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소나무는 알고 있다, 그날 戰士에게 벌어진 일을…
[박종인의 땅의 歷史]261. 연평 포격전 서정우 소나무와 강화도 신미양요 소나무
연평도 산기슭에 있는 '서정우 소나무'. 2010년 연평도 포격전 당시 전사한 하사 서정우의 모표가 포격 충격에 날아가 소나무에 꽂혀 있다./박종인
입력 2021.06.09 03:00
1989년 8월 13일 광주에서 태어난 서정우는 무탈하게 고등학생이 되었다. 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에 입학한 뒤 2학년인 2009년 대한민국 해병대에 입대했다. 2010년 11월 23일 근무지인 인천광역시 연평도에서 ‘민주주의’와 ‘인민’을 국명에 갖다 붙인 북한군 포격에 전사했다. 석 달이 지난 2011년 2월 어느 날 전사지를 순시하던 연평부대 신임 부대장이 언덕에 서 있는 소나무에 꽂혀 있는 독수리 모표를 발견했다. 서정우가 포탄에 맞던 순간 그가 쓰고 있던 해병대원 정모에서 튕겨 나간 모표였다.
1871년 6월 1일 강화도와 김포 사이 좁은 염하(鹽河)로 진입하던 미합중국 극동함대 모노카시호에 해협 양쪽 진지에서 조선 수군이 포격을 퍼부었다. ‘남북전쟁 때도 겪지 못했던’ 엄청난 포격에 미 해병대는 순식간에 위축됐으나 단 한 발도 모노카시호에 닿지 못했다. 사정거리가 짧았다. 게다가 조선군이 무장한 대포는 상하좌우로 포신이 움직일 수 없는 고정식이었다. 목표가 조준 거리와 위치를 벗어나면 무용지물이었다. 미 군함은 염하 초입 초지진을 포격으로 아수라장으로 만든 뒤 해병대가 상륙해 진지를 점령했다. 그때 미군 포격에 상처 입은 소나무 한 그루가 150년을 살아남아 지금도 초지진 성벽 아래에 서 있다. 근 150년을 격세(隔世)한 두 전투와 소나무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261. 연평 포격전 서정우 소나무와 강화도 신미양요 소나무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맑은 날이었다. 연평도 사람들은 바다로 나갔거나 밭으로 갔거나 갯벌로 나갔다. 선착장은 하루 두 번 인천에서 들어오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가운데 휴가를 떠나는 해병대 병장 서정우도 있었다. 서정우는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를 1년 다니다 입대한 광주 청년이었다. 제대 날짜가 12월 22일, 그러니까 꽉 찬 한 달밖에 남지 않은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반 민간인’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에게는 연례적인 한미 합동 훈련이 예정돼 있는 날이었다. 오전 10시 15분부터 연평부대는 K-9자주포와 105㎜ 견인포, 벌컨포 같은 복합화기 3960발을 발사하는 훈련을 했다. 훈련은 오후 1시 30분 무렵 끝났다.(옹진군, ‘연평도 포격사건 백서’, 2012, p73)
한 시간 뒤 또 다른 포성이 울렸다. 소리도 달랐고 방향도 달랐고 탄착 지점도 이상했다. 해상이 아니라 섬 안에 있는 마을이었다. 선착장에 있던 사람들이 연기를 보며 소리쳤다. “저거 누구 집 근천데...” 주민 김영순이 말했다. “밭에서 일하는데 포 소리가 엉뚱하게 들리는 거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마을이...” 포성은 끝없이 울렸다. 선착장에서 항구 건너 마을에는 검은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북한이 발사한 포탄 150여 발 가운데 60여 발이 섬 곳곳에 떨어졌다. 오후 2시 47분 연평부대는 K-9 자주포 80여 발을 북쪽 진지에 발사했다. 그리고 30분이 지난 오후 3시 12분, 이번에는 북한이 연평도 남쪽으로 20여 발 포탄을 발사했다.
