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비 전락 아내 묘역에 엄동설한 송백의 기상이
중앙일보
입력 2024.12.13 00:36
업데이트 2024.12.13 09:35
국가폭력에 희생된 황사영의 가족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아, 황사영(黃嗣永)은 어떤 사나운 기운에서 나온 종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악한 무리에 빠져 강상 윤리를 끊어버렸습니다. 1장의 백서(帛書)에 흉악한 역심(逆心)을 써 댄 것은 실로 고금에 없던 변고입니다.” (『일성록』 순조 1년 10월 13일)
눈먼 권력 수천 명 박해
천주교도 황사영은 ‘신유박해(辛酉迫害)’(1801)의 실상을 국외에 알리어 교황과 중국 황제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밀서가 문제가 되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를 당한 인물이다.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에 붓글씨로 깨알같이 쓴 1만3311자의 편지는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것인데, 발각되고 만 것이다. 외세를 통해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는 점에서 대역죄인으로 각인되어 왔지만, 무자비한 국가 폭력이 자행되던 극한의 상황에서 보편적 권위에 호소하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황사영이 백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은 정약용의 글에서도 짐작된다. “황사영의 도망 사건과 관련되어 잡혀 온 자가 줄을 이었는데, 서로 고발하여 끌어들이니 체포된 자만도 수천 명이나 되었다. 몽둥이로 맞고 죽어 버려진 자가 서로 베고 누워 길을 메웠다.” (『다산시문집』 17)
“생각 조금 달라도 큰 변괴로 여겨”
극한 정쟁, 천주교 신유박해 본질
도움 요청 백서 황사영 능지처사
모친·아내·아들 노비 전락 흩어져
사망 위장해 아들 살린 아내 정씨
순교자 묘역에 안치 성지로 조성
한국 천주교 초창기 신앙 공동체였던 한양의 명례방 집회에서 정약종·황사영 등이 교리 토론을 벌이던 모습. 명례방은 지금의 명동·충무로 일대를 아우르는 행정구역이었다. [사진 이숙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처럼 황사영이 목도한 국가 권력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나라는 당파 간 갈등이 몹시 심해 이(천주교)를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할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또 보고 듣고 따르는 것이 고루하여 안다는 것은 오직 주자학이므로 조금만 자기와 달라도 천지간의 큰 변괴로 여깁니다.” (‘황사영백서’) 그에 의하면 신유년의 박해는 노론 벽파와 남인 시파의 당쟁이 주요 원인이었다.
체포된 황사영을 두고 ‘사나운 종자’라고 한 것은 그의 가족 관계에 주목한 발언이다. 즉 황사영의 처숙(妻叔)인 정약용 형제를 재소환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를 천주교로 이끈 정약종은 ‘사학(邪學)의 괴수’로 이미 처형되었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신지도와 장기(長鬐)에 유배 중이었다. 살아있는 처숙들은 황사영의 체포로 서울로 다시 압송되는데, 별 혐의를 찾지 못하자 새로운 배소 흑산도와 강진현으로 이송되었다. 남인(南人) 집안으로 장가든 17세 이후의 황사영은 아내 정명련(丁命連)의 혈족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 서학에 입문하면서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측근이 되는 등 천주교의 핵심 인재로 부상한다. 그러면 혼인 이전의 황사영, 그 가족 환경은 어떠했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성지 안에 조성된 정난주 마리아 묘역. 황사영의 아내이자 가톨릭 순교자인 정명련의 묘가 안치돼 있다. [사진 이숙인, 한국학중앙연구원]
1790년, 16세에 진사에 합격한 천재 소년 황사영은 정조 임금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다. 임금은 20세 이하의 진사 합격자 5명을 소견하는 자리에서 ‘소년행(少年行)’을 시제(詩題)로 던져 주었다. 황사영의 시를 받아든 왕은 “문필이 가상하고 행동거지도 상당히 분명하여 머잖아 대과에 입격할 것이다”라고 한다. 곁에 있던 좌의정 채제공은 “그 아비 황석범이 글재주가 가상하였는데 급제하고 나서 바로 죽었습니다. 지금 황사영은 기동(奇童)이라 할 만하고 제대로 가풍(家風)을 계승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일성록』 정조 14년 9월 12일)
황사영은 서울 아현에서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나 증조부 황준(1693~?)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조부 황재정은 일찍 죽었는지 존재감이 없고, 아버지 황석범은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수재로 알려졌다. 승정원 주서(注書)로 있던 중 29세의 나이로 요절하는데, 황석범의 죽음에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눈썹이 강산(江山)을 보는 듯 시원했고 심사와 덕성 또한 믿음직스럽고 진실하였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까지 하니 조물주가 시기한 것인가.” (‘황주서를 위한 만사’) 한편 증조부 황준은 과거 급제자이자 공조판서를 지낸 인물로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황준이 80을 바라보면서까지 과거 도전을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78세에 드디어 급제하게 되는데, 영조가 계속 도전하는 노인들을 불쌍히 여겨 기로과(耆老科)를 설행하여 그냥 뽑아 준 것이다. ‘문과방목’ 황준 조의 기타 항목에는 그의 손자 황석범이 동년(同年) 정시(庭試) 합격자로 기록되어 있다. 정조 6년(1782)에는 급제는 했지만 직책이 주어지지 않은 89세의 황준에게 나이 많은 분을 존중하는 의리로 공조 판서를 제수한다. 근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한가한 자리라는 것을 덧붙였다.
