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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60대 남성들 “집에서 왕따 된 기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5. 31. 11:04

개미처럼 벌어주고… 설거지용 고무장갑 뭐가 좋나 찾는 은퇴남들

[2022 다시 쓰는 젠더 리포트]
은퇴한 60대 남성들 “집에서 왕따 된 기분”

 

특별취재팀
입력 2022.05.26 03:51
 
 
 
 
 
/일러스트=박상훈

 

서울 사는 A(60)씨는 지난해 30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퇴직하고 나서야 가족과 일상을 공유하게 됐다. 젊을 때 지방 발령을 자주 받았는데, 아내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에 있겠다”고 해서 주말 부부로 살았다. 그런데 은퇴 후 가족과의 삶은 생각과 너무 달랐다. 취업도 안 하고 빈둥대는 아들이 한심해 훈계를 했는데 아들은 대꾸도 안 하고, 아내는 아들을 두둔했다. 얼마 전엔 아들이 잔소리하는 아버지를 손으로 밀쳤는데도 아내와 딸이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었던 것에 충격을 받았다. A씨는 “평생 개미처럼 일해 집에 갖다 바쳤는데, 이젠 셋이 같은 편이고 나만 남 취급한다.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후회된다”고 말했다.

“집에 있으면 ‘삼식이’(세끼 식사를 집에서 해결한다는 뜻) 소리 듣고, 나가면 ‘돈 쓴다’고 눈치 보인다”는 은퇴 남성들은 노년의 부부 갈등이 젊은 시절보다 심하다고 말한다. 2020년 통계청 사회 조사 결과 ‘배우자 만족도’는 남녀 모두 30대에 86.9%, 77.6%로 가장 높다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내려가 60세 이상에선 69.3%, 52.9%로 떨어졌다.

배우자 만족도

 

은퇴한 남성들의 가장 큰 상실감은 매달 들어오던 월급이 끊기는 것. 아내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경제력 없는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 우울해지고 말싸움할 때도 많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다 4년 전 그만둔 박모(73)씨는 “얼마 전부터 아내가 내가 유튜브로 트로트를 들으면 ‘시끄럽다. 귀가 안 들리느냐’고 소리 지르고, 무슨 말만 하면 무조건 짜증을 낸다”면서 “예전엔 큰소리 한번 안 낸 사람인데, 이제 내가 돈을 못 벌어서 무시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박탈감엔 지위고하가 없다. 최근 전직 장관 모임에선 ‘일회용 고무장갑’이 화제였다고 한다. 이 모임에 참석한 한 인사는 “남자들이 퇴직하면 설거지를 많이 하는데, 일반 고무장갑보다 손에 딱 달라붙는 일회용 고무장갑이 편하다고 누가 얘기하니 다들 큰 관심을 보였다”면서 “밖에서나 장관이지 퇴직 후엔 아내한테 꼼짝 못 하는 일개 남편”이라고 했다.

 

아내와 대화 소재가 없는 것도 문제다. 교육공무원으로 퇴직한 이모(67)씨는 “은퇴해 보니 아내는 나의 삶을 잘 모르고 나도 집안일에 관심이 없었으니 아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 그러니 서로 할 말이 없고 의견 충돌만 생기더라”고 했다. 아내가 수십 년 쌓아온 시댁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으며 크게 다투기도 한다. 초등 동창과 결혼한 B(64)씨는 “아내가 결혼 초 있었던 고부 갈등 문제를 지금 꺼내서 나를 괴롭히는데 어떨 땐 통제가 안 될 정도”라고 했다.

자식들도 야속하다. 자기와는 말도 안 섞으면서 아내와는 친구처럼 이야기를 곧잘 한다. 아내는 손주 봐주고 음식 해주며 자식들 집에 드나들지만, 남성들은 그것도 쉽지 않다. 자식들에게 용기 내 말을 걸었다가 ‘꼰대다’ ‘시대에 뒤처진다’며 면박을 당하기도 한다. 공기업 퇴직을 3년 앞둔 김모(58)씨는 딸(28)과 TV를 보다 “저 여자 (연예인) 엄청 날씬하네”라고 했다가 딸에게 “밖에 나가 함부로 외모 평가하면 큰일 난다”며 혼이 났다. 김씨는 “옆에 있는 아내도 딸 편을 드는데 ‘평생 자기들 먹여 살린 나보다 연예인이 중요한가’ 싶어 너무 섭섭했다”고 했다.

