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씨구 국악]
양반이 즐기면서 지배층 풍자하는 이야기들 사라졌죠
사라진 판소리 일곱 마당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 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가사만 봐도 익숙한 멜로디가 떠오를 거예요. 밴드 이날치의 노래 '범 내려온다'의 일부분이에요. 이 노래는 사실 판소리 '수궁가'에서 호랑이가 기세등등하게 내려오는 대목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 국악이에요. 판소리는 조선 시대 후기, 숙종(재위 1674~1720) 무렵 서민들이 지배층에 저항하는 마음을 담아 만들어 즐기던 노래인데요. 수궁가를 비롯하여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춘향가' 등 다섯 곡이 판소리로 불리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 다섯 곡 말고도 판소리로 불리던 곡이 일곱 개나 더 있었다는 걸 알고 있나요? 양반 지배층에 억눌렸던 서민들이 그 애환을 판소리에 담아냈던 만큼, 자극적인 소재의 곡이 많았다고 해요. 판소리 일곱 개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볼게요.
원래 열두 마당이었던 판소리
판소리는 원래 큰 마당이 있는 저잣거리에서 즐기던 음악이었어요. 그래서 판소리 곡을 세는 단위가 '마당'이랍니다. 조선 순조 때 쓰인 '관극시', 철종 때 쓰인 '광한루악부' 등을 살펴보면 열두 마당이 판소리로 불렸다고 나와요.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는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 '장끼타령' '변강쇠타령' '옹고집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일곱 마당이 더 있었던 거예요.
판소리에서 일곱 마당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서민들이 즐기던 판소리를 19세기부터 양반 계층도 즐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양반이 판소리를 향유하게 되면서 아내를 두고 기생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욕심부리며 서로를 속이는 등 유교 이념에 맞지 않는 이야기와 양반을 과도하게 풍자하는 이야기 등이 점차 불리지 않게 됐어요. 한시 '관우희'를 보면 '외설적이고 조잡한 내용을 가진 판소리는 차차 부르지 않게 되었다'고 적혀 있지요.
판소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예요. 노래가 불리지 않으면 그 선율을 알 수가 없어요. 자연스레 없어지는 거죠. 노랫말을 안다고 해도 판소리로 다시 듣지 못해요. 음을 표시한 악보가 없기 때문이에요. 다만 일곱 마당이 어떤 이야기를 담은 노래였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어,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어요. 사라진 판소리 일곱 마당의 이야기들은 자극적이면서도 무척 흥미진진했답니다.
기생이 양반 농락하는 등의 이야기들
배비장타령은 거들먹거리는 지배층이 기생의 계략에 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노래예요. 비장(裨將)이라는 직책으로 제주도로 간 배씨 성의 하급 관료 남성이 등장해요. 배 비장은 성인군자인 척하며 도도하게 행동하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기생 애랑과 하인 방자의 계략에 넘어가 알몸으로 뒤주에 갇혀요. 방자는 뒤주를 바다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등 배 비장의 혼을 빼놓았죠. 배 비장은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이후 뒤주에서 알몸으로 나오면서 망신을 당하는 내용이에요.
강릉매화타령도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는 노래입니다. 기생 매화에게 푹 빠진 한 양반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갔다가 다시 강릉에 내려왔지만, 기생에게 농락당하고 버림받죠. 이처럼 지배층의 위선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내용이다 보니 양반이 판소리를 향유하기 시작한 이후로 불리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무숙이타령은 한양의 한 갑부 아들이자 왈자(건달)인 김무숙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판소리입니다. 김무숙은 아내가 있었지만 방탕한 생활을 즐겼어요. 그러다 궁중 내의원의 기생 의양에게 푹 빠져버려요. 의양을 궁중에서 빼내어 살림까지 차립니다. 무숙이 계속 방탕한 생활을 하자 보다 못한 의양은 무숙을 정신 차리게 할 목적으로 그의 본처, 친구 등과 공모해 무숙을 극도로 궁핍하게 만들어버려요. 무숙이타령은 서민들을 괴롭혔던 왈자를 풍자하고, 돈 많은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려고 판소리로 불렀대요.
장끼타령은 소설 장끼전을 바탕으로 한 판소리예요. 남편 장끼가 아내 까투리의 말을 듣지 않고 콩을 주워 먹다가 짐승을 잡는 틀에 걸려 죽어요. 이후 까투리는 여러 새의 청혼을 받게 되고, 결국 문상 온 홀아비 장끼에게 시집가서 잘 살았다는 내용이죠. 남존여비와 개가(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함) 금지라는 당시 유교 윤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에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변강쇠타령은 다른 곡들보다는 꽤 오래 살아남았어요. 일제강점기까지 변강쇠타령의 일부분이 판소리로 불렸다고 해요. 성적 욕구만 추구하다가 동네에서 쫓겨난 변강쇠와 옹녀가 우연히 만나 부부가 돼요. 놀기만 하던 변강쇠는 장승을 잘라 땔감으로 쓰다가 천벌을 받아 죽게 되는데, 그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생기는 기이한 이야기들이 판소리로 불렸어요. 천민들의 실생활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어 의미 있는 판소리였지만, '성(性)'을 주제로 하고 있어 결국 구전되지 못했죠.
다섯 마당, 살아남아 감동 선사해
판소리는 서민들이 시작한 음악이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판소리는 양반에게 선택받은 다섯 마당이에요. 다섯 마당은 유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에 부합하는 이야기의 노래라는 걸 느낄 수 있어요. 삼강오륜은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 등에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말합니다.
심청가를 떠올려 보세요. 심청이는 아버지 심 봉사를 위해 공양미 300석을 받고 인당수 제물이 됩니다. 효심 가득한 심청이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해야 한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죠. 또 마음씨 착한 동생 흥보와 욕심 많은 형 놀보가 등장하는 흥보가에서는 자신을 구박하고 도와주지 않는 놀보를 형으로 대접하고 챙기는 흥보를 통해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어요. 용왕에 대한 별주부의 충성을 노래하는 수궁가에는 군신유의(君臣有義)가 강조돼 있죠.
물론 수백 년 전 만들어진 판소리 다섯 마당의 내용이 현시대와 맞지 않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재미와 웃음, 감동을 선사해 주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