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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기술을 사랑한 융합의 대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0. 30. 17:22

다산 정약용은 기술을 사랑한 융합의 대가

중앙일보

입력 2023.10.30 00:46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지난 10월 14일과 15일에는 제37회 정약용문화제가 개최되었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생가와 묘소가 소재한 경기도 남양주시가 주최하는 행사다. 다산이란 호는 정약용의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이 차(茶) 재배지로 유명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그의 당호(堂號)인 ‘여유’(與猶)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라’는 노자의 구절에서 따왔다. 2012년에 정약용은 탄생 250주년을 맞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수원 화성신도시 건설 지휘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문신이자 유학자였지만, 기술에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관료생활을 시작한 1789년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설계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당시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는 작업을 추진했으며, 상여가 한강을 안정적으로 건너기 위해서는 주교를 가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노량진과 용산을 잇는 주교는 30자 너비의 갑선(甲船) 60척을 나란히 붙여 놓은 후 그 위에 42자 길이의 종량(縱梁)을 배마다 5개씩 깔고 다시 그 위에다 길이 24자, 너비 1자, 두께 3치의 횡판(橫板) 1800장을 대는 식으로 건설됐다.

유학자론 드물게 과학에 관심
배다리·거중기·유형거 등 도안
인간의 특성을 기술에서 찾아
국가 기술연구소 설치 제안도

정약용 초상. 전남 강진군의 의뢰로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가 그린 작품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것은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려는 의도와 결부돼 있었다. 정조는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으며, 새로운 읍치에 ‘화성’이라는 일종의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1792년에 정조는 부친상 중이던 정약용에게 화성 공사를 위한 규제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약용은 화성 축조에 필요한 사항을 정리한 성설(城說)을 정조에게 올렸다. 이와 별도로 옹성(甕城)·현안(懸眼)·포루(砲樓)·누조(漏槽) 등에 관한 설계안도 마련했다.

화성 공사에 사용된 기술로는 거중기와 녹로가 자주 거론된다. 거중기와 녹로는 도르래 원리를 활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리는 기구에 해당한다. 녹로는 왕릉을 조영할 때 관을 내리는 용도로 이미 사용됐던 반면, 거중기는 정약용이 화성 건설에 활용하기 위해 새롭게 선보인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거중기를 개발할 때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조했지만, 그 내용을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정약용은 거중기 제작에 드는 철과 구리의 사용을 최대한 줄였으며, 기기도설의 많은 조항 중에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기본 원리가 되는 부분에 집중했다.

다목적 첨단 수레, 유형거 개발

그러나 녹로와 거중기가 화성 공사에 그리 크게 기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녹로는 2대,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녹로의 높이는 10m가 넘었던 반면 거중기의 높이는 약 3.8m였다. 녹로는 화성의 성벽을 쌓을 때, 거중기는 채석된 돌을 들어 올릴 때 사용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약용의 독창성이 더욱 잘 드러난 발명품으로는 유형거(遊衡車)를 들 수 있다. 유형거는 ‘흔들거리는 거울과 같은 수레’라는 뜻으로, 화성 공사에서 11대가 사용되었다. 유형거는 돌을 적재하는 기능과 돌을 나르는 기능을 동시에 지닌 다목적 운반 차량에 해당한다. 돌을 적재하는 과정에는 지렛대의 원리가 적용되었고,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쾌하게 달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정약용은 1800년에 정조가 서거하자 고향으로 돌아왔고,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유배에 처했다.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는 『경세유표』에서 이용감(利用監)을 신설해 기술을 도입·보급하고 기술자를 양성하자고 제안했다.

이용감은 ‘이용후생을 지원하는 관청’이란 의미다. 오늘날로 치면 정부가 운영하는 과학기술연구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도 박지원과 박제가가 외국의 선진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새로운 국가기관의 설치와 운용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사람은 정약용이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다.

정약용은 이용감의 직제로 차관급 1명, 국장급 2명, 과장급 4명 등을 제시하면서 그 자격 요건으로 과학·외국어·손재주·안목 등을 들었다. 기술을 활용하는 절차로는 외국에서 도입한 기술을 이용감에서 시험한 후 각 분야의 전문 관청으로 전달하고 필요한 백성에게 보급하는 3단계 방식을 제안했다. 전문 관청의 목록에는 기와와 벽돌을 담당하는 견와서, 수레 제작을 위한 전궤사, 선박 제작을 위한 전함사, 화폐와 병기를 담당하는 전환서, 방직 기술의 향상을 위한 직염국, 제지 기술을 담당하는 조지서 등이 포함돼 있었다.

문·이과 경계 넘나든 통섭형 인재

정약용은 뛰어난 기술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기예론(技藝論)’이란 단편에서 인간과 금수의 차이를 삼강오륜과 같은 윤리에서 찾지 않고 기술에 주목했다. 또한 인간 생활의 혜택이 모두 성인의 덕택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대중들의 집단적 활동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시대가 지날수록 기술이 발전한다는 진보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기존의 상고사상(常古思想)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기예론은 기술의 성격을 본격적으로 고찰한 우리나라 최초의 집필로 평가된다.

정약용은 발명가 겸 기술정책가·기술사상가로서 기술을 사랑한 인물이었다. 사실상 그의 세계에는 문과와 이과가 모두 녹아 있었다. 정약용은 요즘에 많이 거론되는 통섭이나 융합의 대가였던 셈이다. 아마도 그는 ‘문과라서’ 혹은 ‘이과라서’라는 변명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용의 사상이 심오한 이유는 그가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넓게 파야 깊이 팔 수 있는 법이다.

송성수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