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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째 숨어서 새를 봅니다… 詩가 거기 있어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3. 2. 13:36

 

“50년째 숨어서 새를 봅니다… 詩가 거기 있어요”

시집 ‘그저께…’ 펴낸 시인 김광규

입력 2023.03.02 03:00
 
 
 
 
 
 

김광규(82) 시인의 서울 홍제동 자택에는 매일같이 박새, 까치를 비롯한 새들이 찾아온다. 새들은 주변을 한참 살피다, 담장에 놔 둔 모이를 삽시에 먹는다. 약 50년째 반복되는 풍경. 시인은 최근 이것이 주변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한 다음 펜을 드는 시작(詩作)과 닮았음을 깨달았다. “칠십대 후반에 별 거 아닌 걸 발견했어요. 관조를 하려면 마음이 가라앉아야 해요. 뛰면서가 아니라, 앉거나 커튼 뒤에 숨어서 새들을 보는 거죠. (관조하려면) 노력해야 합니다.”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 ‘그저께 보낸 메일’(문학과지성사)은 과거와 현재 일상을 끝없이 관조하며 써 내려간 시편 60개를 담았다. 전작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 이후 7년 만의 신작. 1975년 등단한 이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안개의 나라’처럼 일상적 언어로 삶의 이면을 비추는 작품을 써 온 시인이다. 그의 시는 평범한 일상을 노래하나, 개인의 삶과 시대를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져 왔다.

김광규 시인은 “젊은 날은 회상 속에서 아름답게 생각되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부끄러운 과거를 포함해, 잊히지 않는 기억을 시로 쓴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신작 시집에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그저께’를 담담하게 돌아본 시편이 많다. 그저께는 확실한 과거를 뜻한다. ‘어제오늘’이나 ‘오늘내일’처럼 ‘오늘’과 함께 사용되는 표현이 아니기에,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둘 사라지는 시인의 감각이 대표적. 반세기 동안 즐겨 마신 원두커피의 이름을 간신히 떠올리거나(’달맞이’), 된장국 끓는 냄새를 못 맡게 되는 과정(‘사라진 냄새골’)처럼 노화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담은 시가 돋보인다.

 

늙고 병든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오가던 시인의 발걸음은 ‘장례식장 가는 길’에서 끝난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이 작품은 실제 시인이 다니는 서울대병원에 가는 길을 안내한다. 그는 이번 시집이 “내 마지막 시집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약 5년 전 산책하다 허리를 다친 뒤로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팔십이 넘으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듯 주변에서 많이 (세상을) 떠나요. 생로병사라는 세속적인 이야기를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풀어냈습니다.”

 

시인은 인생의 내리막을 걷다가도 ‘부끄럽지 않냐’고 묻는다. ‘호박 그 자체’에서 시인은 담을 넘어 들어온 옆집 호박을 먹을 궁리를 한다. 부끄러울 수 있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따 먹고 싶은 욕심일랑 몽땅 버리고/ 짙푸르게 익어가는 호박 그 자체만 바라볼 수는 없을까’. 뒷마당에 죽은 가죽나무처럼 소멸해 가는 존재를 그린 시편도 많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일상 속 풍경을 통해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드넓은 산하 무수한 잡초들도/ 저마다 이름이 있기 마련/ 의미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나/ 온 세상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혼자서 귀 기울이고 중얼거리며/ 그 속에 숨은 뜻 가까스로 불러내는/ 그런 친구가 곧 시인 아닌가’(‘그 짧은 글’ 중에서)

 

짧고 쉬운 글은 김광규 시의 정체성이다. “데뷔할 땐 젊은 사람이 쉽게 쓰니까 ‘김광규 작품은 시가 아니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나는 보통 사람이 읽어도 알 수 있는 단어를 쓰기 위해 스무 번 넘게 고치곤 합니다.” 그는 등단 직후와 지금을 비교하며 “시는 짧은 글이지만, 거기에는 우주와 전 세계가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시로 쓸 수 있는 건 정해져 있지 않아요. 누가 어떻게 요리하는지에 따라 달려 있죠.”

 

시인은 “이번 시집은 곧 우리의 삶”이라고 했다. 딸을 유치원에 보내는 아빠, 죽은 고양이처럼 어딘가 있을 평범한 삶 말이다. 그는 “역사는 이긴 자들의 기록이다. 역사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 하나가 남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겠나”라고 했다. “시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이기지 못한 이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이긴 자의 몫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인식하는 건 중요해요.” 허리가 굽은 시인은 거동이 불편하지만, 지팡이 없이 매일 산책을 나간다. 점점 느려질 그의 걸음 속에서 주변을 더 찬찬히 들여다보려는 의지가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