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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이 만든 사람들, 자멸하지 않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9. 12. 14:28

[사이언스카페]

모아이 만든 사람들, 자멸하지 않았다

석상 만들다 생태 파괴로 인구 붕괴
고대 유골 DNA는 인구 계속 증가 보여줘
위성 으로 분석한 토양 생산력도 붕괴 반박
석상 이동도 줄로 가능, 삼림 파괴 반박

이영완 기자(조선비즈)
입력 2024.09.12. 08:58업데이트 2024.09.12. 11:59
 
 
 
남태평양 라파 누이(이스터섬)에 있는 거대 석상 모아이. 석상을 만들려다 생태계를 파괴해 인구가 급감했다는 기존 이론을 반박하는 연구 논문이 나왔다./위키미디어

 

남태평양에 있는 칠레 라파 누이(Rapa Nui, 이스터섬)에는 600여 개의 거대 석상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모아이(Moai)이다. 영화 ‘박물관은 살아있다’에서 ‘덤덤’으로 나오는 석상이다. 1250~1500년 현지 원주민들이 만들었다. 거대 석상을 만들려면 노동력이 풍부해야 한다. 하지만 1700년대 유럽인이 도착했을 때는 원주민이 약 3000명밖에 없었다고 기록됐다. 사람들은 라파 누이 사람들이 석상을 만들려다 섬의 자원을 모두 소진해 자멸했다고 생각했다.

석상만이 알고 있을 비밀을 과학자들이 풀어냈다. 빅토르 모레노-마야르(Víctor Moreno-Mayar) 덴마크 코펜하겐대 지구연구소 교수와 안나-사포 말라스피나스(Anna-Sapfo Malaspinas) 스위스 로잔대 전산생물학과 교수 연구진은 12일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DNA 분석 결과를 보면 라파 누이 사람들이 인구 증가로 생태 자원을 소진해 자멸하는 ‘생태학적 자살(ecological suicide)’을 한 것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네이처지 표지 논문으로 실렸다.

 

◇DNA 다양성 확대도 인구 증가 보여줘

 

라파 누이는 남미대륙에서 서쪽으로 약 3700㎞ 떨어져 있다. 사람이 사는 섬과는 동쪽으로 1900㎞ 이상 떨어진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외딴 섬이다. 이 섬과 주민들은 모두 라파 누이라고 불린다. 폴리네시아인들이 1200년쯤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164㎢가 야자수 숲으로 덮여 있었다고 추정된다.

 

1722년 유럽인들이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숲이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이 섬의 역사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자원을 얻기 위해 생태계를 파괴해 스스로 붕괴한 생태학적 자살, 에코사이드(ecocide)의 사례로 알려졌다.

덴마크와 스위스 과학자들은 프랑스 파리의 국립자연사박물관에 보관된 인간 유골 15점을 조사했다. 1877년과 1935년 탐험대가 라파 누이에서 수집한 유골이었다. 연구진은 치아와 내이뼈에서 추출한 DNA를 해독해 이들이 오늘날 라파 누이 사람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결과 유골의 주인공들은 연대가 1670년에서 1950년 사이로 나왔다.

 

연구진은 DNA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분석했다. 인구가 적으면 공통 조상에서 물려받은 유전자를 많이 공유한다. 인구가 늘면 공유하는 유전자가 감소한다. 즉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한다. 연구진은 DNA 정보를 통계 분석해 라파 누이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계속 늘었음을 확인했다. 빅토르 모레노-마야르 교수는 “흥미롭게도 우리는 앞서 예상한 것처럼 1600년대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대인의 유전자를 보면 1200년 무렵 처음 섬에 정착할 당시 인구 병목 현상의 징후가 있었지만, 그 후 유전적 다양성이 계속 늘어나 섬의 인구는 19세기까지 꾸준히 증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860년대 페루의 노예 사냥꾼들이 인구의 3분의 1을 납치했고, 1870년대 천연두까지 창궐해 결국 110여 명만 남았다.

