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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왕의 대당 외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13. 13:18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2200㎞ 장강 거슬러… 피란 간 당 황제에게 사신 보내 감동시켜

신라 경덕왕의 대당 외교

입력 2025.02.13. 00:50
 
지난 7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아부성 발언’으로 환심을 얻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트럼프에 대해 ‘진지하다’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라며 치켜세웠다는 것이죠. 상대국 대통령이 막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해 위세를 떨치려는 상황에서, 최대한 그를 배려하고 기분을 맞춰주려 함으로써 나라의 실익을 챙기려 하는 외교 기법으로 볼 수 있죠.
'안사의 난'으로 수도 장안을 떠나 쓰촨성으로 피신하는 당나라 6대 황제 현종 일행을 그린 그림. 8세기쯤 그려진 원본을 보고 15~16세기에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위키피디아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이처럼 ‘상대방을 최대한 배려하고 감동시킨’ 외교 기법이 등장한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서기 8세기, 남북국시대 신라의 경덕왕(재위 742~765) 때였어요.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촉나라 땅으로 달아난 현종 황제

중국 당(唐)나라에서 시성(詩聖)이라 불린 시인이 두보입니다. 그는 시 ‘춘망(春望)’에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이라고 읊었습니다. ‘나라는 부서졌어도 산과 강은 여전하고, 성 안에 봄이 드니 초목이 무성하다’는 뜻이죠. 망할 지경이 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읽힙니다.

                                                              당나라 황제 현종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이 시는 서기 755년 12월에 일어난 ‘안녹산의 난’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나라 현종(재위 712~756) 말기, 정치는 양귀비의 사촌오빠인 양국충과 환관 고역사 등의 손에 넘어갔고 관리들의 부패가 극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에서 큰 세력을 쥐고 있던 절도사 안녹산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죠. 안녹산의 부하 사사명이 일으킨 후속 반란까지 포함해 중국사에선 보통 ‘안사의 난’이라고 합니다.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왼쪽).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사람들의 비난은 황제의 총애를 받던 양귀비에게 몰렸어요. 결국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령하죠. /위키피디아

 

이 반란은 통일 왕조였던 당나라가 쇠퇴기로 접어드는 계기가 됩니다. 수도인 장안(지금의 시안)은 반란군에게 점령됐고, 현종 황제는 머나먼 옛 촉나라 땅(지금의 쓰촨성)으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도중에 호위 군사들의 반발로 인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리는 일도 있었어요. 이렇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현종 앞에 갑자기 누군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는 바로 신라 사신이었습니다.

신라 왕의 결단 “촉나라 땅에 사신을 보내라!”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서기 660년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후 신라는 강대국인 당나라에 머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옛 삼국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의 야욕에 맞서 670년부터 676년까지 6년 동안 치열한 나당전쟁을 펼쳤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신라와 함께 분투했고 멀리 토번(지금의 티베트)이 때마침 당나라의 발목을 잡아 줬습니다. 675년 매소성 전투에 이어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 신라가 대승을 거둬 나당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가 적대국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의례적인 국제 관계인 ‘조공·책봉 제도’는 계속 유지됐습니다. 당시 선진 문명을 지니고 있던 당나라를 신라가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죠. 여기서 신라가 무력으로 당나라에 제압당한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세월이 흘러 서기 756년(경덕왕 15년)이 되자, 신라의 경덕왕은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당나라 황제가 촉나라 땅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안녹산의 난’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죠. 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 시스템을 개편했던 신라 중대의 개혁 군주였습니다. 김대성에게 불국사를 짓게 한 임금이기도 하죠.

중국에서 큰 변란이 일어나면 인근 국가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워낙 인구가 많아 반란군 규모 또한 어마어마했고 그들이 주변국을 침략하기도 했거든요. 14세기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 일부가 고려를 침략해 공민왕이 한때 지금의 경북 안동까지 피란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신라 북쪽의 발해는 756년 세 번째 수도인 상경으로 천도(수도를 옮김)했습니다. 안녹산 세력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경덕왕은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라!” 바야흐로 ‘천하대란’의 시기, 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가는 사신이 아니었습니다. 멀리 달아난 현종 황제를 찾아가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중국 땅 깊숙한 곳에 있는 촉나라 땅은 신라 사신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픽=이진영

 

“성실하고 어질구나” 당 현종의 감동

아쉽게도 역사책에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신라 사신은 배를 타고 장강(양쯔강) 하구에서부터 성도(청두)까지만 해도 2200㎞가 넘는 긴 사행길을 떠났습니다. 장강을 역류해야 할 뿐 아니라 변란 때문에 언제 어디서 이들을 노린 군사적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숨을 건 사행길’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습니다.

평상시와 같은 안정된 때라면 외교 상대국에 사절을 보내는 일이 그다지 특이한 일로 여겨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가 무척 힘들고 외로운 처지에 있을 때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곤궁한 자신을 찾아온 신라 사신에게 감동한 현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상하게도 신라 왕은 해마다 대의명분을 잘 실천하므로 시 한 편을 지어주노라!”

모두 한자 100글자로 이뤄진 이 한시에서 현종은 ‘성실하도다! 하늘이 굽어볼 것이다/ 어질기도 해라, 덕(德)은 외롭지 않은 것이니’ ‘푸르고 푸른 뜻 더욱 소중히 해/ 바람 서리 맞아도 늘 변하지 말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글자 한 자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습니다.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계속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신라의 많은 인재들은 당나라 유학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경덕왕은 사신 파견 다음 해인 757년 전국의 지명을 한자로 바꾸는 등 적극적인 한화(漢化) 정책에 나섰습니다. 중국의 힘이 강해서 인근 국가들에 압력을 넣을 수 있었던 때가 아니라, 반대로 중국이 반쪽으로 갈라진 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종의 선진화 정책으로 볼 수 있는 경덕왕의 한화 정책은 신라가 주도적으로 행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