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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와 서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6. 9. 14:11

 

향교와 서원

 

한상권(덕성여대) 2010.11.12

Ⅰ. 향교

1. 조선의 교육정책

2. 향교 역할의 변질

 

Ⅱ. 서원

1. 16세기를 보는 관점

2. 16세기 사회의 특징

3. 서원의 등장과 발달

4. 서원의 폐단과 철폐

 

 

 

Ⅰ. 향교

 

1. 조선의 교육 정책

 

1- 1. 수령 교과에 새롭게 포함된 학교흥 學校興

 

조선 왕조는 유학을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아 숭유억불 정책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유교 이념의 확산 보급과 관련하여 수령의 勸學기능이 중시되었다. 그 결과 수명학교 修明學校가 수령칠사 守令七事에 포함되어 학교 교육이 수령 고과 考課의 주요 기준이 되었다.

 

1 -2. 서울의 사부학당과 지방의 항교

 

조선신대 교육제도에서 官學은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중등 교육기관인 중앙에 사부학당(四學: 중․동․서․남학)과 지방에 향교가 있었다. 사학 私學은 중등 교육기관인 서원과 초등 교육기관인 서당이 있었다. 향교는 양반과 양인을 불문하고 서당을 거친 자제들을 교생으로 받아들여 과거 시험에 대비하고 유학의 소영을 갖춘 선비를 길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운영하였다. 세종 조부터는 500호 이상의 군현에 향교의 교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함으로서 향교 교육의 강화와 함께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균일한 확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1- 3. 군현제도의 확립

조선에 이르러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면서 지방제도가 정비되었다. 제일 먼저 지방민을 일반과 특수를 구분하는 지배방식이 폐지되었다. 향,소, 부곡 등의 특별 영역을 혁파해서 주, 부, 군, 현으로 全一化 한 것이다. 그리고 주현- 속현제도 역시 폐지되었다. 도 아래 형세와 중요성 등을 고려해서 설정한 주, 부, 군, 현이 병렬적으로 편성되었으며, 속현 屬縣제도 등이 폐지되어 모든 고을에 수령이 파견되었다.

 

1- 4. 일읍일교 一邑一校의 원칙

백성들을 교화하고 유학의 소양을 갖춘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여 향교의 체제의 정비는 세종 때까지 진행․ 강화되었다. 세종대에는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설치하고 교육 문화적 기능을 대폭 강화하였다.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을 모든 백성에게 보급시키기 위한 일읍일교 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당시 전국 329개 고을에 향교가 건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향교 역할의 변질

 

2- 1. 서원의 등장과 향교의 쇠퇴

조선시대 향교는 지방민의 교화를 담당하면서 향촌사회를 운영하는 등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나 15세기 후반들어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문묘에 제사지내고 사회 교화를 담당하는 곳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또한 私學인 서원의 숫자가 크게 늘면서 상대적으로 침체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2- 2. 양인의 入校와 양반의 기피

 

16세기 들어 양반 중심의 신분질서가 자리 잡으면서 초반부터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부유한 양인들이 교생으로 들어가 교생의 수가 크게 늘어나서 향교의 교육기능이 정상적으로 발휘되지 못하게 된다. 향교의 교생은 군역에서 혜택이 있기 때문에 양인들은 기를 쓰고 교생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며, 양반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향교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후 교생의 사회적 지위가 떨어지고 향교의 교육기능 또한 현저히 쇠퇴하고 서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자 지방관도 향교를 통한 지방 교육에는 무관심하게 되었다. 더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하여 대부분의 향교가 불타 없어지게 되면서 향교의 피폐는 극심하였다.

 

2- 3. 임란 이후 혁파된 교관 파견제도

 

17세기 중엽 이후부터는 전국의 대부분 지역이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자치적이고 사학적인 교육체제가 향교를 중심으로 하는 관학제도를 압도하게 된다. 향교에서 교육이 지속적으로 실시되지 못하는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 인조 연간에 이르러 중앙에서 교관을 파견하는 제도가 혁파되어, 유생들을 교육시킬 교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유생들이 향교에서 기숙하며 수학하여야 했는데, 향교에 대한 지원이 크게 부족하여 이들의 거접 居接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4. 달라진 양반 출신 유생 儒生 지위

 

조선 후기에 향교가 교육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자 자연히 향교에 들어오는 유생이나 교생 校生이 그 이전과는 크게 달랐다. 우선 유생을 보면, 조선 후기 대부분의 향교에서는 천거를 통하여 유생을 선발하였으며, 그 시기는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 후였다. 그것은 그 고을의 유생들이 석전제를 지내기 위해 거의 모두 향교에 출석하였으며, 그래서 그 직후에 의례적으로 일종의 유생 정기총회를 개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 유생들이 후보자의 선발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유요한 기준은 후보자의 기문이 어떠한가, 즉 벌족 閥族이냐 아니면 한족 寒族인가였다. 이와 같이 학문에 대한 열의나 성취도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출신 가문이나 신분만을 따져 유생을 선발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이로 인하여 지적 수준이 점차 낮아졌다.

