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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볼음도 나들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13. 11:03


쉴 땐 뭐하지 호모 트레커스
트레커 맞이한 건 무장 군인…‘강화서 1시간’ 보름달섬 걷다
카드 발행 일시2025.02.11
에디터김영주


‘겨울이라도 좋아.’ 겨울에도 걷기 좋은 섬 길을 연재합니다. 배로 1시간 이내에 닿을 수 있는 섬,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 편한 길, 겨울에도 푸른 숲이 있는 곳입니다. 봄을 먼저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글 싣는 순서

① 통영 추도 숲길
② 신안 도초도 팽나무 십리길
③ 강화 볼음도 나들길
④ 통영 연대·만지도 지겟길

인천 강화 섬에서 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볼음도는 ‘섬 길’을 즐겨 찾는 트레커에게도 생소한 섬이다. 북방한계선(NLL)이 시작되는 서해 최북단 섬 중 하나이면서 북녘땅 황해도 연안군과 불과 7㎞ 떨어진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다. 하지만, 연평도·백령도만큼 머나먼 섬은 아니다. 강화 선수항에서 배로 1시간이면 닿는다. 차와 배를 타는 시간을 합해도 서울 도심에서 2~3시간 거리다.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 길 12㎞는 나무 데크 등이 없는 자연의 길로 고요한 숲, 갯벌, 백사장을 따라 걷는다. 외딴 섬이지만 한나절이면 접근할 수 있어 하루 걷기 일정으로 제격이다.

                                     강화 볼음도 나들길 11코스 시작 지점, 볼음도 선착장 . 김영주 기자

볼음도 이름의 내력이 흥미롭다. 조선 후기 이름난 무장 중 한 명인 임경업(1594~1646) 장군이 명나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 섬으로 피신했는데, 그때 섬에서 아름다운 보름달을 봤다고 해서 오랫동안 ‘보름도’로 불렸다 한다. 지금의 볼음도(乶音島)는 ‘보름달 섬’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다. 친명반청을 고수하다 인조(1595~1649년)에게 죽임을 당한 임경업은 그 때문인지 죽어서 신으로 추앙받는다. 경기도와 서해안 지역에서 활동한 만신 중 그를 신으로 섬기는 이들이 많았고, 연평도엔 그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지금도 서해안 지역 풍어제에서 신령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기자가 섬에 들어간 지난달 23일은 ‘섣달 24일’이라 보름달은 없었다.

섬으로 가는 관문, 강화군 선수항에 도착하니 해병대 복장을 한 군인이 눈에 띄었다. 볼음도는 해군과 해병대가 함께 주둔하는 군사 요충지다. 그래선지 배를 타기 전 무장한 군인이 승선하는 이들의 신분증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섬의 주민은 200명 남짓이라 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것 같다.

           볼음도엔 군부대가 있어 섬을 드나드는 승객 중 절반가량은 군인이다. 배에서 보급품을 내리는 해병들. 김영주 기자

볼음도 선착장에도 팔각모와 해군 복장을 한 군인이 서 있었다. 배에 실려온 보급품을 가지러 온 듯했다. 물건을 실은 군용 트럭이 떠나고 배에서 내린 사람 중 민간인은 두세 명. 그중 차 없이 걸어 나온 이는 기자뿐이었다. 이 섬에 대중교통은 없다. 트레커는 오직 제 발로 걸어야 한다. 다행히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지 않았다. 볕도 따사로워 걷기 좋은 날이었다. 낮 기온이 5~6도였다.

볼음도 둘레길은 강화나들길 11코스에 해당한다. 갈림길마다 ‘나들길’ 이정표와 리본이 있어 길을 잃을 위험은 거의 없다. 선착장에서 200~300m 지나니 첫 번째 트레일(trail, 포장하지 않은 숲길이나 오솔길)이 나타났다. 왼편으로 들어서면 조개골해수욕장, 오른쪽은 포장된 길이다. 길은 시계 방향으로 나 있다.

