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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전엔 무엇이 있었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6. 1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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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전엔 무엇이 있었나” 저명 천체물리학자 말문 막은 질문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10.23 05:00

 

 [백성호의 예수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복음 1장 1절)

 성서에서는 우주의 출발점을 ‘태초’라고 표현한다. 과학에서는 다르다. 천체물리학자들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표현한다.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시작되는 출발점을 ‘빅뱅’이라고 부른다.

 

 (23)태초에 말씀이 있었나, 아니면 빅뱅이 있었나

 저명한 국내 천체물리학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에게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하고 묻자, 그는 그 질문을 안고서 두 눈을 감았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저는 평생 동안 우주를 연구했습니다. 저도 수도 없이 묻고 또 물었지요.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빅뱅 이전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나?’ 숱하게 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 묻지 말자.’ 저는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내게는 그 말이 고백으로 들렸다. 이 무한한 우주를 연구하던 과학자가,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질문의 낭떠러지, 그 끝자락에서 털어놓는 고백 같았다.

 

 

그 고백을 향해 다시 물었다. “만약에 ‘빅뱅 이전’이라는 게 있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빅뱅이라는 출발선을 그만큼 더 앞으로 당겨야겠지요. 거기가 다시 빅뱅이라는 새로운 출발선이 되는 거니까. 과학자로서 저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시작과 끝. 과학에서는 그걸 ‘직선’으로 본다. 가령 ‘빅뱅’을 부산역이라고 하자. 천체물리학자들은 부산역에서부터 우주가 비롯됐고, 대구역과 김천역을 거쳐 지금껏 달려오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성서는 ‘부산역 이전’을 말한다. 성서는 ‘빅뱅 이전’을 말하고, 과학은 ‘빅뱅 이후’를 말한다. 그래서 둘은 충돌한다. 마치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처럼 양자택일의 문제가 되고 만다. 정말 그럴까. ‘빅뱅 이전’과 ‘빅뱅 이후’는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걸까. 성서와 과학은 그토록 이질적인 걸까.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는 사도 요한이다. 그는 12사도 가운데 가장 어렸다. 각종 성화에서도 요한은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앳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언뜻 보면 아리따운 여성으로 보일 정도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복음 13장 23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 제자는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요한복음 13장 23절)을 정도로 예수가 아꼈다.

이스라엘 갈릴리에서 멀지 않은 가나 지역에 가나혼인잔치 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는 사도 요한의 동상이 서 있다.

 

최후의 만찬 도중에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예수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제자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베드로조차 예수에게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직접 묻지 못했다.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고갯짓을 했다. 대신 물어봐달라는 신호였다. 그 제자는 “예수님께 더 다가가”(요한복음 13장 25절) 그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빵을 적셔 유다에게 건넸다.

 그 제자가 누구일까. 성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본다. 요한복음의 저자이기에 자신의 이름을 직접 언급할 수 없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째서 열두 제자 중 요한을 각별히 아꼈을까. 어찌하여 베드로도 묻지 못했던 질문을 그가 물었을까. 나는 요한복음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다.

 4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에는 독특한 색깔이 있다. 그건 ‘요한의 눈’을 통과한 영성의 스펙트럼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요한을 사도 바울(바오로)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신학의 눈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풍경이 요한복음에는 녹아 있다. 그런 각별함이 사도 요한에게 있었다.

사도 요한이 하늘의 메시지를 받아 글을 쓰고 있다. 요한은 그리스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복음서를 썼다고 전해진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복음 1장 3~6절)

 12사도 중 열한 명이 죽임을 당했다. 십자가형에 처하기도 하고, 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참수형을 당한 이도 있다. 사도 요한만이 늙어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요한은 아흔이 다 된 나이에 그리스의 파트모스(밧모) 섬에 유배당했다. 그는 거기서 18개월이나 살았다.

루카 조르다노의 작품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예수 당시에 로마 시민이 아닌 사람을 처형할 때 십자가형이 사용됐다.

 

12사도 중 한 사람인 안드레의 처형 장면은 그린 작품. 12사도 중에서 11명이 죽임을 당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배지는 일종의 수도원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수백 권의 책을 썼고, 사도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썼다고 한다. 일부 성서 학자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쓴 사람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 코린토(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파트모스 섬에 간 적이 있다. 오후 열 시에 배를 타고 출항해 밤새 파도를 갈랐다. 이튿날 오전 일곱 시에야 파트모스 섬에 도착했다. 무척 아름다운 섬이었다. 하얀 건축물과 깔끔한 해안에서 지중해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별장 같은 저택들도 곳곳에 보였다.

 요한 당시에는 달랐다. 파트모스 섬은 로마 시대 중범죄자들의 유배지였다. 온갖 흉악범들이 이 섬에 우글거리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요한의 거처는 평평한 땅에 있지 않았다. 그는 파트모스 섬의 가파른 산, 길이 험한 동굴에서 살았다.

그리스 파트모스 섬의 동굴에서 사도 요한이 머물며 요한복음서를 썼다고 한다. 순례객들이 그 동굴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파트모스 섬은 작은 섬으로 가운데에 높지 않은 산이 있었다. 산 위에 오르자 섬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들쭉날쭉한 해안선이 장관이었다. ‘2000년 전에는 어땠을까. 거칠고 황량한 유배지에 불과했겠지.’ 아흔 살 노구를 이끌고 요한은 이 가파른 길을 오르내렸으리라. 요한은 그렇게 기도하고 묵상하고, 복음서를 썼다.

 〈24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지인 몇 분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분이 말했습니다.

  “아내는 나한테 불만이 많아요.
   내가 맨날 하나님만 찾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해.’
   저는 사소한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거룩하신 하나님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른 분이 반려견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아지랑 같이 있으면 사랑하는 감정이 솟고,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그 말을 듣고 처음 그분이 말했습니다.

  “강아지는 아무 것도 아니죠.
   어디 하나님한테 비하겠어요.
   저는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강아지 같은 걸 어딜 갖다 대겠어요?”

 저는 요한복음이 떠올랐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분명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강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아지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그분을 통해서 생겨난 존재입니다.
 약간 무시하던 아내도 똑같습니다.
 어떻게 태어났을까요?
 그분을 통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창조주를 통해서 생겨납니다.
 그분을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강아지도 그렇고,
 고양이도 그렇고,
 길가의 가로수도 그렇고,
 밤하늘의 별도 그렇습니다.
 ‘나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한다’며 투덜거린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그분을 통해 생겨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창조주가 깃들어 있습니다.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창조물 속에서
 창조주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로 곁에 있는 강아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분은 아무런 대꾸없이 생각에 잠기시더군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