 

2- 5. 평민 출신 교생 校生의 역할

 

평민 출신 교생들을 보면, 이들은 처음부터 향교에서 수학하기 위해 선발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들이 향교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첫째, 이들은 향교에서 돌아가며 숙직을 해야 했다. 둘째, 이들은 향교나 제단 祭壇에서 올리는 각종 제사, 즉 석전제, 삭망제, 여제 및 사직제 등을 주관하여 치렀다. 셋째,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객사로 나아가 왕에게 하례하는 망궐례를 집례 執禮했다. 넷째,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사문 赦文 반포의식을 주관해 실시해야 했다. 한마디로 고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제사와 각종 의례를 교생들이 주관하였다.

 

2- 6. 제향을 통한 교화기능을 담당

 

교육기능이 쇠퇴한 향교는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 향교가 존속하게 된 유일한 이유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행사가 석전제 釋奠祭다. 석전은 원래 산천이나 묘사 廟社또는 학교에서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올리던 제사의식을 말한다. 석전은 봄, 가을인 음력 2월과 8월 첫 정일 丁日에 올리기 때문에 정제 丁祭 또는 상정제 上丁祭라고도 한다.

 

Ⅱ. 서원

 

1. 16세기를 보는 관점

 

1- 1. 전후기론

 

16세기와 17세기를 성격이 다른 사회로 보는 입장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사회가 크게 변했다고 보아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양분한다. 16세기는 조선 전기의 끝이며 17세기는 조선 후기의 시작으로 보는 입장이다. 즉 16 - 17세기를 연속된 사회로 보는 입장이다.

 

1- 2. 조선중기론

16- 17세기를 연속으로 보는 입장이다. 임란이 사회에 주는 충격은 컸지만 시기를 구분할 질적인 변화를 준 것은 아니다. 임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16세기부터 17세기 후반까지는 양반사족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공통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사회 지배층이 변화가 없었고 정치운영 방식도 붕당정치가 지속되는 등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1- 3 사화와 당쟁

 

1-3-1. 사화는 새로 성장하는 재지지주층인 사림이 중앙무대에 진출하여 훈구와 대립하면서 일어난 정치적 갈등이다. 16세기 사회 변동이 4대 사화(무오, 갑자, 기묘,을사)의 발생으로 나타났다. 사화는 새롭게 발생한 사회적 재부 財富를 둘러싼 훈구의 비리에 대한 공익을 앞세우는 사림과의 갈등이다.

 

1-3- 2. 당쟁은 사림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 나타나는 정치현상이다.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정치를 당쟁이 아니라 건전한 정치이념을 공통적으로 지향하면서 상호간의 공존을 인정하는 붕당정치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 16세기 사회의 특징

 

2- 1. 지방사회의 성장

 

16세기 조선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방사회의 성장이다. 따라서 조선전기사회를 이해하는데 지방에 기반을 둔 양반세력인 재지사족의 성장 과정을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재지사족들은 적극적인 농업 경영을 통해 경제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한편, 과거를 통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고, 재야에서는 향약 실시 등을 통해 사족 중심으로 향촌 질서를 재편하고, 성리학을 매개로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들 재지사족의 성장을 통해 양반지배체제의 형성, 성리학의 정착, 사림정치의 전개와 같은 조선사회의 주요한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2- 2 향촌 자치질서의 확립

 

사림세력의 향촌질서 확립운동은 사창제 社倉制 , 향사례 鄕射禮, 향음주례 鄕飮酒禮, 향약 鄕約 등이었다. 사림세력들이 이들은 제도적으로 정착시킴으로서 향촌사회를 장악하려함에 따라 중앙권력을 장악한 훈구세력과 끊임없이 마찰이 일어났다. 이러한 갈등을 여러 차례 겪은 끝에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서원이었다. 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 교육과 교화를 표방하였기에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 견제를 덜 받을 수 있었다. 서원은 사림세력들의 향촌지배체제 확립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하였으며, 16세기 중엽 서원의 등장한 사림세력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2- 3 경향 京鄕의 미 분리

