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카테고리 없음

‘아내 패고 버린 우산 아깝다’ 시인 스스로 고백한 죄와 벌 [백년의 사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19. 15:06

‘아내 패고 버린 우산 아깝다’ 시인 스스로 고백한 죄와 벌 [백년의 사랑]

카드 발행 일시2024.06.28
에디터
이경희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들려주는 ‘백년의 사랑’(4)

지난 이야기

김수영(1921~68)이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방황하던 1942년 일본 유학 시절, 김수영과 동숙하던 이종구가 ‘사랑하는 조카딸’이라며 예뻐하던 여섯 살 아래 김현경을 소개한다. 김현경은 이종구와 김수영을 모두 ‘아저씨’라 부르며 문학을 논한다.

김현경은 첫사랑 배인철 시인을 총격으로 잃고 신문에 실리며 구설에 오른다. 김수영 시인은 고립된 김현경을 가장 먼저 찾아와 “문학 하자”고 말한다. 문학이 사랑이자 구원이었던 둘은 관습을 뛰어넘어 동거하고, 결혼한다. 임신한 김현경을 두고 의용군으로 끌려간 김수영은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포로로 붙잡혀 2년3개월간 구금된다.

김수영은 일자리를 찾아 피란 수도 부산에 내려가고, 뒤따라간 김현경 역시 일자리를 청탁하러 이종구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머물며 살림을 도맡게 된다. 내심 김현경을 짝사랑했던 이종구는 김현경이 아들을 맡겨둔 친정집에 매달 월급의 절반을 떼어 생활비로 부쳐준다. 김수영 시인이 6개월 뒤에야 찾아오지만, 김현경은 “먼저 가세요”라며 돌려보낸다.

서울로 환도한 뒤에도 한동안 이종구와 살던 김현경은 어느 날 몰래 집을 나와 방을 얻는다. 신춘문예 준비에 매진하던 김현경은 1955년 봄, 김수영에게 만나자는 엽서를 쓴다. 말끔한 차림으로 약속장소에 나온 김수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날부로 김현경과 부부의 연을 다시 이어간다.

더, 스토리 - 백년의 사랑

1편: “탕탕탕!” 첫사랑은 즉사했다…98세 김수영 아내의 회고

2편: 임신한 아내 두고 의용군으로 끌려가 지옥을 보다

3편: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절친과 동거한 아내에 쓴 시

 

다시 합친 김현경과 김수영은 비로소 가정다운 가정을 꾸리게 됐다. 친정에 맡겨뒀던 아들 준도 데려왔다. 김수영 시인은 소리에 민감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성북동 백낙승(백남준의 아버지)의 별장으로 이사했다. 울창한 정원과 바위, 폭포가 있는 멋진 집이었다. 그런데 귀가 어두운 별장지기가 종일 라디오를 큰 소리로 켜두는 게 문제였다. 결국 소음이 없는 독채를 찾아 마포 서강으로 이사했다. 한 1000평 되는 땅에 낡은 농가가 한 채 덜렁 있는 집이어서 김수영이 시를 쓰기엔 완벽한 환경이었다.

전쟁과 폭력의 끔찍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김수영을 괴롭혔다. 김현경과 합치고 나아지긴 했지만 술에 취하면 물건을 집어던지는 버릇은 여전했다.

김현경은 살림살이를 죄다 던져도 괜찮은 것들로 바꿨다. 창호지가 붙어있던 미닫이문엔 합판을 덧대 달고, 사기그릇 대신 깨지지 않는 놋그릇을 썼다. 재떨이도 나무로 된 거로 바꿨다. 안전한 환경으로 바꾼 것 중 제일은 닭을 친 일이었다.

“그 양반이 한 달에 한 편 정도 시를 쓰는데 생활이 안 되니까, 내가 시장에 가서 병아리 10마리를 산 거예요. 10마리를 사니 한 마리를 더 얹어줬어요. 11마리로 양계를 시작한 거죠. 수컷이 두 마리 나머지는 암컷이었는데, 매일 알을 낳기 시작하니까 하루에 8~9알이 나와요. 일주일만 지나도 소쿠리 수북하게 쌓이니까 생활이 되더라고요.”

