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년 식민통치 상흔속에서도…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의 도시’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문화일보
- 입력 2025-01-03 09:07
로마의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 황제가 군사 식민지로 건설한 도시인 알제리의 팀가드 유적. 198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게티이미지뱅크
■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41) 알제리의 수도 ‘알제’
카뮈 ‘이방인’의 배경이 된곳
엄마 죽음에 충격받은 주인공
햇빛 탓에 아랍인 총으로 살해
유럽-아프리카 잇는 천혜 위치
번영 대가로 숱한침략 시달려
오랜 식민통치후 정체성 혼란
‘프랑스어의 실종’에 상세기록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해가 완전히 떠올라 있었다. 바다와 마랭고 사이를 가로막은 언덕들 위로, 하늘에는 불그레한 빛이 가득 퍼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엄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기에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첫머리에 나오는 충격적 장면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주인공 뫼르소가 죽음이란 부조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다가 햇빛 때문이란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아랍인들을 살해하는 기이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슬픔이나 허무 같은 상투적 감정은 죽음을 대하는 성숙한 태도가 아니다. 보라, 어머니의 죽음에도 알제 앞바다는 찬란한 햇빛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가식을 버리고 거짓을 무찌르면, 슬픔에 젖어서 삶을 뿌리치고 허무에 쫓겨 상실감에 절망하는 대신, 세계의 여전한 건강성 속에서 헤엄칠 수 있다.
사형을 앞두고 뫼르소는 외친다. “보기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죽음에 굴복해 삶을 통째로 내주는 대신 굳센 마음으로 순간순간 기쁨의 축제에 몸을 던지는 것이 좋은 삶의 비결이다. 꽃들이 질 때를 염려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뽐내듯, 삶을 번창시키려면 저 태양이 나날이 어두운 바다 위로 떠오르듯 그날그날을 충만히 살아야 한다.
카뮈에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이 아름다운 바다는 알제 앞에 드넓게 펼쳐져 있다. 알제리의 수도 알제는 인구 약 450만 명의 대도시로, 아프리카 북서부 마그레브 지역의 중심에 놓여 있다.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이 도시의 첫인상은 석회를 발라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건물들이다. 카뮈는 언덕 위에 층층이 쌓인 이 건물들을 “아랍 도시의 저 야생적인 백색”이라고 불렀다.
알제란 이름은 아랍어 알자자이르(al-Jazair·섬)에서 왔다. 북아프리카 원주민인 아마지그가 이 땅에 처음 마을을 세웠을 때, 앞바다에 섬들이 있던 것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천혜의 위치 덕분에 알제는 빠르게 발전했다. 사하라사막을 건너온 상인들은 이곳에서 지중해 곳곳의 상인들과 만나 교류했다. 그러나 번영의 대가로 숱한 침략과 파괴를 견뎌야 했다. 기원전 9세기엔 카르타고가, 기원전 2세기엔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제국이 점령했고, 5세기엔 게르만 반달족의 침략을 받아서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알제리 남부에 위치한 수도 알제는 알제리 최대도시이자 항구도시로 발전을 이뤘으며 현재까지도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축물을 유지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10세기 중반, 알제는 옛 폐허를 딛고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부활했다. 7세기 말부터 아마지그인은 이 땅을 정복한 아랍인에 맞서 치열한 투쟁에 돌입한 끝에 8세기 중엽에 독립 왕국을 이룩했다. 이후 아마지그 왕조는 몇 차례 교체되며 700년간 이어갔다. 그러나 아랍의 정복은 이 땅에 이슬람이란 영구적 흔적을 남겼다. 1097년 지어진 알제의 이슬람 대사원 자마 엘 케비르는 그 시대의 유산이다.
중세 때 알제는 무역선을 약탈해 노예를 잡아들이는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로 이름을 날렸다. 16세기 초 스페인 제국의 무역 활동이 활발해지자, 세력 다툼에서 밀린 알제는 오스만제국의 도움을 청했다. 1529년 오스만제국이 들어와 스페인을 격퇴한 후, 항구를 건설하는 등 도시 전체를 정비했다. 이후 알제의 해적 경제는 한층 강화됐다. ‘프랑스어의 실종’에서 아시아 제바르는 말했다. “옛 알제, 자지라트 엘 바흐자,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오랫동안 난공불락이었던 솔방울 모양의 도시, 내 전설적인 해적의 도시.” 세르반테스가 이슬람 해적에 사로잡혀 노예로 끌려온 곳도 알제였다.
1830년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을 물리치고, 알제를 점령해 식민지로 삼았다. 132년에 걸친 기나긴 식민 통치의 시작이었다. 이 기간에 성당, 대학 등 프랑스풍 건물이 건설되고, 현대적 항만 시설이 들어서는 등 알제는 프랑스 아프리카 식민지의 중심지에 자리 잡았다. 유럽인들의 이주가 장려되고, 아마지그 사람들의 공공장소 출입이 금지되면서 알제는 빠르게 유럽화되어 갔다. 20세기 초 알제 인구의 약 4분의 3이 유럽 정착민일 정도였다.
