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신춘문예 당선시

문화일보 2026 신춘문예 당선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1. 20. 10:07

가뭄

유주연

햇볕이 산등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새들은 마른 낙엽 밑으로 고개를 집어넣고 있었다

항아리는 토방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마른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의 가슴도 조각나고 있었다

대답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새는 그들의 마른 처소에서 울고 사람은 제단 아래에서 멍해지고 있었다

텁텁한 입과 질어진 머리 안팎으로 미처 울음이 되지 못한 슬픔들이 무음으로 울고 있었다

빛은 점점 옅어졌고 대지는 뜨거워졌으나 흙은 짙어지고 퍼즐처럼 갈라졌으나 몸들은 결코 따뜻해지지 않았다

영혼들은 스스로 자기를 먹으며 버텼다

때로 단지 마른 고기와 치즈가 그려진 금빛 액자틀 아래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없는 목소리로 벙어리처럼 호소하고 있었다

햇볕이 산등 뒤로 또 다시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완전히 넘어가지 않고 넘어가고만 있었다

가뭄이었다

가뭄이었고

가뭄이었다

새들의 눈물이 낙엽을 적시고 있었다

사람의 모은 손이 신앙을 넘어가고 있었다

결정적 형태가 주어지지 않았다

가뭄이 깊어지고 피가 굳어가고 식량이 가루가 되어가고 있었다

<시 당선소감-유주연>

유주연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시에서 위로를 구합니다. 저 역시 제가 보지 않으려던 제 안의 어둠과 마주칠 때마다 시를 찾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위로’로 부르는 그 말이 가리키는 것이 정말로 시의 자리일까요? 위로란 과연 무엇일까요.

캐나다의 정치인이자 사상가 이그나티에프는 한 저서에서 ‘시편’을 인용하며, ‘위로’란 나 자신과 내 삶의 맥락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그 장면을 전체로 다시 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저 말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상황이 그대로더라도 그걸 전체로 돌아볼 정확한 자리가 주어지고 나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붙들려 보지 못하던 무언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자신이 믿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말을 공적으로 해야 할 때, 사람은 그 말과 자기 사이에 놓인 균열, 곧 스스로 온전함(integrity)에서 어긋나 있음을 실은 어떤 식으로든 감지합니다. 다만 그걸 간과하게 하는, 살아가는 일과 맞물린 관성이 상황의 직시를 가로막는다고 여깁니다.

그렇기에 ‘한 발 물러나 전체를 다시 보는 일’은 대개 일정 계기를 필요로 합니다. 격렬히 꿈틀대는 내면과 다소 다른 리듬이 흐르는 곳, 조용한 공원이나 빛이 드는 강가, 혹은 신자가 아니라도 절이나 빈 성당의 낮은 침묵 가운데 놓이는 일 말입니다. 익숙한 흐름이 잠시 멈춘 후에, 비로소 ‘나’는 ‘나’에게 거리를 둘 수 있는 여백을 얻습니다.

저에게 시는, 그 틈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제 안의 희박함을 붙잡게 하는, 커다란 거울의 한 파편과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다른 이의 시로 만나고 저의 시로 표하려는 지점에 설령 제 존재가 영영 닿지 못할 듯하더라도, 시가 깨워 주는 투명한 부끄러움이 저에게 시를 외면하지 못하게끔 했습니다. 제가 시와 맺은 개인적 관계를 언급한 것은, 시를 매개로 한 이 작용이 다른 많은 분들의 체험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제 안의 ‘저 아닌 무엇’에 관한 믿음과, 제가 그와 끝끝내 완전히 멀어지지만은 않을 것이란 희망. 이 둘의 개별적 증거가 되어 준 이곳의 저술들에-김우창 선생님의 글들을 포함해-한 독자로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여전히 곁을 나누는 주변 분들, 그리움이 된 여러 인연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건네받은 빛으로 눈 반짝임을 잃지 않고, 또 언젠간 건네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유주연(본명 유주영). 1988년 전주 출생. 2023년 청색지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기후 위기에 경각심 주는 시… 긴 여운과 정교한 묘사 빼어나[2026 신춘문예]

2026. 1. 2. 09:15
 
■ 2026 신춘문예 - 시 심사평
202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를 맡은 문태준(왼쪽부터), 나희덕, 박형준 시인이 문화일보에서 응모작들을 살펴보고 있다. 박윤슬 기자

 

2026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에는 많은 분들의 참여가 있었다. 가히 문학에 대한 열화(熱火)와 같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적 경향은 서정시가 우세했다. 자연과 계절감, 생활의 서사, 가족과 공유한 경험 등 전통적인 소재가 많았다.

물론 시대적인 현실을 반영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인공지능(AI)’ ‘레시피’ ‘시니어’ ‘반려’ ‘행성’과 같은 시어가 활용된 시편이 꽤 있었다. 외따로 떨어져 지내는 시적 화자의 등장이나 산문화 성향은 더 두드려졌다. ‘혼령(魂靈)’의 출현은 요 몇 해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흥미로운 특징인 듯했다. 심사를 하는 내내 시의 글감이 이토록 무궁무진할 수 있나 싶어 감탄했고, 작품 수준의 높이가 한층 고양(高揚)된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우리가 한 편의 시에 대해 거는 기대는 묵은 것을 새롭게 하는 힘을 발견하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심사위원들은 네 분의 작품을 특별히 주목했다.

‘임시 정원’은 함께 투고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식물적인 상상력을 선보여 이목을 끌었다. 이 시는 잠시 동안 자리를 잡은 꽃밭을 시적 화자의 마음에서 한때 꽃피었던 사랑의 감정에 빗댐으로써 그 서정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꽃밭은 도서관이 들어서면 사라지고 말 테지만, 그곳에 피고 지는 꽃을 통해 ‘너’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소환했다. 모호한 의미의 시구가 여러 곳에 끼어들어 있어서 아쉬웠다.

‘페르소나’는 영화 촬영의 현장과 기법을 모티프로 해서 ‘나’와 타자와의 경계와 관계를 살핀 작품으로 보였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행은 매우 매력적이었지만, 후반부의 진술에는 비약이 있었다.

‘고스트 파일럿’은 시적 화자가 다른 존재에게 “나를 안내하고”, ‘나’를 증명하려는 행위를 통해 ‘나’의 정체성을 끝없이 질문하는 시였다. 시가 묵중했다. 그리고 시종 ‘나’의 큰 고립감이 느껴졌는데, 이 느낌은 시 속의 ‘나’만 갖는 감정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나로 갈아입고”라고 쓴 대목에서는 소통과 회피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아가 엿보였다. 반면에 “내가 한 말의 의미가 없는 기준점 앞에서”와 같은 표현은 긴장을 무너뜨렸다. 이 시가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음을 밝혀둔다.

숙의에 숙의를 거듭해 ‘가뭄’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우선 동봉한 작품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고르고 오랜 창작의 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언어를 절제해 여운이 퍼져가도록 공간을 만들면서도 묘사는 묘사대로 정교하고 치밀했다. ‘가뭄’은 이상 기후가 지속되는 동안 발생하는 현상을 나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메마른 날씨가 자연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종교심까지 균열시키는 그 여파에 시의 시선을 모아가면서 이 세계가 다름 아닌 하나의 ‘항아리’와도 같은 곳임을 성찰하게 했다. 사람의 목소리가 무음(無音)이 되고, “식량이 가루가 되어가”는 사태의 제시는 이 시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시적 상상력이 인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앞으로 이 분이 선보일 시적 역량을 두텁게 신뢰하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나희덕·문태준·박형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