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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0. 8. 22:26

조선일보 입력 : 2011.09.29 14:58

산행은 비선폭포를 들머리로
등룡폭포~억새꽃밭~팔각정을 잇는 코스가 가장 인기

가을을 마중하고 싶다면 명성산(921.7m)을 권한다. 명성산은 '수도권 억새 1번지'로 꼽힌다. 억새는 단풍보다 더 일찍 피어나 여름의 작별과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 온통 은빛으로 물들이며 감성의 계절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경기도 첫째 산, 명성산이다.

명성산은 포천철원 경계에 있다. 경기도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산줄기는 북에서 남으로 뻗은 직선에 가까운 능선이다. 산행은 비선폭포를 들머리로 등룡폭포~억새꽃밭~팔각정을 잇는 코스가 가장 인기다. 명성산 정상은 억새꽃밭에서 북쪽으로 5km 이상 떨어져 있어, 억새꽃밭의 꼭대기인 팔각정을 정상으로 삼는 이가 많다. 하산은 팔각정에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종주해 자인사로 내려가거나 책바위로 내려간다. 자인사와 책바위길은 급경사 내리막이라 초보자들은 완만한 등룡폭포 쪽으로 내려가는 이가 많다.

가을의 정취를 즐기는 데는 억새가 으뜸. 명성산 삼각봉으로 오르는 능선 주변이 온통 억새로 뒤덮여 있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억새꽃밭

지나친 아름다움은 독이 되기도 한다. 명성산이 그렇다. 주말, 제아무리 일찍 왔어도 생각이 같은 등산객이 수두룩하다. 산 입구부터 늘어선 차량 행렬로 붐빈다. 웬만한 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은 주차장이지만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와 차량으로 가득하다. 입산하면 좀 낫다. 숲이 온갖 시끄러운 것들을 받아 삼키며 나름의 고요와 초록의 질서를 지키고 있다. 계곡은 메말라 있어 바위만 뒹구는 모습이 깡마른 난민처럼 안쓰럽다.

흙과 바위가 뒹구는 자연스러운 길이 많고 간간이 데크로 정비한 길도 나온다. 숲은 도시의 묵은 긴장을 풀라며 완만한 길을 내준다. 등산객이 많지만 정체되거나 걷기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천장을 이룬 나무 이파리를 투영하며 내리쬐는 햇살이 숲을 매력적인 분위기로 포장한다. 굳었던 근육이 풀어지고 걸음에 탄력이 붙을 무렵, 걸음을 세우는 건 등룡폭포다. 장독대처럼 매끈하고 불룩한 바위 위를 명맥만 남은 가는 물줄기가 졸졸 흐른다.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았고 계곡 특성상 물이 바위 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탓이다.

사람들은 "에이, 저게 폭포야" 하면서도 기념사진을 찍는다. 매끈하고 무게감 있는 바위의 매무새가 비록 말랐어도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한쪽에선 10월에 본격적으로 몰려올 등산 인파를 감당하기 위해 길을 정비하고 철다리를 놓느라 바쁘다. 뙤약볕은 여전히 뜨거워 가을보다는 여름에 가까운 분위기다. 오르막이 가팔라지나 싶더니 "우와~"하는 환성 소리가 들린다.

억새꽃밭이다. 은빛 바다가 해일처럼 밀려와 눈앞에서 물결친다. 자세히 보면 새 깃털처럼 부드럽고 여인의 손길처럼 섬세하다. 이제 막 피어난 꽃은 잡티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다. 열여덟이나 아홉쯤 될까? 화장기라곤 없는, 그러나 잡티 하나 없는 민낯의 소녀처럼 맑고 단아하다.

억새꽃의 미모를 완성하는 건 햇살이다. 스타를 위한 조명처럼 은빛으로 빛나게 한다. 그렇다. 가을 산에서 주인공은 억새이고 사람들은 관객이다. 억새는 바람에 맞춰 왈츠를 추기도 하고 때론 신나게 댄스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 산객의 얼굴은 미소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뙤약볕의 오르막을 올라올 때만 해도 무덤덤하거나 찌푸린 얼굴이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렇게 사람들 표정을 바꿔 놓을 수 있다니 놀랍다.

솜사탕 위를 걷는 것처럼 달콤한 억새밭을 오른다. 휘어져 오르는 길은 앞서가는 사람을 은빛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곱게 사람을 떠나보내는 억새만의 감미로운 이별 방식이다. 능선 사이, 부드럽게 움푹 팬 초원 모두가 억새밭이다. 아껴 먹듯 느리게 오르며 가을의 파라다이스를 만끽한다. 하늘을 떠받든 것처럼 가지를 펴든 나무 아래 약수터가 있다. 천년수(千年水)라고 일컫는데, 궁예약수라고도 한다.

