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편지] 노루오줌 꽃 화려한 숲에서 목련이 여름 꽃을 피웠습니다

★ 1,292번째 《나무편지》 ★
목련이 피었다는 소식에 열일 젖히고 재우쳐 숲으로 떠났습니다. 다른 일로 통화를 나누던 분께서 천리포 숲에 지금 여름 목련이 한창이라고 귀띔하셨습니다. 마침 1학기 강의도 마무리한 뒤여서 학기말고사 평가 전까지 약간의 짬을 낼 수 있는 틈을 이용해 서둘러 나섰습니다. 비교적 꽃이 적은 여름이라지만, 여름에 피어나는 꽃들은 다른 계절의 꽃들에 비해 꽃송이는 더 크고 더 화려합니다.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 그늘을 뚫고 꽃가루받이를 위해 불러들여야 할 매개동물의 눈에 잘 띄기 위한 식물의 생존 번식 전략입니다. 그래서 여름의 숲은 깊은 멋이 있습니다.

천리포 바닷가 숲에는 여름 꽃들이 한창입니다. 수목원 입구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꽃은 이 계절이면 가장 눈길을 끄는 큼지막한 꽃차례의 알리움입니다. 여름 목련 때문에 발길이 끌렸지만, 천천히 이 계절을 더 아름답게 하는 꽃들을 하나 둘 천천히 만나야 했습니다. 알리움 앞에서 잠시 서성거린 뒤에는 다시 우리 수목원에서 가장 화려한 노루오줌 군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하나이지요. 알리움 노루우줌 아니라 해도 오늘의 《나무편지》에서 모두 보여드릴 수 없지만, 걸음을 옮기는 자리마다 꽃들은 무성하게 피었습니다. 한창 때를 지난 만병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대개의 만병초 꽃들은 시들어 떨어졌지만 그래도 몇 종류의 만병초 꽃은 아직 남아서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짐작대로 노루오줌은 지금이 가장 풍요롭습니다. 온갖 빛깔의 노루오줌이 한데 모여 피어있습니다. 얼마 전에 《나무편지》에서 ‘아스틸베’라는 이름으로 요즘 더 많이 불리는 탓에 다정한 우리의 이름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꽃이라고 이야기한 적 있는 우리의 풀꽃입니다. 오래 전, 우리 수목원을 일반에 개방하기 전에 ‘수목원 사무실’로 썼고, 지금은 ‘민병갈 기념관’으로 운영 중인 작은 건물 앞의 습지가 그곳이지요. 습지 안으로는 들어설 수 없어, 가녀린 그 꽃송이 하나하나를 짚어볼 수는 없지만, 가장자리에서 내다보는 풍경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노루오줌은 이 자리가 아니라 해도 수목원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천천히 길을 걷다보면 길섶에 다소곳이 피어난 노루오줌 꽃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루오줌 꽃 송이 하나하나를 더 자세히 짚어보려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으면 됩니다.

드디어 목련입니다. 정확히는 북아메리카 지역이 고향인 목련과에 속하는 나무, ‘태산목’이지요. 태산목은 북아메리카의 남부 지역이 고향인 상록성의 큰키 나무입니다. 북아메리카 사람들이라면 다른 수식 없이 ‘목련’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백목련’을 그냥 ‘목련’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탐스러운 꽃송이도 좋지만 전체적인 생김새 자체가 장대하여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조경수로 곳곳에서 많이 심어 키우는 나무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20년대에 처음 들어온 것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단지 추측할 뿐입니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나무여서, 주로 남부지방에서 조경수로 심어 키워왔습니다.

순백으로 하얗게 피어나는 태산목의 꽃 한 송이는 지름이 삼십 센티미터 정도 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여름 꽃만의 특징인 크고 화려한 생김새를 갖춘 겁니다. 삼십 센티미터 정도 되는 꽃송이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겁니다. 생김새만 화려한 게 아닙니다. 그에게서 뿜어나오는 강한 향기 또한 더 없이 강렬합니다. 태산목의 원산지인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원주민들은 달콤한 이 향기를 불길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생경할 정도로 강한 향기가 두려웠던 건가봐요. 그래서 태산목에 꽃이 필 때면 그 그늘에서 낮잠에 들어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향기가 사람의 혼을 빼앗아갈 정도로 강력하다고 생각했던 거라고 합니다.

지금 천리포 숲에서 활짝 피어난 태산목은 엄밀하게 말하면 태산목 원종이 아니라, 그로부터 선발해낸 품종입니다. 우리 눈으로는 원종 태산목과 별다른 차이를 찾기 쉽지 않습니다만, 이 나무의 학명은 Magnolia grandiflora ‘Variegata’입니다. ‘Variegata’라는 품종명이 붙은 새 품종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이 품종의 태산목은 원종의 태산목에 비해 조금 먼저 꽃을 피우고, 비교적 더 늦게까지 꽃을 매달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마도 태산목의 화려한 꽃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어한 분들의 요구에 맞춤하여 원예용 혹은 조경용으로 선발된 품종이지 싶습니다.

원종 태산목의 꽃은 빨리 피어도 7월 되어야 피어납니다. 기후 변화가 심해서 개화 시기에 예측하기 어려운 큰 변화가 있긴 하지만, 올해도 7월 되어야 피어나지 싶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8월이면 이미 모든 개화를 마치고 꽃은 시들어 떨어질 겁니다. 꽃을 보여주는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운 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조금이라도 더 오래 꽃을 볼 수 있는 품종을 선발한 거죠. 심지어 이런 종류의 품종 가운데에는 7월에 피어서 11월까지 잇달아 꽃을 피우는 품종도 있습니다. 이 놀라운 품종의 목련은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는데요. 나중에 기회 만들어 전해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봄을 일러주는 백목련 꽃에 익숙한 분들에게 태산목 종류도 그만큼 정겨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잎 한 장 돋지 않은 황량한 이른 봄에 한꺼번에 화려한 꽃을 피우는 백목련의 ‘처절한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여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백목련과 달리 태산목은 초록 잎이 무성한 사이에 한 두 송이씩 다문다문 꽃을 피우니까요. 물론 꽃 한 송이만으로는 백목련에 비해 더 우아하다고 말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익숙하지 않아서, 낯설어서 더 아름다운 꽃이 태산목 꽃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지난 봄에 한창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던 백목련 꽃의 기억이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이 한여름에 피어난 목련 꽃이라는 낯섦은 태산목을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게 할 겁니다.

오늘의 《나무편지》를 마무리하며 한 말씀 덧붙입니다. 오늘은 20세기 최고의 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토크의 탄생일입니다. ‘유전자 자리바꿈’ 현상의 발견이라는 현대 유전학계 최고의 업적을 이루고, 81세의 늙마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유전학자입니다. 유전학 이론은 젖혀놓더라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생명에 다가서야 한다는 그 분의 말씀은 언제라도 잊지 못할 큰 가르침입니다. 다음 달이면 나오게 될 저의 새 책에서 이 분의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 썼습니다만, 여기에서 제 책에 소개한 부분을 간단히 덧붙이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매클린토크에게 ‘생명체(organism)’는 단순하게 식물이나 동물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음의 총칭이며 그게 곧 ‘나’일 수 있는 모든 대상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생명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다시 그 자체로 소중한 생명인 것이다. 전혀 과장이 아니었고, 정말로 절실한 음성으로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풀밭을 밟고 지나갈 때면 나는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해요. 사실은 내 발 밑에서 풀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치거든요.”] - 새 책 《고규홍의 나무》(발간 예정)에서
고맙습니다.
6월 16일 아침에 1,292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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