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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갯벌, 홀린듯 걸었다…동서 가로지른 ‘韓 산티아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12. 14:12


쉴 땐 뭐하지 호모 트레커스

황량한 갯벌, 홀린듯 걸었다…동서 가로지른 ‘韓 산티아고’
카드 발행 일시2024.11.12
에디터
김영주



지난 9월, 산림청은 동서트레일 1~4구간 개통을 알렸다. 동서트레일은 충남 태안 안면도에서 경북 울진 망향정에 이르는 849㎞ 숲길로 1~4구간은 태안 꽃지 해안부터 서산군 팔봉산(364m) 아래까지 53㎞에 이른다. 기존의 걷기 길이 라운드 트렉(round trek)이나 백두대간처럼 종단 길인 데 반해, 동서트레일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트레일이다. 충남 내포숲길이나 경북 죽령 옛길 등 수백 년 역사가 담긴 길과 문화유산을 지난다. 또 곳곳에 야영지를 마련해 백패커(배낭 도보 여행자)를 위한 장거리 트레일로 자리 잡을 예정이다. 산림청이 이 길을 ‘한국의 산티아고’로 소개하는 이유다. 전체 구간은 2년 후 열린다.

꽃지해안공원에서 시작하는 1구간은 바닷길이나 진배 없다. 백사장과 갯벌, 소나무숲이 이어진다. 2구간도 마찬가지다. 백사장항에서 몽산포항까지 해안 산책로는 걷기 좋은 길과 예쁜 카페, 작은 횟집과 분식집 등 멋과 맛이 어우러진다. 특히 해 떨어질 시간이 제격이다. 3구간부턴 갯가를 지나 내륙으로 접어드는데, 대부분 농로와 고샅길을 지난다. 걷기 여행자에겐 조금 아쉬운 구간이다. 4구간은 태안을 지나 서산으로 접어든다. 태안읍 북쪽 백화산(284m)과 오석산(169m), 팔봉산(364m) 등 야트막한 산을 넘거나 산 아래를 지난다. 솔잎 향 가득한 솔향기 길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53㎞ 중 트레일(숲길 또는 오솔길)은 60% 정도였고, 나머지는 아스팔트·시멘트가 깔린 찻길이나 농로를 걸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길의 만족도는 70점 정도였다. 산림청 관계자는 1~4구간 중간, 별주부마을과 흥주사 인근에 백패커를 위한 야영장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지만, 조성 시기는 밝히지 않았다. 아직까진 모텔이나 펜션에서 묵어가는 수밖에 없다.

동서트레일 시작은 꽂지 해안의 상징인 할미할아비바위에서 시작한다. 본래 시작점은 내륙으로 더 들어간 안면도자연휴양림이지만, 휴양림에서 꽃지까지 4㎞ 구간은 2년 후에 개통할 계획이다.

                                     11월 5일 충남 태안 꽃지에서 방포로 이어지는 꽃다리. 김영주 기자

지난 5일 오전, 꽃지해안공원에 들어섰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수천평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은 불과 십여대. 할미할아비바위로 이어지는 꽃지백사장의 관광객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만큼 드물었다.
할미할아비바위를 앵글에 담을 수 있는 사진 촬영 지점 바로 옆에 1t 트럭을 개조한 이동식 카페가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잔에 3500원.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우아하게 길을 시작하고 싶어 멈춰 섰다. 여주인한테 ‘동서트레일 개통하고 나서 꽃지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는지?’ 물었다.
“보시다시피. 거의 없어요.” 이날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도 기자가 처음이라고 했다. 전국의 걷기 길은 해마다 늘어나는 데 반해 걷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사장은 에스프레소 머신에 포트필터를 끼우며, 기자에게 “어디까지 가냐?” 고 물었다. “오늘은 몽산포항까지 간다”고 하니 뜬금없는 길 안내를 했다.
“꽃다리 건너 가면 한 시간이면 가겠네”. 꽃지에서 몽산포까지는 27㎞. 축지법을 써도 1시간에 갈만한 길이 아닌데, 어떤 연유로 그런 계산을 했을까. 하도 자신 있게 말하길래 굳이 대꾸하지 않고, 혼자 씨익 웃으며 트레일에 들어섰다. 동서트레일이 시작되는 꽃지해안에서 매일 커피를 파는 아주머니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길. 아직 본격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아낙은 아마 꽃다리 건너자마자 나오는 방포와 헛갈린듯 싶다. 방포까진 2~3㎞, 쉬엄쉬엄 가면 1시간이다.

