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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 드리는 인간주의적 하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12. 2. 19:01

 

[박범신 칼럼] 정치판에 드리는 인간주의적 하소

한겨레 | 입력 2012.10.30 19:30
[한겨레] 평생 '두통'에 시달렸다. 젊을 때는 두통에 좋다는 온갖 것을 찾아 먹었고, 원고 쓸 때마다 진통제를 상용했다. 무엇을 먹어 해결할 수 없는 게 두통이라는 걸 아는 데 거의 수십년이 걸렸다. 두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런 지속적인 두통 속에서 그 많은 소설을 써온 나 자신에게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살아계실 때 어머니는 자주 아버지의 대님 끈으로 이마를 묶고 다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골이 쏟아지려고 하는구나" 하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나의 두통은 어머니로부터 대물림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하건대 어머니의 두통은, 해방 직후의 고단했던 세계사적 흐름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집을 비울 때가 많았던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어린 것들을 당신 혼자 건사하며 견뎌내야 했던 생의 무게로부터 비롯된 것일 게다. 그런데 이미 어머니만큼 가난하지도 않은 나의 두통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가슴속에 '시인'이 들어 있다고 본다. 일찍이 내가 쓴 시 중에서 '시인'이라는 제목의 산문시가 있는데 그 일부를 옮겨놓으면 이렇다. "어린 왕자가 산다는 혹성612호에 가고 싶은 날에도 습관처럼 갑옷을 입고 쇠단추를 채우고 쇠 지퍼 착착 올리고 그리고 시인을 갑옷 속에 숨겨놓는다. 참을성 많은 나의 시인은 횡격막에 눌려 죽을 듯 비지땀을 흘리지만 비명을 지르진 않는다 한낮의 시간은 철저히 산문적이다"

산문은 논리를 따라가야 완성되지만 시는 논리의 해방을 쫓아간다. 산문은 철저히 지상에 있고 시는 때로 우주 너머에까지 제 목소리의 춤으로 채울 수 있다. 내 평생의 두통은 어쩌면 나의 '시인'을 계속적으로 어두운 횡격막 아래 가두어놓아야 한다는 이상한 강박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고, '시인'의 해방은 곧 현실의 실패로 드러날 것이라는 생의 본원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발 중심의 지난 반세기, 우리는 철저히 리얼한 산문의 방법으로만 살도록 명령받고 있었으며,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시인'을 버리라고 줄곧 요구받고 있었으니까. 고백하거니와, 7, 80년대는 시대와의 불화가 나의 두통을 가중시켰고, 요즘은 시간과의 불화가 나의 두통을 가중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왜 좀더 적극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발언'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더러 발언의 마당으로 나오라는 구체적인 손짓을 받기도 한다. 바야흐로 정치가 창궐하는 시절이라서 더욱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소설을 통해 이미 충분히 발언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래서 더 '소음'을 보태고 싶진 않다. 내게 더 적극적인 발언을 주문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엔 일반적으로 '내 편'과 '네 편'이 은신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러므로 그 '발언'은 타인에 대한 공세적인 비판을 앞세운 배타성에 의지해야 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가로서 나의 상상력엔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믿는다.

나는 되도록 단독자로서의 작가라는 얼굴로 생을 시종하고 싶다. 어떤 트렌드에도 편입되고 싶지 않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집단 속에 있으면 당연히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안정감은 상상력에게 그리 바람직한 처방이 아니라는 걸 나는 믿는다. 떼를 짓거나 내 곁에 '내 편'을 모아놓지 않고, 홀로 견디어내는 고독이야말로 모든 문학적 문장의 알집이다. 단독자로 살면 물 밑에서 구르는 돌처럼 이끼 낄 새가 없다. 그러니, 나는 늘 문학을 나의 방부제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다고 해서 고질적인 '두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87년, '양 김'이 분열되어 함께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나는 가까운 작가 친구와 지지자를 놓고 언짢은 언쟁을 한 바 있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요즘 나의 두통은 그런 국면이 재연될까 봐 더 깊어지고 있다. 나의 '시인'도 덩달아 고달프다. 나 같은 사람의 두통을 씻어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복지'일는지도 모른다. 꼭 내가 대통령이 돼야 국민복지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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