연구진은 또 고대 라파 누이 유골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DNA도 확인했다. 연구진은 두 집단이 1300년대 무렵 혼합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폴리네시아인이 처음 라파 누이에 정착했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네이처지 표지로 소개된 모아이 석상. 라파 나우 사람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인구가 급감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표지에 소개됐다./Nature

◇AI로 토양 생산력 추정, 인구 급감 달라

기록에 따르면 1722년 처음 유럽 탐험가가 도착했을 때 라파 누이에는 3000명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전성기 때 1만5000명 수준이던 인구가 거의 붕괴됐다고 생각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생물학자인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생태학적 자살론을 펼쳤다. 그는 라파 누이 사람들이 모아이 석상을 옮기기 위해 통나무를 베어 바닥에 깔았다고 추정했다. 통나무를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로 삼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삼림을 과도하게 벌채하고 토양이 침식됐다. 이로 인해 1만5000명의 인구를 유지할 식량을 생산할 수 없어 인구가 붕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DNA 분석 결과는 그와 정반대이다. 라파 누이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지 인구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의 카트린 네겔레(Kathrin Nägele) 박사는 이날 네이처에 발표한 논평 논문에서 “인구 붕괴설에 종지부를 찍는 성과”라며 “이번에 원주민의 이미지를 바로잡았다”고 평가했다.

어쩌면 라파 누이 인구가 1만5000명 규모였다는 전제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미국 빙엄턴대의 칼 리포(Carl Lipo) 교수가 지난 6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라파 누이의 농업은 4000명 미만만 유지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1만5000명에서 유럽인이 처음 목격한 3000명으로 급감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빙엄턴대 연구진은 5년에 걸쳐 라파 누이를 조사하고 인공위성으로 섬 지역을 촬영했다. 인공지능(AI)으로 위성 사진을 분석해 섬의 농경지 면적과 식량 생산량을 예측했다. 그 결과 라파 누이의 농경지에서 나오는 식량은 2000명분에 불과했다. 인구가 갑자기 늘어 환경을 파괴했다는 가설과 대비되는 결과다.

주요 농경지는 라파 누이의 ‘바위 정원’이다. 돌, 바위를 토양 위에 쌓은 형태로, 바위 틈에 고구마를 심으면 바다에서 날아오는 염수와 건조한 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토양의 표면 온도를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하는 역할도 했다. 연구진은 바위정원에서 나오는 농산물에 해산물과 같이 수렵, 채집으로 얻은 것까지 고려하면 섬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인구는 3900명 정도로 추산했다. 리포 교수는 “라파 누이의 인구는 늘 4000명 미만이었다”고 주장했다.

고고학자들이 복제 모아이에 밧줄을 걸어 옮기는 모습. 모아이를 흔들어 40분에 100m를 이동시켰다.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석상 줄로도 이동 가능, 삼림 파괴 반박

그렇다면 라파 누이 사람들은 80t까지 나가는 엄청난 무게의 모아이를 채석장에서 바닷가까지 18㎞나 옮길 수 있었을까. 통나무를 엄청나게 사용하는 생태 파괴 행동은 없었을까. 홍콩 과학기술대 기계항공공학과의 서정원 교수는 지난 2022년 ‘미국전기전자공학회(IEEE) 로봇공학 회보’에 “로봇이 이스터섬의 모아이가 흔들거리며 걷는 방식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철사로 모아이처럼 밑이 둥글고 넓은 구조를 만들고 그 위로 기둥을 세웠다. 연구진은 기둥에 줄을 연결하고 로봇팔로 양쪽을 번갈아 당기는 실험을 했다. 그러자 철사 모아이는 뒤뚱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서 교수는 로봇팔 대신 드론 두 대로 같은 실험을 해 역시 모아이를 걷게 하는 데 성공했다.

서 교수의 실험은 앞서 고고학자들이 직접 사람의 힘으로 진행한 실험을 로봇으로 더 발전시킨 것이다. 지난 2013년 미국과 칠레 고고학자들은 복제 모아이를 밧줄로 옮긴 실험 결과를 국제 학술지 ‘고고과학 저널’에 발표했다. 모아이의 머리 부분에 밧줄을 걸어 좌우 양쪽과 뒤에 늘어뜨린다. 뒤쪽의 밧줄은 이동 도중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도록 가이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오른쪽 밧줄을 잡아당기면 모아이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 이어 왼쪽으로 밧줄을 당기면 아랫부분이 빙글 돌면서 조금씩 앞으로 간다. 당시 18명이 밧줄을 당겨 40분에 무게 4.35t의 복제 모아이를 100m나 이동시켰다. 이 연구들은 모두 모아이를 통나무를 깔지 않고 줄로 옮겼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모아이를 만들더라도 생태학적 자살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아이가 비극의 시발점이라는 누명을 벗을 길이 열렸다.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4-07881-4

Science Advances(2024), DOI: https://doi.org/10.1126/sciadv.ado1459

IEEE Transactions on Robotics(2022), DOI: https://doi.org/10.1109/TRO.2021.3140147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2013), DOI: https://doi.org/10.1016/j.jas.2012.09.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