방포의 옛 이름은 곁개, ‘개(浦) 옆에 있는 마을’이라고 뜻이다. 백사장 남쪽 끝에 전망대가 있는데, 서해의 너른 갯벌을 조망할 수 있다. 이후엔 소담한 소나무 숲길이 펼쳐지고, 다시 숲을 내려오면 백사장이다. 백사장 지나 숲길, 숲을 지나 백사장…. 이날 걸었던 트레일은 온종일 이런 길이 반복됐다. 숲과 백사장이 이어지는 길은 방포와 밧개, 두에기, 기지포, 삼봉, 백사장항까지 이어진다.

꽃지에서 백사장까지는 약 11㎞. 해안을 따라 걷는 동서트레일 1구간의 종점이다. 그중 두에기에서 삼봉까지 약 4㎞ 구간은 ‘명상의 갯벌’이 펼쳐졌다. 조성된 트레일은 백사장 위 솔밭으로 나 있지만, 갯벌을 걷고 싶어 일부러 밀물 들이치는 바닷가로 내려왔다. 마침 때는 썰물에서 들물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11월 5일 충남 태안군 동서트레일 1구간 두에기 해변. 김영주 기자

두에기 갯벌로 들어오니 북쪽 삼봉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안선은 낫을 ‘ㄱ’자로 펼친 것마냥 길게 구부러져 있었다. 네팔의 산악지역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길은 모두 1시간 거리”라고 한다던데, 두에기에서 삼봉까지 딱 십리 길, 말없이 걸으니 딱 1시간 걸렸다.서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이 연신 왼쪽 뺨을 핥고 갔지만, 볕이 따사로워 사납진 않았다.

멀리 맨발로 걸어오는 한 남성이 보였다. 일망무제 십리 갯벌을 홀로 걷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맞은 편에서 ‘동반자’를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60대로 보이는 남성은 “태안에 여행 온 김에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갯벌에서 마주친 유일한 사람을 뒤로 하니, 오롯이 혼자가 됐다.

갯벌엔 빈 조개껍데기가 가득 했다. 밀물이 쌓아 놓은 조개의 무덤이었다. 발아래를 보니, 길게 늘어뜨린 그림자가 조개껍데기 무덤 위로 지나고 있었다. ‘쓱쓱’ 밀물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하늬바람 소리가 스산함을 더했다. ‘센티멘털’로 빠져드는 길이었다.

                                       충남 태안군 동서트레일 1구간 기지포 해변. 김영주 기자

불현듯, 십수 년 전 티베트에 갔을 때 본 한 사내를 떠올렸다. 초모룽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 북쪽에 자리 잡은 어느 마을을 지나던 때였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해발 4500m 황톳길을 차를 타고 가는 중 한 사내가 찻길을 벗어나 황량한 사막을 향해 걷고 있었다. 검은색 티베트 전통 의상을 치렁치렁 걸친 사내는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벌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근방에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위는 사막과 설산뿐이었다. 마을로 가려면 적어도 수십리 길을 가야 할 터인데, 남자는 왜 찻길을 두고 황량한 길을 들어서고  있었던 것일까. 고소증세로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저것이 티베트 사람들이 말하는 구도(求道)의 길인가?’ 생각했었다.

해질녘, 서해안의 갯벌을 무작정 걷고 있는 나와 편한 길을 두고 황량한 길을 택한 티베트 사내의 모습이 포개졌다. 사내는 유난히 키가 크고 허리가 구부정했는데, 길게 늘어뜨린 그림자가 티베트 사내를 떠올리게 했나 보다. 물론 나의 길은 구도와는 먼, 오롯이 ‘걷기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길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사내도 기름내 나는 찻길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황량한 벌판을 즐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산림청이 동서트레일이라 명명한 이 길은 새로 만든 길이 아니다. 십수 년 전 조성된 ‘해변길’의 다른 이름이다. 2007년 원유 유출 사고를 수습한 태안군은 2013년 해변을 따라 5개 코스 총 120㎞의 걷기 길을 만들었다.
꽃지에서 백사장까지 길은 ‘노을길’, 백사장(드르니항)에서 몽산포까지는 ‘솔모랫길’이라 이름 붙였다. 실제 길에 세워진 안내판·이정표도 ‘동서트레일’ 보다는 ‘해변길’로 표기된 경우가 더 많다. 같은 길에 여러 개의 이름이 붙은 셈이다.