본격적으로 양계하기로 마음먹고 일본어로 된 책을 사서 읽으며 연구했다. 김현경은 낮엔 닭을 돌보고 밤엔 만들어 팔 옷을 지었다. 김수영은 시 쓰고 번역하고 책을 읽었다.

“사실 그이는 책 읽기 바쁘고 공부하는 게 너무 많았어요. 그래도 마음은 왠지 양계에 있는 거야. 유행병을 막으려고 예방주사를 놓는데, 그건 김 시인이 했어요.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병원에서 근무하며 본 것도 있고, 직업을 가지려면 의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있어서 그랬는지 주사를 잘 놨어요.”

날더러 양계를 한다니 내 솜씨에 무슨 양계를 하겠습니까. 우리 집 여편네가 하는 거지요. 내가 취직도 하지 않고 수입도 비정기적이고 하니 하는 수 없이 여편네가 시작한 거지요. (중략)
그래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게 자라나는 병아리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릅니다. 병아리는 희망입니다. 이 노란 병아리들의 보드라운 털빛이 하얗게 변색을 하는 것은 성장하는 모습입니다. 여편네도 기분이 좋고 나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때의 기분은 백만장자도 부럽지 않습니다.
“인제 석 달만 더 고생합시다. 닭이 알만 낳게 되면 당신도 그 지긋지긋한 원고료 벌이 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돼요.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하는 여편네의 격려 말에 나는 용기백배해서 지지한 원고를 또 씁니다. 

-김수영 산문 ‘양계 변명’(1964.5) 부분 

양계를 하면서 김수영은 정서적으로 한결 편안해졌다. 1958년 둘째 우가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나 꼬물꼬물 자라나는 모습을 아버지로서 지켜본 건 둘째가 처음이라서였을까. 김수영은 우를 귀애했다.

아가야 아가야
열 발구락이 다 나와있네
엄마가
만들어준 빨간 양말에서

아가야 아가야
기저귀 위에는 나이롱종이까지 감겨져있네
엄마는
바지가 젖는 것이 무서웁단다

아가야 아가야
돌도 아니된 너는 머리도 한번 깎지를 않고
엄마는
너를 보고 되놈이라고 부르지

아가야 아가야
네 모양이 우스워서 노래를 부르자니
엄마는
하필 국민학교놈의 국어공책을 집어주지

-김수영 시 ‘자장가’ 전문 

                                                  김수영 시 '자장가'를 정서한 김현경의 손글씨 원고.

김현경은 김수영의 시나 수필에서 돈만 밝히는 여편네로 묘사되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김현경이 돈 버는 일은 도맡으며 세대주 역할을 했다.

“그땐 휴지가 귀했어요. 그래서 아침에 외출하실 땐 내가 하얀 손수건 하나, 차비 하나 내드리지. 나는 한 번도 ‘쌀이 떨어졌어요, 돈이 떨어졌어요’라고 한 역사가 없어요. 김 시인도 절대로 한 푼도 속이질 않았어. 아무튼 신발까지 내가 사드렸으니까. 내가 세대주 노릇을 하니까, 나를 고맙게 생각하시더라고.”

정서적·경제적으로 차츰 안정되어 가던 그 무렵은 이들 부부에겐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사건이 벌어졌다.

“그때 조선일보 뒤쪽에 영화관이 있었어. 영화 ‘길(La Strada)’을 봤는데 아주 정말 멋진 명작이야. 그걸 보고 한참 감동이 꽉 차 있는데, 길에서 갑자기 날 때려눕히데. 거기서 쓰러지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웅성웅성 왜 저렇게 두들겨 패나 하고 모여들고…. 다섯 살짜리 아들은 울고, 나도 놀랐지.”

김수영은 감추고 싶을 이 부끄러운 장면을 시로 써서 만천하에 드러냈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 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 시 ‘죄와 벌’(1963년) 전문

“보통은 영화를 보고 감동을 하면 방에 누워서 밤새도록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거든. 그날은 집에 와서 서재로 들어가더라고. 나는 왜 때렸느냐 왜 그랬느냐, 뭐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어. 자기가 나한테 뭐든 순수한 것이 좀 미웠던 모양이지. 그것도 김 시인이니까 할 수 있는 태도야. 술에 취해서 이종구 얘기를 할 법도 한데 나한테 한 번도 그 소리 안 하고 살았으니까, 대단한 사람이야.”

