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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있는 슬픈 언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2. 11. 11:23

 

힘 있는 슬픈 언어

 

황정산( 문학평론가)

 

슬픔은 흔히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감정으로 생각된다. 채울 수 없는 욕망의 좌절이 슬픔이기에 슬픔 그 자체가 무력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슬픔은 약한 것들의 특성이다. 작고 힘 없는 것들이 세상을 견디며 스스로의 존재 안에 내면화시켜 가는 정서가 바로 슬픔이다. 때문에 이 슬픔을 몰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힘을 가지려 한다. 돈을 가지든가 권력을 가지든가 그것도 아니면 육체적인 힘이라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행복이 온다고 믿는다. 어찌보면 세상은 슬픔을 밀어내기 위한 전쟁터이기도 하다.

나호열의 시집 타인의 슬픔은 그 표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슬픔에 관한 시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의 시들에서 보이는 슬픔은 무력하지 않다. 슬픔에 힘이 느껴진다. 힘 있는 슬픔이란 형용모순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슬픔은 무력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호열의 시들은 이 형용모순을 새로운 정서로 만들어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썼다가 금세 지워지는 힘찬 일획/ 저 그림, 저 글씨를/ 어디에 담으려 하는가//(중략)

가까이 다가서지 마라 /고단한 날갯짓과 노동의 땀내음이/ 하늘 뒷 켠으로 보인다 /

눈물로 얼룩진다

「원경 」부분

 

풍경의 디테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모두 슬픔을 내면화하고 있다. 고단한 삶이 가져온 욕망의 좌절이 우리의 삶에 편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멀리서 바라본다. 그래서 시의 제목이 '원경'이다. 그런데 멀리 바라보는 것은 그 슬픔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 존재들이 가지는 슬픔을 객관화하고 포용하려는 자세가 세상을 원경으로 보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원경으로 바라보자 세상은 힘찬 일획을 가진 그림, 글씨로 보인다. 슬픔들이 힘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이 우리가 삶에서 발견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된다.

슬픔을 바로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는 슬픔을 미화하고 과장하여 자기연민으로 치환한다. 예술적 감상주의나 우울증적 삶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아니면 슬픔을 외면한다. 거짓된 위안과 순간적인 쾌락을 통해 슬픔을 잊게 하려는 피상적인 오락 문화가 이를 대변한다.

나호열의 시는 이와 달리 슬픔을 받아들인다. 그것도 타인의 슬픔까지 함께 받아들인다. 이렇게 타인의 슬픔을 함께 받아들일 때 타인은 나에게 끝없는 욕망의 좌절과 그로 인한 슬픔을 가져다주는 대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슬픔을 나누는 정서적 연대의 구성원이 된다. 슬픔이 힘을 갖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문득 의자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의자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으므로

제 풀에 주저앉았음이 틀림이 없다

견고했던 그 의자는 거듭된 눌림에도

고통의 내색을 보인 적이 없으나

스스로 몸과 마음을 결합했던 못을

뱉어내버린 것이다

이미 구부러지고 끝이 뭉툭해진 생각은

쓸모가 없다

다시 의자는 제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다

태어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슬픔을 너무 오래 배웠던 탓이다

 

- 「 타인의 슬픔.1」전문

 

 

의자는 의자 위에 앉았을 여러 사람들의 슬픔의 무게 때문에 결국은 주저앉고 만다. 그렇게 주저앉은 의자는 다시 일러날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무력한 존재, 쓸모없는 존재가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다. 시인이 그 존재의 의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려진 의자는 결코 무력하지만은 않다. 모든 삶의 무게를 감당한 든든한 맷집을 가졌던 존재, 스스로의 구조적 형태로 몸과 마음을 결합시켰던 존재로서의 힘이 지금의 무력한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인은 바로 그 무력한 슬픔 속에 잠재해 있는 힘을 그려내고 있다.

나호열의 시들은 바로 이런 힘찬 슬픔을 그려낸 새로운 언어이다. 그런데 이 힘찬 슬픔은

시인의 운명이기도 하다. 타인의 슬픔을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고통으로 언어화 해내다가 결국 삶을 마감하는 시인이 바로 위 시의 의자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계간 『미네르바』2009년 여름호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