몽산포의 노을, 잔잔한 위안  

                              11월 5일 충남 태안군 동서트레일 2구간, 신온리 염전. 김영주 기자

2구간은 백사장항에서 몽산포까지 15㎞에 이른다. 백사장에서 드르니항, 청포대, 달산포를 거친다. 이 곳도 ‘하나의 길에 두개의 이름’이 붙었다. 청포대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은 서해랑길 66코스와 겹친다. 서해랑길과 동서트레일은 몽산포항에서 갈라지는데, 서해랑길 66코스는 북쪽으로 동서트레일 3구간은 동쪽으로 접어든다.

몽산포항에 도착하니 오후 6시. 해는 수평선 아래로 잠겼지만,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해가 진 바다는 장판을 깔아 놓은 듯 잠잠했다. 한참을 서서 해넘이를 구경했다. 잔잔한 바다와 수줍은 연한 빛을 띠는 하늘을 혼자서 점유했다.

포구엔 식당이 서너 군데 있었지만, 밖에서 메뉴판을 훑어보니 회와 간장게장이 대부분이었다. 혼자서 먹기엔 부담스러운 메뉴다. ‘어디로 가야 하나’ 머뭇거리던 중, 식당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아주머니 둘과 눈이 마주쳤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는 눈빛이었다.
“어디서 혼자 등산하다 왔을까? 근데 혼자서 먹을 만 한 게 회덮밥밖에 없네.”
자동 주문이었다. 5분도 안 돼 두툼한 회가 소복이 쌓인 회덮밥 한 그릇이 나왔다. 백발을 한 아낙이 “1만 5000원인데, 특별히 회를 많이 넣어 2만원짜리 같은 특 회덮밥”이라고 말했다. 평소 회덮밥을 좋아하지 않아 ‘삼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하는 회덮밥을, 그것도 ‘특 회덮밥’을 뚝딱 해치웠다. 점심을 건너뛴 채 7시간 걸어 시장이 반찬이었다.
아주머니에게 잠잘 곳을 추천해 달라 하니 “평일이라 방은 많다. 언덕 위 어느 집이든 비슷하다”고 했다. 두 곳 정도 둘러보니 평일 모텔·펜션의 하룻밤 가격은 6~8만원 정도였다.

몽산포에서 태안읍까지 13㎞ 3구간은 대부분 아스팔트·시멘트 길이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샅길과 농로, 염전 등이 이어졌다.
몽산·진산·남산리를 거쳐 태안읍행정복지센터까지 길은 농로가 대부분이었다. 전날 모래밭과 숲길을 걷다 시멘트길을 걷다 보니 발바닥에 부담이 왔다. ‘걷기 좋은 길’을 좇는 트레커라면 굳이 걷지 않아도 될 구간이다.


              11월 6일 충남 태안군 동서트레일 3구간에 있는 백화산 트리워크. 김영주 기자

4구간은 태안읍행정복지센터 북쪽에 있는 백화산(284m) 넘어 흥주사, 오석산(169m), 팔봉산(364m) 아래까지 야트막한 산을 걷는다. 호젓한 숲길이 대부분이다. 백화산 구름다리, 흥주사 트리워크(tree walk) 등 잔잔한 재미를 주는 곳을 만난다.

전체적으로 동서트레일 1~4구간 53㎞는 1박 2일 걷기 여행으로 맞춤한 곳이었다. 갯벌과 바람, 지는 해와 밀물, 소나무숲과 고샅길 등이 잔잔한 위안을 준다. 올해를 한달여 남겨 놓은 시점에서 한해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걸어볼 만한 길이다. 말동무가 있어도 좋고, 혼자라도 좋다.

                                                                     김영희 디자이너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1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