영화 ‘길(La Strada)’


영화 라 스트라다(La Strada)의 한 장면. 젤소미나(왼쪽) 역을 맡은 배우 줄리에타 마지나는 펠리니 감독의 아내이기도 하다. 오른쪽은 잠파노 역의 안소니 퀸.

영화 ‘길(La Strada, 1954)’은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초기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리얼하게 다루면서도 인간의 순수성과 인생의 비극을 담아냈다.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지나)는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안소니 퀸)에게 푼돈에 팔려간다. 앞서 잠파노와 동행했던 언니 로사가 죽어 그 자리를 대신한 거다. 가난한 식구의 입을 덜고, 춤과 노래를 배우리라는 꿈을 안고 잠파노의 오토바이 짐칸에 올라탄다.

잠파노는 가슴에 두른 쇠사슬을 근육의 힘으로만 끊는 묘기를 선보인다. 젤소미나가 맡은 역할은 관객의 흥을 돋우기 위해 북을 치는 것.

잠파노는 짐승 같은 남자다. 젤소미나를 때리며 가르치고, 성욕을 푼다. 그러나 젤소미나가 기댈 사람은 잠파노뿐.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치지만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버려두고 딴 여자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잠자리를 한다. 젤소미나는 참다 못해 달아나지만, 잠파노에게 붙잡혀 매를 맞는다.

그 과정에서 젤소미나는 곡예사 마또를 만난다. 그는 젤소미나에게 나팔 연주를 가르쳐주고, 재능이 있다며 칭찬한다. 잠파노는 감히 손도 못 대게 했던 악기다. 마또는 젤소미나의 영적인 스승이기도 하다. 스스로 쓸모없다고 자책하는 젤소미나에게 길가의 '돌멩이'조차 쓸모가 있다고 가르쳐준다. 또, "잠파노는 개와 같아서, 젤소미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도 개처럼 짖기만 할 뿐"이라며 잠파노에겐 젤소미나가 필요하다고, 불쌍한 잠파노와 함께 있어주라고 조언한다.

마또(왼쪽)는 잠파노의 오랜 친구지만 만나기만 하면 "짐승"이라고 선을 넘는 농담을 하며 놀려댄다. 젤소미나에게 연주를 가르쳐주는 걸 보고 질투에 눈이 먼 잠파노는 칼을 들고 마또를 위협하다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한다.

젤소미나
내가 죽으면 슬퍼할 거예요? 

잠파노
왜? 죽으려고?

젤소미나 
한때는 저 남자와 사느니 죽고 싶다 생각했죠.
그런데 이제 당신과 결혼할 수 있어요.
어차피 우리는 같이 지낼 거니까.
당신에게도 ‘돌멩이’가 필요해요.
이런 것들도 좀 생각해 봐요!
하지만 당신은 결코 생각을 안 하겠죠. 

잠파노
생각할 게 뭐가 있어?
내가 당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런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

젤소미나는 잠파노와의 유랑생활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던 어느날, 공중곡예사 마또는 잠파노가 몇 번 휘두른 주먹에 맞아 어이없게 죽는다. 죽일 의도도 없었는데 살인죄로 감옥에 갈 게 두려웠던 잠파노는 마또의 시체를 버리고 자동차를 굴러 떨어뜨려 사고사인 양 위장한다. 그걸 본 젤소미나는 점점 미쳐 가고, 결국 잠파노에게 짐이 된다. 잠파노는 잠든 그녀에게 돈과 트럼펫을 남겨놓곤 몰래 도망쳐버린다.

세월이 흘러 어느 바닷가 마을에 공연을 하러 온 잠파노는 홀로 산책하다 익숙한 멜로디를 듣는다. 젤소미나가 마또에게서 배워 연주하던 선율이다. 잠파노는 노래를 부르는 아낙에게서 젤소미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날의 공연을 끝내고 술을 진탕 마신 뒤 행패를 부리다 흠씬 두드려 맞고 바닷가로 향한 잠파노. 하늘의 별을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하다가 엎드려 통곡한다. 짐승과 다를 바 없었던 잠파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음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인간다워지는 비극적 장면이다. 영화 라 스트라다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엔딩이다.

