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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MZ·실버 1028명 답했다“우리 사이 나쁘지 않아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9. 21. 20:08

[아무튼, 주말]

“힘내렴, 나 땐 너만큼 못했단다”… 올 추석엔 ‘쿨한 라떼’ 어때요?

MZ·실버 1028명 답했다
“우리 사이 나쁘지 않아요”

김미리 기자 신지인 기자

입력 2021.09.18 03:00

 

 

 

 

 

일러스트=안병현

 

#1. 인천에 사는 취업준비생 조모(28)씨는 작년 추석 분홍색으로 염색한 머리로 큰아버지 댁에 갔다. “안 그래도 취직 어렵다는데 그렇게 벌겋게 염색하면 뽑아주겠니?” “결혼도 어서 해야지”…. 쉴 새 없이 날아오는 큰아버지 잔소리를 막아준 방패는 할머니(86)였다. “아서라! 요즘엔 여자들 결혼 안 하는 거 흉 아니더라. 돈 잘 벌면 혼자 사는 게 최고지 뭣 하러 결혼해서 스트레스 받냐? 머리도 연예인처럼 예쁘기만 한데 뭘!” 조씨는 “50대 큰아버지보다 80대 할머니가 훨씬 쿨한 모습에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고 말했다.

#2. 김창한(71)씨는 단골 병원의 30대 초반 물리 치료사와 종종 일상 얘기를 한다. “치료사가 맞벌이인데 퇴근해서 부부가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 먹는다더라. 참 보기 좋다. 내가 그 나이 땐 집사람한테 허구한 날 반찬 투정이나 했는데.” 김씨는 “젊은 세대가 지난날의 나를 비추는 거울 같다”고 했다.

 

20~30대 ‘MZ 세대’와 60대 이상 ‘실버 세대’는 정녕 “서로 닿지 않는 평행선” “정반대 대척점”인 걸까. 오해와 편견이 둘 사이 거리를 더 멀어지게 하고 있진 않을까. 추석을 앞두고 <아무튼, 주말>이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MZ 세대와 실버 세대(각각 524명, 504명)에게 서로를 향한 속마음을 물었다.

◇꼰대 노이로제? ‘자기 검열’ 하는 노년

그래픽=김현국

 

오영호(74·박을복자수박물관 이사장)씨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지키는 철칙이 있다. 이른바 ‘스리 업(3 up)’. 지갑은 ‘오픈 업(open up·열기)’, 말은 ‘셧 업(shut up·입 닫기)’, 옷은 ‘드레스 업(dress up·깔끔하게 입기)’이다. 행여 ‘틀딱’ 소리를 들을까 싶어 실천하는 일종의 자기 검열인 셈이다.

설문 결과, 꼰대 강박에 시달리는 노년층이 많았다. “스스로 꼰대라고 생각하나”란 질문에 실버 응답자 중 71.6%가 ‘그렇다’고 인정했다. “젊은이를 대할 때 자신의 태도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복수 응답)”란 물음에도 ‘꼰대 소리 듣는 게 싫어 되도록 말을 줄이려고 한다’는 답이 52.6%로 가장 많았다.

서울 사는 김모(여·81)씨는 “레깅스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젊은 여성들 보면 ‘옷감이 없나. 왜 그렇게 다 벗고 다니느냐’ 한마디 하고 싶지만 봉변당할까 봐 꾹 참는다”고 했다.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참아본 적이 있는가”란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자가 ‘74.6%’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변화는 청년들도 체감한다. 대학원생 신모(33)씨는 “이전엔 밤에 택시를 타면 연세 드신 기사님이 ‘밤늦게 어딜 가냐’는 둥 참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날씨같이 사생활과는 무관한 얘기를 하신다”고 했다.