면사무소와 우체국, 파출소가 정확하게 피격됐고 민가들도 불탔다. 뭍에서 들어와 부대 시설 공사를 하던 민간인 2명 그리고 ‘전사(戰士)’ 2명이 죽었다. 서정우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연평도 평화공원에 있는 하사 서정우(1989~2010) 부조상. /박종인
전사 서정우의 복귀와 죽음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주민들은 웅성대기만 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전사(戰士)’라고 부르는 연평도 군인들은 달랐다. 즉각 부대로 복귀했다. 말년 병장 서정우도 복귀했다. 휴가 전사들을 인솔한 부사관과 함께 서정우와 동료들은 부대 차량으로 연평도 안에 지정돼 있는 ‘핫포인트’로 이동했다. 핫포인트는 섬 안에서 각 부대와 최단 거리에 있는 고지대다. 차량에서 내린 군인들은 도보로 소속 부대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핫포인트에서 소속 중화기 부대로 복귀하던 도중 포격이 또 시작됐다. 부대 주변 산 곳곳이 불타고 있었고, 파편이 공중에 흩어졌다. 방공호로 대피하기 위해 길로 뛰어가는 순간 파편이 병장 서정우를 직격했다. 또 다른 전사인 일병 문광욱도 소속 부대로 복귀하던 중 가슴에 파편을 맞고 전사했다.
그날 오후 6시 32분, 당시 서정우가 사용했던 ‘싸이월드’ 게시판에는 서정우 친구가 쓴 포스트가 이렇게 남아 있었다. ‘정우야 방금 뉴스에서 들었는데 설마 너 아니지? 그렇지?’ 제대를 한 달 남겨놓은 말년 병장이었다. 시신은 그날 밤에야 모두 수습했다.
섬에 남은 흔적들
전쟁은 비극이다. 비극을 막으려는 존재가 군인이다. 전쟁을 막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그래서 평화를 지킨다.
연평도는 전쟁을 막기 위한 전쟁의 최전선이다. 북쪽 망향전망대에 오르면 황해도 소속 섬들이 보인다. 가장 가까운 석도는 거리가 3km다. 그 뒤로 연평도를 포격했던 황해도 개머리진지도 어슴푸레 보인다. 가운데 바다에는 검은 중국 어선들이 오간다. 남쪽에는 연평도 포격 사건 전사자와 제2 연평해전 전사자들을 기리는 평화공원이 있다.
연평도 공설운동장 외벽에 뚫린 포탄 흔적./박종인
마을 공설 운동장 외벽에는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다. 면사무소 옆 골목에는 그때 폐허가 된 민가가 안보 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연평도 포격전 당시 피격된 민가. 안보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박종인
연평도 포격전 당시 피격된 민가. 안보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박종인
연평도 포격전 당시 피격된 민가. 안보교육장으로 보존돼 있다. /박종인
포격 후 석 달이 지난 2011년 2월 연평부대 지휘관이 서정우 전사지를 찾았다. 그가 쓰러졌던 언덕배기 옆에 있는 소나무에 낯익은 금속이 꽂혀 있었다. 해병대원 정모에 붙어 있는 독수리 문양, 해병대원들이 ‘독수리 앵커’라 부르는 모표였다. 포탄 파편에 서정우가 피격되고 그 충격에 날아가 소나무에 꽂혀버린 것이다. 그제야 부대원들은 왜 부대에 보존돼 있는 서정우 정모에 독수리 앵커가 없는지 알게 됐다. 이후 연평부대는 옹진군과 협의해 소나무 모표 주변에 플라스틱 캡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동판과 안내판을 설치했다.