김수영은 이 영화를 보고 잠파노와 젤소미나, 혹은 마또 중 어느 쪽에 감정이입을 했을까. 어떤 지점이 그의 감정을 폭발시켰을까.

                             김수영 시인(왼쪽)과 김현경 여사의 사진이 나란히 놓인 서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죄와 벌’ 시 때문에 ‘폭력 남편’이라는 주홍글씨가 박혔지만 실제 김수영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내가 아들과 버스를 타고 외출할 땐 차가 떠날 때까지 서서 지켜봤다. 김현경이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으면 어느덧 찾아와 물에 젖어 무거워진 빨래를 받아 옮겼다. 남자가 그런 일을 하는 걸 부끄럽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시장하고 먼 데서 살았거든요. 그땐 전화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집에 오는 길에 시장에서 요거 좀 사다 주세요, 하면 한 번도 안 잊어버리고 사다 줬어.”

김수영에게 집은 시를 쓰는 신성한 작업실이었다. 술을 즐겼으나 집에서는 절대 마시지 않았다. 고은 시인 등 술 취한 후배 문인들이 술상을 내놓으라며 쳐들어왔다가 김수영에게 꾸중만 들었던 일화도 있다.

김수영은 시를 완성하면 김현경을 불렀다. 그럴 땐 만사를 다 제치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두 벌 정서했다. 밥을 짓다가도, 닭을 치는 중이어도 예외는 없었다. 시를 옮겨 쓰는 게 우선이었다. 원고 한 벌은 청탁을 받은 신문사나 잡지사에 내고, 나머지 한 벌은 보관했다. 그래서 김수영의 전성기 시절 육필원고는 거의 김현경 글씨다.

“그 양반은 책을 놓지 않았던 책벌레예요. 시시한 문학지에 나오는 소설이나 시는 안 읽어요. 어지간한 잡지도 제목 쭉 보고 훑어보면 다 버리시더라고. 내가 주워다 읽고 그랬지. 현대문학이나 일본 문예춘추 같은 걸 보다가 좋은 게 있으면 ‘이거 좀 한번 읽어보실래요?’ 하고 드려도 몇 개 안 봤어. 하이데거를 좋아하셨고. 지금도 수필을 읽어 보면 참 대단해. 박식하기만 한 게 아니라 철학적 깊이까지 있는 그만한 인텔리가 지금 없을 것 같아요.”

김수영은 시를 써도 묵히는 법이 없었다. 여기저기 시를 달라는 곳이 하도 많아서였다. 양계 규모는 750마리까지 늘었다. 김수영의 어머니에게 병아리 1000마리를 사 줄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김수영이 어머니에게 한 거의 최초의 세속적인 효도였다.

“여유가 생길 때마다 나는 이상스럽게 그렇게 건축이 좋더라고요. 매년 집을 고치는 거야. 김 시인이 말하자면 엉터리 양옥이 된 거예요. 그래서 살 만했는데 돌아가신 거지.”

                                                   김수영 시인 사망 기사. 1968년 6월 17일자 중앙일보.

김수영은 1968년, 술을 마시고 집으로 오던 길에 버스에 치인다. 풀은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지만, ‘풀이 눕는다’고 쓴 시인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죽기 20일 전에 마지막으로 쓴 ‘풀’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시 ‘풀’ 전문

                                                                                         김수영 시인.

“그 양반은 철두철미하게 시인이야. 내가 놀란 게, 사람이 정직해도 그렇게 정직할 수가 없어. 돌아가신 다음에 술집에 외상값이 혹시 있으면 어떡할까 싶어서 잘 다니시던 곳에 몇 군데 가봤더니, 없어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깔끔한지. 내가 나이가 먹어갈수록 생각해보면 역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최고거든. 누구는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김 시인은 어디까지나 자유주의자거든요. 늘 사랑이 있고요. 돌아가신 것도 참 허무해. 그런 교통사고에 뺏기다니, 되레 날이 갈수록 참 억울한 생각이 많이 드네요. 그런 시인을 잃은 건 진짜 국가적 손실이에요.”