소년 급제 황사영 혼인 후 천주교 눈떠
제주시에 속한 추자도 해안가에 세워진 눈물의 십자가. 황사영의 아내 정명련이 제주로 유배 가던 중 두 살 난 아들 황경한을 내려놓고 떠난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사진 이숙인, 한국학중앙연구원]
황사영은 혼인으로 맺은 가족들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폭풍 흡입하면서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신유박해가 시작되어 체포령이 내려오자 충북 제천의 산속으로 몸을 숨긴 황사영, 서울 아현에 살던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주문모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은 2살 난 아들은 서부 감옥에 갇힌다. 결국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에 걸려 27세의 나이로 가장 처참한 형태의 사형에 처해지는 황사영, 남은 가족 세 사람은 남쪽 바다 유배길에 오른다. “죄인 황사영의 어미 이윤혜는 거제부의 관비로 삼고, 아내 정명련은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삼는다. 아들 경한은 나이가 차지 않은 까닭에 법에 따라 교형을 면제하고 추자도로 보내어 관노로 삼는다.” (『일성록』 순조 1년 11월 7일) 박해를 주도한 권력자들에 의해 “사나운 이리의 심장과 사람을 홀리는 여우의 낯짝”으로 묘사된 황사영의 삶은 이로써 끝이 났다.
황사영 초상.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는 백서를 썼다가 발각돼 능지처사됐다. [사진 이숙인,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데 ‘대역죄인 황사영’ 가족의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로 다시 시작된다. 기록과 기억 또는 구전의 형태로. 9개월의 옥살이 끝에 며느리와 손자와 함께 유배길에 오른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서 1815년 2월 7일에 사망하는데, 유배지에서 14년을 살아낸 것이다. 관아의 여종으로 새 삶을 시작한 사족 여성 이윤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정보는 아직은 없다. 반면에 황사영의 아내 정명련에 대한 기록과 설화는 여러 군데서 전해온다. 그녀는 1838년 2월 3일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데, 29살에 대정읍 관비(官婢)에 부쳐져 37년을 산 것이다. 천수를 다한 삶이었다. 정명련(1773~1838)이 사망하자 대정현에 살던 김상집이라는 사람은 추자도의 황경한에게 부고를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사망 일시와 무덤 위치를 적은 것이었다. 이러한 문서는 2살 난 황경한이 성인으로 성장했고, 그 어머니 생전에 서로의 소식을 나누었음을 말해준다. 손자까지 둔 황경한은 1859년 6월 30일에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두 살난 황경한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 교구 고 김병준 신부는 정명련에 대한 구전을 조사하여 정리한 결과물을 1977년에 세상에 내놓았다. 이에 의하면 유배죄인을 실은 배가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정명련은 사공에게 패물을 주며 아이가 죽어 수장한 것으로 처리해 달라고 하고 아이를 추자도 남단 언덕배기에 내려두게 했다. 아이의 옷섶에는 부모의 이름과 황경한의 이름을 써 놓았다. 아기의 울음을 듣고 달려간 오씨 부부가 데려다 기른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추자도 내에서 오씨와 황씨는 서로를 가족으로 여겨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국가 기록물 『연좌안(連坐案)』에는 황경한의 사망일이 명시되어 있는데, 국가가 관리하는 죄인의 신분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구전 설화는 두 살배기 아들을 품에서 떼어 놓아야 하는 어머니의 슬픔을 위로하고 황경한의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취지가 아닐까.
정난주 마리아 묘역 대정성지
제주도 남단 모슬포 뒷산에 잠든 ‘한양 할망’ 정씨 부인은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여성들의 역경과 극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주가 맞이한 첫 신앙인으로 기록된 그녀는 본명 정명련(丁命連) 대신에 정난주 마리아로 불리고 있다. 평범한 한 사람의 무덤에 불과했던 것이 140년이 지난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 다시 1994년에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역 ‘대정성지’로 조성되었다. 배교의 대가로 얻은 이른바 종년의 신분, 갖은 천대와 멸시에 노출된 삶이지만 병들고 헐벗은 자들을 돌보며 살아낸 37년의 세월 그 자체가 순교였다고 한다.
정난주 마리아의 묘역 가까이에 추사 기념관이 있어 세한도(歲寒圖)의 메시지가 바람을 타고 오는 듯하다. 엄동설한에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松柏)의 기상처럼.
이숙인 동양철학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9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