군인이, 전사가 전쟁에서 죽으면 영광이다. 그런데 그 영광이 극적으로 시각화돼 있는 소나무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운다. 왜 우는지, 다 큰 어른들이 왜 이 스물한 살 먹은 전사가 남긴 모표 앞에서 우는지 연평도에 가보면 안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종군 사진가 펠리스 비아토가 촬영한 광성보 전투 종료 직후 장면./폴게티 박물관
1871년 어재순의 죽음과 신미양요
150년 전 6월 1일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미군이 맞붙은 전투가 신미양요(辛未洋擾)다. 양국에 상처만 남긴 전투가 신미양요였다. 1871년 여름날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군은 실질적으로 참패했다. 통상을 요구하던 미군 또한 통상이 거부되면서 전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미국 극동함대는 674명이 승선한 사령선 콜로라도 호와 273명이 탄 알래스카 호를 비롯해 5척으로 구성됐다. 강화도 상륙용 병력은 보병대, 해병대와 포병대, 공병대, 의병대까지 12개 중대 651명이었다.(존 로저스, ‘조선 요새 함락 보고서’, 1871)
이미 1866년 프랑스군과 병인양요를 치를 당시 대원군 정부는 나름대로 군비를 강화했지만 비근대적이었고 따라서 역부족이었다. 조선군은 한여름에 ‘아홉 겹 솜으로 누빈’ 방탄복 면제배갑(綿製背甲)을 착용했고, 방탄복은 강선을 타고 날아오는 미군 소총 탄알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누비솜을 뚫지 못한 일부 탄알은 솜 속에서 발화해 조선 전사들을 끔찍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강화도 최전방인 초지진은 미 해병대가 쏴대던 곡사포에 무기력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에 진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아수라장이 된 진지 속에서 화승총에 불을 붙이지 못한 조선군은 성벽 위에서 적을 향해 제대로 조준사격도 하지 못했다.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이미 전세는 절대적으로 미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강화도 최전방 초지진이 그렇게 뚫렸다. 다음 부대인 덕진진은 무혈 점령됐다.
다음 방어선인 광성보는 ‘장엄하고 처절한 조선군의 전멸’ 현장이었다. 그때 광성보에 달려온 사람이 당시 사령관 어재연의 동생 어재순이었다. 벼슬과 상관없이 살던 동생에게 군인인 형이 거듭 묻는다. “벼슬 하지 않는 선비로 어찌 여기 있느냐?” 동생이 이리 대답한다. “충성에 귀천이 없고, 형님이 살아나올 길 없는 곳에 있는데 홀로 갈 수가 없다.”(‘어재순 행장’) 모두 죽었다. 처참하되, 미군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영웅적으로 죽어갔다”고 기록한 장엄한 죽음이었다.(미 해군 소령 윈필드 슐리, ‘성조기 아래 45년’, 1904, p95) 초지진에 있는 늙은 소나무에는 그때 미군의 포격에 맞은 흔적이 남아 있다.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첫 교전을 한 강화도 초지진./박종인
강화도 초지진 소나무에 있는 신미양요 미군 포격 흔적. /박종인
잊힌 전쟁, 잊혀가는 역사
‘바다의 경계가 편치 않아서 봉화 연기가 여러 번 경계를 하나 나라에는 막아낼 계책이 없으니 여기에 미쳐 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다.’(‘어재순 행장’) 1871년에는 그랬다. 국경을 이양선이 수시로 침범하는데, 나라에서는 막을 힘이 없었다는 뜻이다.
병인양요 이듬해인 1867년 대원군은 덕진진에 경고비를 세웠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바다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타국 배는 통과 금지)’라고 새겨져 있다.
강화 덕진진에 있는 외국 선박 경고비. /박종인
글자 몇 자 새긴 돌덩이로 관문이 지켜지는가. 역사를 상기하는 이유는 실천적 교훈을 삼기 위함이다. 정신적 승리감으로 포장해버린 군비(軍備) 소홀로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안다.
비석이 서 있는 덕진진은 미군에 의해 무혈 점령됐다. 신미양요 첫 전투 현장인 초지진은 4년 뒤인 1875년 12월 일본 군함 운요호와 상륙선 이렇게 딱 두 척에 초토화가 됐다. 1873년 친정을 선언하고 아버지 대원군을 퇴출시킨 고종이 강화도 주력 부대인 진무영을 예산과 병력과 무기까지 감축해버린 결과다. 기억이 희미해지면 추억도 없고 역사도 없고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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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포격전 또한 기억이 희미해진다. 지난주 현충일 때도 국가지도자는 연평해전, 연평도 포격전과 천안함에 대해 침묵했다. 전직 여당 부대변인이라는 인물은 천안함에 대해 “생때같은 부하들을 수장시키고 함장은 승진했다”고 선언했다.(변호사 조상호, 2021년 6월 7일 채널A ‘뉴스톱10’) 이게 나라다. 연평도 소나무에 꽂힌 병장(하사 추서) 서정우 모표 앞에서 울 이유가 참 많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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