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나호열의 시창작론

새로운 시는 어디서부터 출발할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25. 15:45

 

새로운 시는 어디서부터 출발할까?

나호열

 

새로운 작품을 한자로 쓰면 신작 新作이 될 것이다. 이 신작이란 오늘 막 출하된 신선한 빵이나 우유처럼 규격화 規格化되고 균질 均質된 제품이란 뜻이 아니라 이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물 生物의 출현이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나 기성시인을 불문하고 이 생물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은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고정관념을 쉽게 이야기해서 상식常識이라고 바꿔 불러도 무방하겠다. 고정관념이나 상식은 앞에서 말했듯 규격화와 균질의 생각을 말한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 인생은 무상하다. 꽃이 아름답다. 부귀영화가 덧없다. 마음을 비우자” 등등의 문장은 우리 삶의 진리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지만 자신이 체득하지 않았다면 전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상식화된 진리를 독특한 시법으로 깨닫게 하는 것도 새로움의 영역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는 있다. 말하자면 행과 연의 정형을 벗어나 언어의 새로운 꾸밈을 통해 신선함을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등을 구부리고

세수한다. 물로 얼굴 적시고 거울 보

면 물 묻은 얼굴이 보인다. 수건으로

닦고 나온다.

 

- 이승훈의 「가을 아침」 (『시인동네 2013 여름호』)

 

이 시는 우선 시각적으로 형태상의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있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등을 구부리고 세수한다. 물로 얼굴 적시고 거울 보면 물 묻은 얼굴이 보인다. 수건으로 닦고 나온다.”로 나열하면 세 개의 문장으로 확연히 드러날 것을 일부러 우리의 읽는 습관을 슬쩍 비껴나간다. 세수와, 거울보기, 수건으로 얼굴 닦기의 세 가지의 동작은 의식하지 않은 채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들이다. 세수하기 위해서 필요한 등을 구부리는 일, 세수가 끝나고 얼굴을 보는 일, 그 얼굴을 닦는 일의 동작을 의식적으로 행갈이의 어긋남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일말의 당혹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이 시를 순식간에 읽고 난 후의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시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가볼까 기대했던 독자들에게 시인은 낄낄대며 조롱을 던질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는 너는 왜 고개를 숙이고 세수를 하지? 세수는 꼭 해야 해? 물 묻은 얼굴을 닦지 않는다고 두드러기라도 나나?

시인은 평범한 동작을 비튼 행갈이를 통해 시각적 당혹감을 일으키고 두 번째로 이 동작들의 의미를 휘발시킨다. 이쯤에서 시의 제목이 ‘가을 아침’ 인 것을 상기해 보자. 가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청명함, 결실, 맑음 등등의 이미지로 기울 것이다. 가을은 소멸로 가기 전의 마지막 화려한 제례이기도 하다. 인생의 가을이 올 때까지 우리가 수없이 반복하는 세수하는 일, 시인은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위장僞裝과 가장假裝을 아무렇지 않게 예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의 형태상의 새로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풍경이나 사건의 세밀한 분석을 일상언어의 미적 조형을 통해 보여주는 새로움도 있다.

 

멈춘 듯 움직이는 동작 다리를 꼬고 가랑이를 찢는다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숨 막힐 듯 고운 뒤태 굽힐 때마다 가슴골 드러날 듯 말 듯 치골에 걸린 반바지 적당히 살이 오른 허벅지로 사뿐사뿐 쿵쿵쿵 지지고 볶는 고양이 혹은 노루

 

선암사 승선교 같은 허리 휘어 차안과 피안에 걸친 후

 

흡,

 

들숨과 날숨 사이 반짝반짝 개울을 거슬러 오르는 버들치 한 마리

 

나는 숨을 죽인다

 

첫눈처럼 상큼한 아이스크림 절로 넘어가는 열대과일주스 안개와 일대일로 혼합한 물방울시럽 시큼달큼 블랙베리 담은 주머니 꽉 쥐었다 놓으면 주르륵 흘러내리는 즙 살살 뿌린 낙엽살 상추에 입이 터져 나가도록 씹으며