백사장이 약 1㎞ 남짓 되는 조개골은 섬에서 두 번째로 큰 해변이다. 한때 일 년 내내 조개 잡는 아낙들로 붐볐다고 하는데, 최근엔 조업에 나서는 이가 많지 않다고 한다. 볼음도는 서해안 북쪽에서 이름난 백합(생합, 상합) 생산지였지만, 어장 환경이 바뀌면서 귀한 산물이 됐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한 노인은 “전엔 매일 반찬으로 할 만큼 백합이 많이 났는데, 지금은 보기가 힘들다. 갯벌이 바다로 쓸려 나가면서 백합도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백합은 모래와 갯벌이 적절히 섞인 곳에서 잘 자라는데, 섬의 갯벌이 줄어들면서 백합의 생장 환경도 나빠졌다는 말이다. 그래도 해안가엔 “마을에서 관리하는 어장으로 외지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있다.

조개골에서 영뜰 해변으로 가는 길은 작은 숲을 지난다. 박새·직박구리 등 텃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소담한 숲길이다. 솔잎에 이는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말곤 다른 잡음이 섞이지 않는 고요한 숲이라 새들의 노랫소리 또한 선명하다.

                                       볼음도 영뜰 갯벌. 사리 때면 십 리 이상 갯벌이 드러난다. 김영주 기자

영뜰해변은 조개 잡는 갯벌로 유명했고, 지금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조개잡이 체험이 열린다. 사리 때 썰물이 지면 약 6㎞에 달하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지는데, 백합 나는 곳까지 가려면 너무 멀어 마을에서 운영하는 트랙터를 타고 간다. 겨울엔 운영하지 않아 트랙터 트레일러는 마을회관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치 모양의 포장이 쳐져 트레일러는 마치 서부극 영화에 나오는 마차 같다.

해안 백사장은 1.5㎞ 남짓이다. 길은 백사장 위쪽 소나무 숲으로 나 있지만, 숲에서 나와 모래밭을 걸어도 좋다. 발을 디딜 때마다 등산화가 사뿐하게 빠지는 포근포근한 백사장이다. 아스팔트처럼 딱딱한 백사장도 좋지만 이렇게 적당히 발이 빠지는 모래밭도 좋다. 이런 길에선 어쩔 수 없이 뒤뚱거리면서 걷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몸의 균형을 생각하게 한다. 발이 폭폭 빠지고 몸이 흔들리면서 눈앞의 시선도 흔들리지만, 그럴수록 장딴지와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균형을 잡고 가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다. 모래밭을 걸을 때도, 밥벌이에 임할 때도, 인생도 그럴 것이다.

                                     볼음도 소나무 숲길. 인공적인 요소를 최소화해 길을 만들었다. 김영주 기자

기분 좋은 백사장을 꾹꾹 눌러 걷고 나니 섬의 북서쪽에 다다랐다. 여기서 길은 동쪽으로 꺾어진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직진하면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요옥산(103m)에 닿지만, 길은 이어져 있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서 보니 요옥산 정상과 그 일대는 군부대로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었다.

영뜰에서 군부대가 있는 볼음2리로 넘어가는 고개도 숲이 우거졌다. 숲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걷는 동안 알록달록한 장끼와 새끼 고라니가 번갈아 나타났다. 사람을 만나도 날지 않고 뒤뚱뒤뚱 도망가는 장끼의 뒤태가 우습다. 또 이 길은 야트막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됐는데, 계단이나 나무 데크를 전혀 설치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자연 상태의 흙길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수풀이 무성한, 방치된 길도 아니다. 소나무와 참나무, 칡넝쿨과 수풀 등이 한데 어울려 아늑한 느낌을 주는 길이었다.