궁예 전설이 얽힌 약수

명성산을 비롯한 포천 일대 산은 궁예와 관련된 설화가 많다. 전설에 따르면 후삼국시대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여 도망치다 이곳에서 피살되자 주인을 잃은 신하와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크게 울었다 하여 '울음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명성산(鳴聲山)은 울음산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곳 약수는 궁예의 눈물처럼 샘솟는다 하여 궁예약수가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극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물맛이 달다고 안내판에 적혀있으나 비가 한동안 오지 않아서인지 물이 말랐다.

샘터에서 능선이 가깝게 보인다. 골인 지점의 테이프처럼 빨리 오라 손짓하는 건 2층 구조의 팔각정이다. 오랜만에 오르막이 성질을 부리며 센 길을 내준다. 완주를 위한 통과의례처럼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팔각정을 향해 줄지어 오른다. 팔각정에 닿자 풍경보다 먼저 눈이 가는 건 아이스크림 장수다. 2000원이면 비싼 편이지만 여기까지 지고 온 노력을 생각해 선뜻 돈을 내고 얼음과자를 입에 베어 문다. 이제야 풍경이 눈에 든다. 스키장 꼭대기에서 본 슬로프처럼 억새밭이 매끈하게 아래로 이어져 있다.

더 높은 곳에서 억새밭을 보고 싶어 삼각봉 방향으로 능선을 이어간다. 돌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반짝이는 억새밭과 경계를 이룬 숲의 원경이 원형탈모의 두상을 보는 것 같다. 그늘이 조금이라도 있을라치면 사람들이 모여 도시락을 먹고 있다. 팔각정 근처는 웬만한 시골 장날처럼 등산객으로 붐빈다. 궁예가 전하는 가을의 전설을 만끽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어느 각도로 어딜 둘러봐도 경치는 기가 막히다. 명성산의 관광 명소인 산정호수가 뿌연 기류 탓에 흐린 윤곽만 보인 게 아쉬웠다.

하산은 남쪽으로 능선을 이어가 자인사로 간다. 짧지만 고도를 단번에 내리는 급경사다. 게다가 돌더미가 계단을 이루고 있어 다리가 풀린 상태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깔끔하게 정돈된 자인사에서 등산화 끈을 느슨하게 고쳐 묶고 잘생긴 소나무들이 늘어선 숲을 내려선다. 산정호수가 가까워지자 한바탕 놀자판을 벌였는지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가깝게 들린다. 궁예가 전하는 은빛 가을의 전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산행 정보

등룡폭포~억새꽃밭~팔각정~자인사로 이어지는 6.6km 코스는 3~4시간 정도 걸린다. 명성산 억새 산행의 가장 기본적인 코스로, 초보자와 같이 가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다. 다만 팔각정에서 자인사로 이어진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최근에는 팔각정에서 자인사로 하산하지 않고 다시 억새꽃밭으로 내려가 등룡폭포로 하산하는 이가 많다. 등룡폭포 상류에는 군부대 사격 훈련장이 있어 평일에는 입장을 통제하는 경우가 있다. 평일에는 반드시 산정호수 관리사무소(031-532-6135)에서 입산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30일은 사격 훈련 관계로 입장이 통제되며 주말은 산행 가능하다.

산을 길게 타려면 팔각정에서 명성산 정상까지 종주한 다음 신안고개로 하산하면 된다. 6시간 정도 걸리는데, 신안고개에서 주차장까지 걸어와야 한다는게 단점이다.

교통

의정부역에서 산정호수까지 운행하는 138-6번 좌석버스를 타면 된다. 오전 5시 10분부터 밤 10시 1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명성산은 가을이면 사람이 몰려 차량 정체가 생기고 주차가 어려운 곳이다. 가급적 일찍 출발해 산행을 마치는 것이 좋다. 주차비는 1500원.

숙식

주차장과 등룡폭포 입구에 식당과 펜션이 밀집해있다. 산채정식, 능이백숙, 버섯전골, 파전, 더덕무침, 이동갈비 등이 주 메뉴. 옛고을식당(031-532-6238), 비룡식당(031-531-5071), 산정호수한식뷔페(031-534-2202) 등이 있다. 숙소는 산정호수파크텔(031-531-6843), 산정호수스파펜션(031-534-2202), 산정펜션(031-534-2201), 풀하우스펜션(031-533-267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