 

18세기 이후 도시가 발달하고 상업문화가 등장하면서 서울과 지방이 분리되는 경향분리 京鄕分離의 현상이 나타난다. 서울과 지방이 분화되는 양상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경화벌열 ( 京華閥閱: 산림과 외척의 결합으로 나타난 특권적 정치집단)이 형성되면서 권력이 서울로 집중되었다. 또 하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서울의 상업이 발달하며 서울의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변화에 기초하여 경화사족 京華士族이 형성되어 서울과 지방의 사상․문화가 분기 分岐하였다. 18세기의 역사상은 정치권력과 경제적인 부가 서울로 집중되며 서울과 지방 사이의 정치․경제․문화적인 격차가 심화되는 양상으로 집약된다. 지방의 배제와 소외가 18세기 역사의 특징인 것이다. 반면 16 -17세기는 서울과 지방 즉 경향 京鄕의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으며, 재지사족이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권 즉 향권 鄕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3. 서원의 등장과 발달

 

3- 1. 배향 기능으로 출발

 

조선에서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중종 38년 (1543) 주세붕에 의해 건립된 백운동 서원이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곧바로 서원건립에 착수하였다. 그는 사원 건립의 동기로 교화를 내세웠으며, 교화는 반드시 존현 尊賢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하고, 풍기의 교화를 위해서 이 지역 출신인 안향을 모시는 사묘 社廟와 유생들의 장수 藏修를 위한 서원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요컨대 그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교화라고 인식하였으며, 이것이 서원을 세우게 된 동기라고 한 것이다. 백운동서원은 처음에는 안향 등 선현을 받드는 것이 중심 기능이었다. 주세붕의 서원 건립과정에서 주목되는 점은, “사묘가 없으면 서원이 될 수 없다.”는 그의 말처럼 사묘와 서원이 별개로 간주되었고, 독서 讀書처인 서원은 존현 尊賢처인 사묘에 부수적인 존재에 그쳤다는 점이다.

 

3- 2. 사액서원의 등장

 

백운동서원은 숭유억불의 효과를 얻기 위해 폐사 廢寺화 되어 있었던 숙수사 宿水寺 터에 설립하였다. 백운동 서원이 건립된 지 6년 후인 명종 4년 (1549)풍기 군수 이황이 사액 賜額을 청하여 소수서원 紹修書院이란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서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이라는 국가가 공인하는 교육기관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서원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사액서원은 국왕으로부터 서적을 하사받았고, 노비와 토지를 지급 받는 등 여러 가지 이익이 있었다.

 

 

3- 3 소수서원의 건물 배치

 

소수서원의 배치를 보면 서원이 갖추어야 할 최초의 기능인 강당, 사당, 기숙사, 장판각 등은 구비되었지만 이들 사이의 규범적인 질서를 찾아내기는 무척 어렵다. 강당인 명륜당의 명칭은 향교 건축의 것을 그대로 가져 왔으며 일정한 중심축이나 영역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여러 건물들이 산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3- 4. 유생의 장수 藏修처로 변화

 

백운동 서원 이후 서원은 명실상부한 유생의 장수藏修 및 강학소로 발전하였는데, 서원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활성화되는데에는 퇴계 이황(1501 - 1570)의 노력이 컸다. 조선의 서원은 퇴계에 의해서 사림 士林의 학적 기반으로 정착되고 이후 보급 확산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퇴계는 서원이라는 새로운 학제를 통하여 종래의 과거와 관련된 출세주의․공리주의(= 爲人之學)가 아닌 참다운 성리학의 토착화를 기대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이 시기 가장 시급한 과제인 사림의 사습 士習과 사풍 士風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爲己之學〕. 퇴계의 서원창설운동은 당시 사람들의 참다운 공부를 위한 환경조성운동이었다. 퇴계에 의하여 서원은 사림의 강학, 장수처로서 그 성격이 분명하게 되면서 사림세력의 향촌활동에서의 중요한 기반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3- 5 서원의 발달

 

사림세력의 성장과 함께 등장한 서원은 이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중종 대 이후 명종 대까지 세워진 퇴계 주도하의 초창기 서원은 집권 훈구파의 견제 속에서도 교육기관임을 강조하면서 계속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이후 사림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선조 대에 오면 서원은 명종 대에서의 일정한 제약에서 벗어나 사림의 활동기반으로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된다. 서원의 수는 16세기 후반 사림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면서 급증하여 17세기 후반에는 200여개에 이른다.

