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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앞잡이였던 종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4. 14. 16:39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던 종교 남경태의 종횡무진사 2012.04.13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던 종교
고객을 잃으면 어려움에 빠지는 것은 시장이나 종교나 마찬가지다. 종교개혁 이후에 신교에 교인을 빼앗긴 구교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항로 개척에 가담했다. 그런데 동아시아는 강력한 중앙집권제여서 포교가 쉽지 않았다. 차선책이 선교사를 파견해 온건한 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의도야 어찌되었든 침략의 앞잡이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대원군이 기독교인을 학살한 것은 큰 잘못이었으나 기독교를 제국주의적 침략과 연관시킨 판단은 옳았다.
지금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절두산에는 독특한 기독교 성지가 있다. 성지가 조성된 배경은 매우 비극적이다. 1866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병인양요가 벌어진 뒤 흥선대원군은 기독교가 서양 세력의 침략에 선봉 노릇을 했다고 여겨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그로 인해 수천 명의 기독교도들이 절두산에서 처형되었다. 당시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로 더럽혀진 한강을 사교 무리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는데, 과연 양화진 부근의 강물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 만큼 끔찍한 학살이었다.


대원군은 기독교를 서양 세력과 연결해서 보았다

신·구교의 시설물이 한 곳에 공존하는 절두산 성지
100년이 지난 1966년 그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지금의 절두산 성지가 생겨났다. 그런데 절두산 성지의 특징은 그 학살극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천주교 기념관과 개신교 선교사의 묘지가 함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890년대부터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를 안장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약 400여 기의 무덤이 있는 묘역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신?구교의 시설물이 한 곳에 공존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대원군이 학살한 기독교도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천주교도였다. 그 참극이 벌어진 뒤 대원군이 실각하고 쇄국정책이 풀리자 1880년대부터 미국의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왔다.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 성결교 등 개신교의 다양한 종파에 속하는 선교사들은 노골적인 포교보다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등 근대화에 기여해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얻었는데, 그 덕분에 원래 의도했던 교세 확장에 성공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방대한 개신교 세력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에는 천주교가 먼저 전래되고 이후 개신교가 들어와 공존하는 형세를 이루었는데, 신·구교가 엇비슷한 비율을 유지하는 것도 세계적으로 드문 현상이다. 사실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도 필리핀처럼 기독교라면 곧 가톨릭을 지칭했을 것이다. 근대에 동양 세계로 밀어닥친 기독교는 구교, 즉 가톨릭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적 계기가 있다.

게시판 역할을 하는 교회 대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붙이는 루터

기독교와 제국주의적 침략의 연관성
비록 학살극을 저지른 것은 큰 잘못이었으나 기독교를 제국주의적 침략과 연관시킨 대원군의 판단은 옳았다. 그 뿌리는 멀리 16세기 초 종교개혁 시기의 유럽으로 거슬러간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의 대문에 면죄부 판매를 비난하는 95개 조 반박문을 내건 사건에서 발화한 종교개혁의 불길은 삽시간에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그로 인해 16세기 내내 유럽 각지에서 교회와 군주가 대립하고, 군주들끼리 싸우고, 군주와 신민들이 알력을 빚으면서 복잡한 종교전쟁이 전개되었다. 이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은 역사적으로 중세를 완전히 끝장냈고 근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문제는 가톨릭이 유럽에서 세를 크게 잃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남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해당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은 여전히 가톨릭의 본산이었으나 프랑스는 지배층만 가톨릭이었고 북독일과 중부 유럽, 네덜란드, 플랑드르, 스칸디나비아는 모조리 신교로 돌았다. 잉글랜드는 별도의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도 구교도 아닌 영국교회를 창설했다(이 때문에 잉글랜드에서는 정권에 따라 신교와 구교가 번갈아 탄압을 받는 묘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신교 탄압 시기에 일부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가 미국 건국의 기반을 닦았다).


중국 복식을 한 마테오 리치

항로 개척은 가톨릭 확산의 밑불
고객을 잃으면 힘들어지는 것은 시장이나 종교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종교계도 시장처럼 마케팅 전략을 바꾸고 새로운 고객층을 창출해야 한다. 신교가 신흥 백화점이라면 구교는 백화점에 고객들을 대거 빼앗긴 재래시장과 같은 처지였다. 이래저래 구교는 유럽 바깥에서 새 고객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대외 진출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계기가 생겨났다. 15세기에 약 800년에 걸친 오랜 아라비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유럽 기독교권에 막내로 합류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항로 개척에 나선 것이다.

지중해 항로를 북이탈리아가 장악한 상황에서 수지맞는 동방 무역에 참여하려면 아프리카를 돌거나(포르투갈), 대서양을 서쪽으로 계속 항해하는 길(에스파냐)밖에 없었다. 이 두 이베리아 국가의 무역 활동에 힘입어 유럽에서 힘을 잃은 가톨릭은 일약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서쪽으로 간 에스파냐는 아메리카를 가톨릭권으로 만드는 데 선봉을 맡았다. 신대륙의 소규모 문명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에스파냐 정부는 신대륙으로 가는 상선에 사제들을 태워 방대한 신세계에 가톨릭을 마음껏 전파했다. 고사 직전의 유럽 가톨릭 세력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이 전부 가톨릭인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유라시아 동쪽의 아시아는 아메리카와 같은 약소 문명권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강력한 전통을 가진 문명권이었으므로 가톨릭의 시장 개척 전략도 달라져야 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의 로욜라가 조직해 로마 교황의 승인을 얻은 예수회다. 이들은 군대와 같은 조직력으로 가톨릭의 세계적 확산에 주력했는데, 중국 명나라에 온 마테오 리치나 일본에 가톨릭을 전래한 포르투갈 사제들이 바로 예수회 소속이었다.

가톨릭 선교사는 부지불식간에 침략의 길을 닦아
때마침 18세기부터 유럽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시대를 맞아 제국주의 노선으로 전환했다. 아메리카는 무력으로 뒤집어엎은 뒤 유럽 문명을 통째로 이식할 수 있었으나 동아시아는 강력한 중앙 집권형 국가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환경이 크게 달랐다. 그래서 유럽 제국주의 세력은 선교사들을 파견해 일단 현지에 정착시키고 정보를 입수한 뒤 동양에 진출하는 세련된 전략을 구사했다.
물론 순수한 포교의 열정에 불탄 사제들도 있었겠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동양으로 진출한 가톨릭 선교사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또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 중국에 도착한 그들이 중국어와 현지 생활 풍습을 익히고 중국에 서양의 과학과 문물을 전한 것은 의도적으로, 혹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길을 닦은 셈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명나라 관리였던 서광계에게 가톨릭을 전했고, 서광계가 쓴 책을 통해 조선의 이벽이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며, 이벽을 통해 정약전, 정약용 형제 같은 조선의 초기 천주교도가 생겨났고 이승훈이 최초의 세례를 받았다. 이런 과정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융성하게 된(아울러 역대 대통령의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인)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 근원은 멀리 유럽에서 종교개혁으로 교세를 잃은 가톨릭 세력의 자구책이었으며,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이자 종교적 마케팅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