은퇴 후 집에 있기 눈치 보여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지방 고등학교 교감을 지낸 박모(72)씨는 학교 시설 관리 직원으로 자원해 일하다 요즘은 장애인 콜택시 기사로 뛴다. “체면이 중요해요? 돈을 벌어야 가장으로서 존재감을 줄 수 있으니 뭐든 열심히 해야지요.”

〈특별취재팀〉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김연주 사회정책부 차장, 변희원 산업부 차장, 김경필 정치부 기자, 유종헌·유재인·윤상진 사회부 기자

 

손주 육아까지 떠안아… 여성들 60대 되면 우울증 발병 급증

[2022 다시 쓰는 젠더 리포트]
평생 가족에 매인 삶 “이젠 자유롭고 싶어”

특별취재팀
입력 2022.05.26 03:47
 
 
 
 
 

퇴직한 남편과 사는 임모(66)씨는 오전 8시 반 아침상을 차리고 집 안 청소를 한 다음, 다시 점심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 오후가 되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세 살짜리 외손녀를 맞아 딸이나 사위가 퇴근할 때까지 돌본다. 2주에 한 번 주말에는 경북 포항의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수발한다. 그는 “40년 넘게 양육과 가사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밥을 자기 손으로 차려본 적 없는 남편의 세끼를 준비하면서 손주와 노모까지 돌봐야 하니 주말도 없이 일하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결혼 전까지 다닌 은행을 그만둔 것도, 남편에게 요리를 가르치지 않은 것도 후회한다고 했다.

1940~60년대에 태어난 노년 여성들은 우울증이 깊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우울증 진단을 받은 남성은 20대(5만1919명)가 가장 많았던 반면 여성은 60대(9만6249명)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남성의 경우 우울증 발병률이 40·50대와 60대 사이에 큰 차이가 없지만, 여성의 경우 60대에 들어서면 우울증 발병률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들 세대는 강력한 남아 선호 사상과 가부장제로 교육이나 취업의 기회를 갖기 어려웠고, 주로 육아와 가사 노동에 전념했다. 문제는 과거의 고정적 성 역할 때문에 맡은 가사·육아 부담이 노년에도 지속된다는 것이다. 남편이 퇴직하면서 차려야 할 끼니가 늘고, 자식의 경제 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손주도 돌봐야 한다. 친정 부모나 시부모가 살아있는 경우엔 간병까지 삼중고를 겪는다.

공공 보육 시설의 부족은 30·40대 여성의 경력 단절뿐 아니라 노년 여성의 삶의 질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보건복지부의 ‘2018년 보육 실태 조사’에 따르면, 양육에서 도움을 받는 가정의 83.6%는 ‘조부모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조부모 중에서도 할머니가 육아를 분담하는 비율이 높다. 아이를 많이 안는 이들에게 생겨서 ‘육아병’이라 불리는 손목터널증후군 환자의 75%가 50대 이상이다.

 

노년 여성에게 편중된 육아로 가정 내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팀이 지난해 만 19세 이상 일반 국민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임신·육아로 가정에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데 공감하느냐’는 질문에 60대의 92.8%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교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강모(65)씨는 수영과 민화를 배우려고 어린 손주를 돌봐달라는 딸의 요청을 거절했다. 딸은 1년째 강씨와 왕래하지 않고 있다. 강씨는 “직장 생활과 육아, 가사를 하며 어머니와 아내로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딸의 사정은 딱하지만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성 평등 의식 높은 딸이나 며느리 때문에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수행해온 명절 노동을 딸이나 며느리에게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과 자영업을 했던 최모(68)씨는 “며느리들이 맞벌이라 제사 때 오지 않는다. 제삿날 아침에 ‘못 가서 죄송하다. 제비는 부쳤다’고 전화 오는데, 지난번에는 아예 전화도 없더라. 혼자 제사 준비를 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한심했다”고 말했다. 의사인 딸의 두 아이를 돌보다 허리를 다친 이모(65)씨는 “나는 어릴 때 공부도 잘했는데 오빠들 학비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못 가고 지방대 나와 교사를 하다가 결혼하면서 그만뒀다. 내 딸만큼은 멋진 전문직 여성으로 키우고 싶었는데 그 때문에 이 나이까지 고생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김연주 사회정책부 차장, 변희원 산업부 차장, 김경필 정치부 기자, 유종헌·유재인·윤상진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