 

스르르 잠에 빠진다

 

- 고성만의 시 「요가 하는 여자」(『미네르바』 2013년 여름호)

 

이 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행과 연의 관습적 사용을 탈피하여 시각적인 새로움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거나 삶의 가치를 모색하는 사유의 표현이 아닌,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묘사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요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요가가 얼마나 가치 있는 행위인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요가 하는 그 장면에서 분출되는 정서를 세밀한 묘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1연은 일련의 요가 동작의 연속적 장면을 묘사하기 위하여 산문의 방식을 택한다. 2 연은 유연한 동작을 강조하기 위하여 차용한 홍예교와 휴지 休止의 순간을 ‘차안과 피안에 걸친 후’ 로 표현하고 동작과 동작 사이의 시간적 흐름을 연 띄우기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요가 하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을 미각적 표현으로 마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스스르 잠에 빠질 만큼 고혹적인 ‘요가 하는 여자’와 화자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객관적인 까닭에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아래와 같은 정서를 체감하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게 된다.

첫눈처럼 상큼한 아이스크림 절로 넘어가는 열대과일주스 안개와 일대일로 혼합한 물방울시럽 시큼달큼 블랙베리 담은 주머니 꽉 쥐었다 놓으면 주르륵 흘러내리는 즙 살살 뿌린 낙엽살 상추에 입이 터져 나가도록 씹으며

 

이와 같이 시에서의 새로움은 주제나 소재의 새로움이 아니라 주제와 소재를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배양하는데서 출발한다. 물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른바 난해시라고 일컬어지는 언어 자체의 낯설음을 지향하거나, 의식 저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해체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조류가 있음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째든 새로운 시를 향한 시인의 열망은 고정관념의 탈피, 이른바 ‘낯설기 하기’의 생활화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낯설기 하기’는 관념이든 사건이든 간에 시적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기법을 연마하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공력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성질이

둥글둥글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허리가 없는 나는 그래도

줄무늬 비단옷만 골라 입는다

마음속은 뜨겁고

붉은 속살은 달콤하지만

책임져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배꼽을 보여주지 않는다

목말라 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다

겉모양하고는 다르게

관능적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오장육부를 다 빼 주고도

살 속에 뼛속에 묻어 두었던

보석까지 내 놓는다

 

- 윤문자 「수박」

 

위의 시는 수박의 외형과 성질을 익살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이미 우리가 체득하고 있는 시각적, 미각적 상식을 의인화 하여 교훈적 의미도 더해주고 있다. 독자들은 수박과 여자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객관적 묘사가 더 이상의 미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 객관적 묘사가 자칫 고정관념이나 상식으로 빠져들 위험도 상존하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이나 상식은 새로운 시를 쓰기 전에 반드시 배제하여야 할 난관이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방법 하나를 예로 들자면, 먼저 질문을 던져 보세요. 자신이 아는 색깔을 몇 개인지 쭉 적어보라고 한다면 얼마나 적을 수 있을까요.내가 어느 미술대학에서 특강을 할 때 물어봐도 오십 개 정도가 거의 최고의 답변이었습니다. 배운 지식대로 생각하면 보통 스무 개 서른 개밖에 못 쓰는 것이지요. 빨강 파랑 노랑 식으로 색환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되면, 우리나라 옛날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하듯이 감자보고 감자빛, 고구마 보고 고구마빛, 이런 식으로 모든 사물에다가 빛만 붙이면 색채 수가 수백 개 수천 개로 바뀔 수 있지요. 우리가 어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정신, 제정신을 차리자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창작의 과정을 체계화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 작품이 내용에 따라 그에 걸맞은 형식을 창출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그 내용이 우선하기 때문이지요.

 

- 「평생을 시로 살았던 삶- 나의 인생 나의 문학」, 박제천, (『월간문학』 2013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