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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써야 할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12. 23. 17:55

 

 

우리는 왜 써야 할까?

 

황정산<문학평론가, 시와 산문  편집위원>

 

 

현대사회는 “왜?”라는 질문을 잊게 만든다.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고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나 말고 누군가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만들어 놓고 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 없이 태어나고 공부하고 또 사회에 입문한다. 왜 사는지 모를 물건을 사고 왜 만나야 하는지 모를 사람을 만나고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 채 돈을 벌고 재산을 모은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나의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해서 욕망하기 때문이다. 나의 욕망은 누군가의 욕망의 대리물이거나 모사일 뿐이다. 이 가짜 욕망이 상품을 만들고 상품을 소비하고 스스로 자신을 상품이 되게 한다.

 

이러한 시대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이 “왜?”라는 잊혀 가는 질문을 다시 던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왜”라는 질문이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라는 질문을 잊어버릴 때 글쓰기는 지금까지 써 왔던 자신의 글을 관성적으로 반복하는 일이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기존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답습하게 될 게 분명하다.

 

그럼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할까? 첫째는 벗어나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의 삶은 닫혀 있고 또 갇혀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의 욕망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욕망에 저당 잡혀 우리는 오늘도 일상의 과업들을 수행하고 있다. 집을 나와 타는 출근 버스는 사고가 나지 않는 한 정해진 길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큰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직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이 일상의 감옥을 감옥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은 말들이다. 말들은 우리에게 어찌 살아야 한다고 명령을 하기도 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식을 권유하기도 하고, 때로 우리를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상투화시켜 우리의 욕망을 다스리고 우리로 하여금 갇힘을 갇힘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시나 소설 또는 수필 등의 글쓰기는 이 상투적 언어들에 대한 저항이고 그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다. 예를 들어 시인을 생각해 보자. 흔히 시인을 잠수함 속의 카나리아에 비유하기도 한다. 세상의 억압과 고통을 미리 알려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시인이 카나리아처럼 다른 사람보다 먼저 울음을 울 듯 시를 쓰는 것은 묶여 있지만 울지 말아야 하는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다는 것은 언어 이전의 언어이고 언어가 상투화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나의 말이기도 하다. 그 울음에 재갈을 물리고 사슬에 묶여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시인은 우리의 울음을 대신하기 위해 시를 쓴다.

 

두 번째는 되살아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 경제를 사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기꺼이 상품이 되기를 희망한다. 더 좋은 상품으로 비싸게 팔리도록 자신을 꾸미고 치장하거나 반대로 팔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에 싼 값으로라도 자신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팔리는 것들이 생명을 가질 이유가 없다. 상품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맡겨진 생명은 진정한 생명이 아니다. 이렇게 주체성을 상실한 존재는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생명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상품경제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는 숫자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것이 수로 표현된다. 모든 상품은 가격이라는 숫자로 가치가 매겨지고, 숫자로 표현된 연봉과 아파트 평수가 삶의 질을 대변하고, 우리의 행복도 나의 가치도 모두 숫자라는 지표로 나타난다. 이 숫자화 된 지표를 높여야 성공한 사람이 되고 그것을 위해 ‘스펙’이라는 또 하나의 숫자에 매달린다. 이 숫자화 된 추상의 세계에는 생명이라는 구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살아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죽어 형해화形骸化된 삶을 사는 존재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생명을 확인하게 되고 자신이 가진 애초의 생명력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생명을 잃고 상품이 된 존재를 되살리는 일이다.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자신의 삶의 뿌리를 찾고 그것을 되살리고 숨겨져 있는 생명의 씨를 다시 싹틔운다. 그리하여 죽어있는 존재들이 가졌던 애초의 생생한 생명력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시인과 작가와 수필가들은 오늘도 영혼의 연필을 꺼내고 있다.

 

글을 쓰는 세 번째 이유는 만나기 위해서이다. 현대사회는 인간 간의 단절이 심화된 사회이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특질을 표현한 말이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사실 많은 사람과 함께 한다. 아침 출근길 대중교통에서 많은 사람과 만나 서로 몸을 부딪고, 일터에서 또 퇴근 후 찾는 술집에서 여러 사람과 공간을 공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과 내 자신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다. 혹시 그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더라도 나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이렇듯 우리는 많은 사람과 함께 하고 있다 하더라도 누구와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 아닌 타인은 그저 잠시 한순간 스치는 인연으로만 존재한다.

 

* 계간 <<시와 산문>> 1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