3- 6 서원과 붕당정치

 

서원의 발달은 붕당정치의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6 - 17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서원 건립은 공론 公論을 바탕으로 해야 하였고, 제향인 祭享人도 도학자나 유현 儒賢이 아니면 어려웠다. 17세기 중엽이후 서원은 사림의 공론에 의한 붕당정치 실현의 기반이 되었다. 붕당 자체가 학파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기 때문에 자파 세력을 확대해 가기 위해 성리학 이론을 열심히 연구해야 했다. 이 연구를 위한 장소가 서원이 되었고 그래서 서원이 급증했다. 현종 숙종 대의 예송 논쟁을 비롯한 붕당정치의 전개는 바로 이 서원에 토대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서원의 건립도 이 시기에 가장 할발하였다.

 

4. 서원의 폐단과 철폐

 

4- 1. 서원 남설 濫設

 

서원의 폐단은 17세기 말인 숙종 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붕당정치의 운영원리가 잘 지켜지지 않은 데서도 기인한 것이다. 상호간의 붕당을 인정하지 않는 극한대립을 벌이면서 자파의 세력 확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다 보니 서원을 마구 건립하는 남설濫設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탕평정치는 사대부들을 관료체게 속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사대부들이 주체가 된 붕당정치를 넘어서 국왕 중심의 정치체계인 탕평정치가 대두하면서 서원의 남설에 대한 제동이 걸렸다.

 

4- 2. 서원 첩설 疊設

 

서원을 설립하려면 유림에서 인정할 만한 성현을 봉향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의 성현들을 모두 통틀어도 그만한 숫자의 인물을 찾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자연히 한 인물이 여러 곳의 서원에 봉향되는 이른바 ‘첩설疊設’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인 퇴계는 전국 31개소의 서원에, 우암 송시열은 26개소에, 율곡은 21개소에 첩설되었다. 심지어 중국의 주자도 20여 개소에 봉안되는 형편이었다.

 

4- 3 사우 祠宇 건립

 

서원은 17세기 후반 이후 특히 숙종 대를 분기점으로 당파적인 서원의 건립이 확산되면서 제향인물의 기준이 모호하여지고 도학 道學․ 유현 儒賢을 제향하는 서원보다는 기절 氣節이나 행의 行誼를 실현한 인물들이 대거 제향되는 사우 祠宇의 건립이 일반화된다. 이러한 추이 속에서 시조 始祖나 원조 遠組․ 입향조 入鄕組․ 파조 派組․ 중시조 中始祖․ 현조 顯祖등 문중적 門中的 인물의 제향도 보다 용이하여졌다. 각 가문은 자기 가문의 위세를 높이기 위해 자신의 조상들을 서원에 배향하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공론을 통해 객관적으로 공인받는 선현들을 모시고 공부하는 서원 본래의 기능은 퇴색하고 가문의 조상을 사사로이 배향하는 곳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4- 4 문중서원 등장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향촌사회에 문중기반을 마련한 문중세력들은 거의 빠짐없이 경쟁적으로 서원이나 사우를 건립하였고, 만약 그러한 조건이 마련되지 못한 경우는 비슷한 조건의 몇 개 문중이 협력하여 서원을 건립하거나, 기존 서원에 추배 제향의 길을 모색함으로써 서원을 통해 향촌사회 운영에 참여하고 영향력 행사를 꾀하게 되었다. 서원의 성격이 문중을 기반으로 하는 문중서원 門中書院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자연히 ‘향사 대상자는 사문 유공인이 아니어도 좋다’는 펀의주의적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다. 자기 가문 조상들의 공적을 과장하거나 조작하여 서원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이 제대로 될 까닭이 없었다. 자연히 서원의 중심 기능은 교육에서 제향으로 흐르게 되고, 지방민에 대한 착취와 당쟁의 근거지로 전락하였다.

 

4- 5. 탕평군주의 서원 통제

 

영조 17년(1741)에는 173 개의 서원을 철폐한 일도 있다. 그 뒤 서원의 남설 경향은 줄어들었으나 폐단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들어오면서 서원이 세도정권의 세력기반이 되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

 

4- 6. 대원군의 서원 철폐

 

세도가문과의 경쟁 속에서 권력 장악에 성공한 대원군은 나름대로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그의 개혁정치의 기본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복구하는 것으로, 앞선 시기 정조의 정치를 모델로 한 것이다. 대원군은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폐허로 남아있던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흐트러진 중세 질서를 복구하기 위해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을 편찬하였다. 1865년 만동묘 萬東廟 철폐하고, 1871년 사액서원 47개만 남기고 600 여개 서원 철폐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세력 지지 기반을 해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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