번영하는 도시 알제의 경제적 혜택을 아마지그는 전혀 누릴 수 없었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프란츠 파농은 외쳤다. “식민지의 경제구조는 원인이 곧 결과다. 백인이기 때문에 부자이고, 부자이기 때문에 백인이다.” 피식민자들은 슬럼가에서 착취에 고통받고 참혹한 가난을 떠안은 채 이를 갈았다.
1954년 알제리 민중들은 봉기해서 민족해방전선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투쟁에 들어갔다. 파농은 주장했다. “식민지 민중으로선 폭력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기에, 폭력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알제리의 강렬한 저항에 프랑스는 융단 폭격과 무차별 사격으로 응수했다. ‘프랑스식 전쟁술’에서 알렉시 제니는 그 야만성을 환기함으로써 공쿠르상을 받았다. “그들은 집단으로, 이 전쟁에서 비가 내리듯 죽었다.” 8년 동안, 프랑스 군대는 알제 곳곳에서 학살과 체포, 고문과 감금 등을 서슴지 않았다. 알제리인 수십만 명이 그 와중에 사망했다.
1962년 독립과 함께 알제는 알제리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오랜 식민 통치는 알제에 어두운 흔적을 남겼다. 이슬람과 기독교, 프랑스어와 아랍어 등이 뒤섞인 풍경은 알제리인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선연히 드러냈다. ‘프랑스어의 실종’에서 제바르는 말한다. “내 조국은 어디야? 내 땅은 어디에 있어? 내가 잠잘 수 있는 땅은 어디에 있지? 나는 알제리에서 이방인이고 프랑스를 꿈꿔. 프랑스에서는 더욱더 이방인이고 알제리를 꿈꾸지, 조국이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인가?”
작품의 주인공은 베르칸. 10대 후반 어린 나이로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감옥에 갇혀 고문당했던 투사다. 그러나 독립 이후, 그는 갈등에 빠진다. 작가는 아랍어와 프랑스어의 이중 언어 상황을 통해 그의 번민을 드러낸다. 아랍어는 그에게 정체성을 환기하나, 프랑스어는 “세상의 다채로운 광경을 보는 틈새”, 세계 시민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식민 유산은 청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피어난 가능성의 꽃을 억누르고 싶지 않다. 베르칸은 아랍화 정책에 적극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신자로 불리다가 끝내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러나 프랑스 생활도 그에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하다. 프랑스인 연인 마리즈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결코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절정의 순간에 ‘야 하비비(Ya habibi·아아, 내 사랑)’란 아랍어 느낌을 전할 수 없는 까닭이다. 공허를 이기지 못한 그는 1991년 가을 스무 해 만에 귀국길에 오른다. 돌아온 베르칸은 아랍어 속에서 “상실된 단어와 부활한 이미지로 이뤄진 언어의 춤”을 돌려받는다.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는 것이다. 이는 아랍인 연인 나지아와 만나서 벌이는 사흘간의 에로티시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알제리도 베르칸의 근원적 결핍을 채워주지 못한다. 귀국 시기도 나빴다. 1980년대 말까지 알제리는 민족해방전선의 일당 지배체제에서 비동맹 노선을 견지했다. 석유 등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을 함께 이룩한 제3세계 모범 국가에 속했다. 1988년 부패 청산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알제의 봄’이었다. 시위 도중 수백 명이 사망한 결과, 일당 체제가 무너졌다.
1991년 이슬람구국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내전이 일어났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지배를 두려워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선거를 무효로 한 것이다. 내전은 10년간 지속됐고, 알제는 암살과 테러가 벌어지는 폭력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단지 프랑스어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융합한 새로운 언어를 추구했던 베르칸도 그 와중에 실종되고 만다.
오늘날 알제는 마그레브 지역의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극심한 빈부 격차, 개인 자유에 대한 억압, 이슬람 테러가 거듭되는 등 혼란이 반복되고 있다. 과연 알제는 아랍과 프랑스, 이슬람과 기독교, 전통과 현대를 초월하는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 지중해는 여전히 그 푸른빛으로 희망을 전한다. ‘지중해의 영감’에서 장 그르니에는 말한다. “바다와 사랑은 변함없는 그들의 영원한 재화다. 내일, 어쩌면 내일, 적대적인 그 모든 것이 그들에게 미소를 던지리라.”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아마지그(Amazigh)
아마지그는 ‘자유로운 사람’을 뜻하는 말로,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에서 선사시대 이래 계속해서 살아온 아프리카 토착민을 가리킨다. 유럽인은 이들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야만인이란 의미의 ‘베르베르인’이라고 낮추어 불러왔다. 인구가 약 3600만 명에 이르는 이들은 7세기 아랍 정복 이후 대부분 이슬람화되었으나, 일부는 산악과 사막 지대에 흩어져 전통적 생활 방식을 지켜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