을 포기하지 않게 되죠.”

‘2011년을 기억함’이라는 부제를 단, 네 번째 시집의 표제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김선우의 최근 경험과 사유를 집약적으로 담고 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부분)

태어난 모든 것이 죽을 운명인 것처럼, 만개했던 복사꽃이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는 사태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송이 꽃이 저를 피우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찬란한 착란’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착란이 찬란하다면, 난관은 낙관으로 돌파할 수 있을 것이었다. 착란과 찬란, 난관과 낙관의 말장난 같은 관계에서 꽃과 예술가는 닮았다. 기대했던 만개한 복사꽃밭을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 ‘아름다움에의 의지’와 ‘일상의 미학적 경영’을 힘주어 말하는 김선우의 얼굴에 장덕리 복사꽃밭의 붉은 꽃물이 어룽져 보였다. 또 하나의 봄이, 이렇게, 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영상은 한겨레티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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