최근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원로 철학자 김형석(101) 교수를 향해 정철승 변호사가 “적정 수명은 80세”라고 발언해 논란을 빚었다. 이 발언에 대해 실버 세대 59.7%, 청년 세대 71.8%가 ‘공감한다’고 답했지만, 정 변호사의 ‘태도’엔 공감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컸다. 직장인 박모(29)씨는 “정 변호사 발언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오래 산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며 “그런 태도야말로 그들이 욕하는 소통 불가 꼰대의 전형 아닌가.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 얘기를 듣지 않으려는 폐쇄적 마인드가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라떼는 무조건 No? ‘따뜻한 라떼’는 환영

 

왼쪽 팔에 커다랗게 타투를 한 대학원생 유모(28)씨에게 얼마 전 담당 교수(65)가 그 이유를 물었다. “자아를 표출하기 위해”라고 하자, 교수가 맞장구쳤다. “좋네! 나 때는 끓어오르는 젊음을 분출할 길이 마땅치 않았어. 기껏해야 찢어진 청바지였다니까.” 유씨는 “꾸중 들을 거란 예상과 달리 교수님이 공감해줘 놀랐다. ‘따뜻한 라떼(나 때)’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서울 거주 김모(23)씨는 “취업이 안 돼 풀 죽어 있는데, 엄마 친구분이 ‘괜찮다. 잘하고 있다. 나 때는 너희만큼 못했다’고 말씀해 눈물이 찔끔 나왔다”고 했다.

 

젊은 세대가 어르신의 ‘라떼’ 얘기에 무조건 귀 닫을 거란 생각은 오해다. MZ 세대 83.4%는 “나와 생각이 다른 어르신의 말을 경청할 생각이 있다”고 했고, 실버 세대 78.6%도 “젊은 세대의 말을 경청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자칭 ‘할머니 마니아’인 직장인 박모(30)씨는 “2030세대가 닥친 현실은 막막한데 딱히 조언을 구할 데가 없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전쟁과 역경을 거쳐 인생을 달관한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힘내자는 친구들이 꽤 있다”며 “‘박막례 할머니’ ‘밀라논나’ 등 실버 세대가 하는 유튜브를 보며 힐링을 느끼는 것도 그런 심리인 것 같다”고 했다. 설문에서도 “어르신 조언에 영향을 받는 편이다”라는 MZ세대가 81.3%나 됐다.

‘불통’ 이미지가 강한 실버 세대에서도 52.4%가 “젊은 세대의 인생관에 영향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음식 사업을 하는 김정자(76)씨는 “우리 때는 사농공상을 너무 따져 장사하는 사람들이 마지못해 한다는 태도가 있었는데, 요새 농사짓거나 식당 하는 20~30대 사장들을 만나면 정말 일을 즐긴다. 긍정적인 태도를 오히려 배운다”고 했다.

그렇다고 MZ 세대 사고에 완전히 동감하는 건 아니다. 실버 세대는 ‘이해할 수 없는 MZ 세대의 특징’으로 △내일보다는 오늘을 즐기겠다는 ‘욜로형’(40.9%), △어른이나 상사에게 꼬박꼬박 답하는 ‘말대꾸형’(38.3%), △지난 세대의 희생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과거 무시형’(32.1%), △어른들은 촌스럽다고 보는 ‘소통단절형’(29.8%), △일만큼 여가도 중요하다는 ‘워라밸형’(26.2%) 등을 꼽았다.

 

◇반말·쩍벌… 노인인 나도 싫다

 

실버 세대도 자기 세대를 감싸지만은 않았다. 응답자 73.2%가 “내가 봐도 꼴불견인 노인이 있다”고 답했다. 가장 ‘꼴불견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은 반말, 쩍벌(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것) 등 매너 없는 ‘민폐형’(42.3%). 다음은 △나라 걱정을 늘어놓으며 특정 이념을 강요하는 ‘우국지사형’(32.3%), △자기 얘기만 하는 ‘일장연설형’(32.1%) 순이었다. 같은 질문에 MZ세대도 △민폐형(36.1%), △일장연설형(31.3%), △우국지사형(30.5%) 순으로 꼽아 두 세대의 인식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영호씨는 “과거엔 나이가 많을수록 경험치로 인한 정보가 많으니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지금은 스티브 잡스가 전화기 안에 세상을 집어넣었다. 그 세상을 24시간 손아귀에 넣고 사는 애들 아닌가. 어른이라고 잴 게 별로 없는 시대가 왔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갈등보다는 두 세대가 대화할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송재룡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인에 대한 편견은 미디어가 과장한 측면이 있다. 청년 세대가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재생산해 갈등이 부풀려졌다”며 “정작 심각한 문제는 실버 세대와 청년 세대의 접점 자체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