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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와 시집에 대한 평론

불타는 詩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3. 10. 16:32

 

불타는 詩 / 나호열

 

맹목으로 달려가던 청춘의 화살이

동천 눈물 주머니를 꿰뚫었는지

눈발 쏟아지는 어느 날 저녁

시인들은 역으로 나가 시를 읊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에

장미가 피고 촛불이 너울거리는 밤

누가 묻지 않았는데 시인들의 약력은

길고 길었다

 

노숙자에게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다

채권 다발 같은 시집 몇 권이

딱딱한 베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둠한 역사 계단 밑에서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내리시는 무언의 시가

발밑에 짓이겨지는 동안

가벼운 재로 승천하는 불타는 시가

매운 눈물이 된다

 

아, 불타는 시

 

『시와 미학』 2011 겨울호

 

청춘 시절부터 시의 과녁을 향해 곧게 달려온 시인들의 열정에 하늘도 감동하여 축복처럼 눈발을 내려주는 저녁이다. 시인들이 역으로 나가 읊는 시가 “장미”로 피고 “촛불”로 타올라 광장을 수놓으며 어둠을 밝힌다. 그러나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온, 그 길고 긴 “약력”을 털어놓는 시인들은 직장에서 버림받고 가정에서 외면당한 “노숙자”와 무엇이 다를까. 고통의 대가를 되찾게 해줄 “채권다발 같은 시집” 이 “딱딱한 베개”나 “언 손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될지”도 모르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하다. 그런 시집을 내며 시인으로 산다는 게 전생에서 잘못 맺은 인연 때문이라면 “전생을 묻는 것은 실례”가 될 것이다. 시인들의 영혼같이 하얀 눈, 그 “무언의 시”가 행인들의 “발밑에 짓이겨 지는 동안” 에도 시는 불타서 “가벼운 재로 승천”을 한다. 시의 불꽃을 보고 “매운 눈물”을 흘리는 이는 행인일까, 아니면 시인일까. “불타는 시”가 가벼운 재가 되어 날아오른 역 광장 위 하늘에 시어보다 더 많은 별이 빛날 것이다. 그 작은 별들이 시린 시인의 가슴을 달래주고 역 대합실에 나와 서성이는 행인들에게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를 알려줄 것이다.

『2012년 오늘의 좋은 시』(푸른 사상) 김석환 (시인, 명지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