                                         볼음도 북쪽 해안에 있는 800년 수령의 은행나무. 김영주 기자

섬 북쪽에 있어 ‘내촌’으로 불리는 볼음2리 해안엔 8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 25m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봄·여름 잎이 성할 땐 허공에 뜬 풍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천연기념물 304호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애틋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나무는 본래 북녘땅, 황해도 연안군 호남리에 있었다고 한다. 암수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여름에 큰물이 지면서 수나무가 뿌리째 뽑혀 남쪽 바다로 떠내려왔다. 볼음도 사람들이 나무를 건져 해안가에 심은 게 지금의 800년 된 은행나무가 됐다. 볼음도에서 연안까지는 불과 이십 리. 바다 건너가 수소문하니 호남리에서 떠내려온 나무가 맞다고 했다. 그 후 호남리와 볼음도 사람들은 암수 은행나무 앞에서 풍어제를 지냈는데, 날짜를 맞춰 한날에 했다. 그러나 수백 년 이어온 은행나무 풍어제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갈라서면서 중단됐고, 그 후 볼음도의 수나무는 말라가기 시작했다. 섬사람들은 황해도 암나무의 안부를 알 길이 없어 죽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은행나무 근처에 저수지가 생기자 다시 살아났다고 전해진다.

은행나무 위에 전망대가 있는데, 맑은 날엔 북녘땅이 아스라히 보인다. 멀리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해안선 어딘가에 암나무가 외로이 서 있을 듯싶다. 호남리 은행나무도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와 볼음저수지 일대는 노랑부리저어새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겨울 철새가 보금자리로 삼는 곳이다. 북쪽을 바라보고 있어 출입이 통제된 갯벌과 여름이면 연꽃이 가득한 저수지, 또 저수지 주변 논이 떨어진 낱알이 많아 철새가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 덕분이다.

                                                      볼음도 저수지 근방에서 겨울을 나는 큰기러기. 김영주 기자

길은 은행나무 앞에서 갯벌과 저수지를 가르는 제방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또 이곳이 볼음도 나들길의 하이라이트다. 아쉽게도 저어새는 볼 수 없었지만, 수백 마리의 큰기러기 무리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사람이 다가가도 좀체 도망가지 않는 큰기러기는 몸집이 아주 컸다. 큰기러기의 몸길이는 70~90㎝. 몸무게는 수컷이 3.2㎏, 암컷이 2.8㎏ 정도라고 한다. 이놈들은 사람을 보고도 냉큼 도망가지 않고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아마도 몸집이 커 선뜻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워서인 듯싶다.

                           강화 볼음도 북쪽 해안 둑길. 둑을 경계로 왼쪽은 갯벌, 오른쪽은 저수지다. 김영주 기자

약 1㎞ 정도 이어지는 둑길 왼쪽은 갯벌, 오른쪽은 꽁꽁 언 연꽃 방죽이다. 왼쪽은 갯벌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북녘땅, 오른쪽은 추수를 마친 논밭. 비슷한 듯 보이지만 대비되는 두 개의 이미지가 제방을 경계로 확연이 나눠졌다. 그런 가운데 시시때때로 논에서 날아오르는 큰기러기 떼가 ‘꿀럭꿀럭’ 소리를 내며 군무를 펼쳤다. 둑길 바닥 풀숲엔 바스러지지 않은 짐승의 배설물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인적 드문 길이다.

저수지 끝에서 민가를 지나면 길은 봉화산(82m)으로 이어진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으로 잡목과 수풀이 우거졌다. 정상에 올라도 마찬가지다. 잡목 때문에 사방 전망이 모두 막혀 있다. 굳이 오르지 않아도 될 만한 산이다. 봉화산을 오르지 않으면 길은 아스팔트를 통해 볼음1리로 이어진다. 마을에서 선착장까지 약 2㎞. 20~30분 거리다.

볼음도 가는 길

볼음도 가는 여객터미널은 강화도 서쪽 선수항에 있다. 겨울(2월 28일까지)엔 오전 9시20분, 10시30분, 오후 3시10분에 출발한다. 볼음도까지 약 1시간 걸린다. 섬에서 나오는 배편도 하루 3편이다. 오전 7시50분, 낮 12시30분, 오후 1시30분에 있다. 당일 여행으로 가려면 선수항에서 오전 9시20분 배를 타고 가서 오후 1시30분 배를 타야 한다. 섬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3시간 남짓으로 한 시간에 4㎞/h 속도로 걸어야 한다. 섬 안에 대중교통은 없지만, 민박은 많다. 볼음1리와 마트와 카페, 민박·펜션 등이 있다.


박경민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2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