김수영을 잃은 뒤의 삶

※시인의 아내로 사는 길을 택한 김현경은 김수영이 죽은 뒤에도 그 길을 걸었다. 김현경 여사가 들려준 남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옮긴다.

                                                       자택에서 책을 읽는 김현경 여사.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저는 철저한 사람이에요. 오늘날까정도 늙지 않네, 아직은. 기억력, 내가 지향하는 거.

내가 언제 98세가 됐는지 몰라. 내가 앓기 전에는 주름도 별로 없었어요. 제가 운전을 50년 이상을 했거든요. 이제는 차도 없고 병이 나가지고 거의 1년 반을 외출해본 적이 없어.

내가 이제 죽을 때가 가까워 생각하면 참 돈 많이 벌었네.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내 힘으로 다 마련한 거니까. 시동생이 사업하는 데 돈 모자란다고 하면 융통해주고.

그레이스 양장점을 현대 아파트 11동 상가에다가 했어요. 중년 옷을 주로 했어요. 조금 비싸게 받았지만 돈을 좀 벌었어. 근데 내가 서울 여자 아니야. 함경도나 이런 이북 여자 같으면 크게 벌릴 수도 있는데 서울 여자가 돼서, 가게 하나 가지고 살았다니까. 기성복 회사를 하나 만들어도 될 텐데 그땐 그런 생각조차 없었어.

내가 그림 보는 센스는 있어. 그림을 사면 그게 돈이 됐어요. 그게 날 버티게 해 준 것 같아.

나한테 돈 쓴 거는 별로 없어. 아들 하나가 낭비벽이 심했어요. 그래서 참 많은 걸 없앴어. 아들이 죽은 다음에도 아들한테 받을 돈이 있다고 찾아오면 “얼마예요?” 하고 그냥 무조건 갚아줬으니까. 죽을 날이 가까워지니 이제 마음이 편하네. 누구한테 돈을 안 갚았다든지 그런 거 없고, 누구한테 돈 받을 일도 없고.

요새도 김 시인의 산문집을 읽고 있거든. 김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깊은 사랑을 했어요. 늘 사랑이 있고요. 사람의 인격이라든지 모든 게 사랑을 얼마큼 가지고 있느냐야. 사랑은 받는 게 아니고 주는 거거든. 사랑으로 가득해야 돼. 난 그렇게 생각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면 다 아름답고, 또 세상이 이렇게 좋아지지.

그런데 이 좋은 세상을 못 보고 가셨네. 우리가 꿈꾸던 세상보다 훨씬 좋은 세상이야. 이런 세상이 오리라는 건 꿈도 못 꿨어.

나이도 나이지만, 내가 고민하는 거는 뭘 해야 할 텐데, 그냥 먹고만 산다는 것이 참 뜻이 없고 뭐를 해야 될 텐데. 뭘 할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의지대로 가야 되거든. 그런 것은 좀 슬프지.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얘기를 많이 해서 좀 창피하고 그러네요.

더,스토리 - 더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탕탕탕!” 첫사랑은 즉사했다…98세 김수영 아내의 회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622

속옷 벗고 한강 뛰어든 여대생…알몸으로 뒤따른 그 시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6141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절친과 동거한 아내에 쓴 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754

“여편네와의 밤 황홀이 없다”…남편 시 공개한 전설의 여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1197

※이 글은 김현경 여사의 인터뷰 외에도 『김수영의 연인』(책읽는오두막), 『김수영 전집』(민음사)을 참고해 썼습니다.

※‘백년의 사랑’ 다음 이야기는 7월 5일(금) 발행됩니다. 『시인 김수영과 아방가르드 여인』(어나더북스)의 저자 홍기원 김수영기념사업회 이사장과 함께 문학사에 길이 남을 두 사람의 사랑, 그것이 김수영의 문학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에디터

이경희
관심
중앙일보 P디렉터

dungle@joongang.co.kr
디지털 콘텐트와 서비스를 만들며 숱한 실험과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또 실험하고 실패할 예정입니다.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9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