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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는 주역을 깊이 명상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4. 22. 16:00

[백성호의 한줄명상]

공자가 점치려고 가죽끈 3번 끊어지게 봤겠나…주역은 '명상'

중앙일보

입력 2022.03.23 05:00

 

 

 “군자는 주역을 깊이 명상한다.”

#풍경1

‘주역(周易)’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세요?
열에 아홉은 “그건 점치는 책 아니야?”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그런 점 치는 책을 안고서
공자는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공자

공자 당시에는 종이가 없었습니다.
대나무를 길쭉하게 쪼갠 조각에다 글자를 쓰고,
구멍을 낸 뒤 가죽끈으로 이어서 묶은 게
‘죽간(竹簡)’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런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으니
공자가 얼마나 주역을 아꼈는지 알만합니다.

 

그럼 공자는 왜 ‘주역(周易)’을
그렇게 아꼈을까요.
주역이 단순히 점치는 책이라면
공자가 정말 점치는 일에
그토록 심취했던 걸까요.

유학(儒學)은 ‘동양 사상의 정수’로 불립니다.
그런데 주역은 그런 유학의 정수로 꼽힙니다.
동양 사상의 정수가 유학, 다시 그것의 심장으로
불리는 게 ‘주역’입니다.
그러니 간단치 않습니다.
도대체 ‘주역’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 걸까요.

#풍경2

중국 명나라  때 지욱 선사(1599~1655)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학(儒學)과 불학(佛學)에 통달한 인물이었습니다.
지욱 선사는 선(禪)의 안목으로
『주역』도 풀고, 『논어』도 풀었습니다.
그는 불교와 유교와 도교가 서로 통하는걸
보여주었습니다.

명나라의 4대 고승으로 꼽히는 지욱 선사는 불교과 유교, 그리고 도교가 서로 상통한다는 걸 설했다. [중앙포토]

지욱 선사의 저서 중에 『주역선해(周易禪解)』가 있습니다.
재야 학자인 이둔 박태섭 씨가 그 책을 번역했습니다.
941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무려 7년에 걸쳐서 번역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조계사에서
저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주역’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이리저리 물었고,
물음 끝에 많은 의문이 풀렸습니다.

먼저 “『주역』은 점치는 책이냐?”고 물었더니
저자의 답은 이랬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원래 『주역』은 점치는 책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주역’을 철학화했다.
   그게 ‘의리역(義理易)’이다.
   반면 점치는 기능을 발전시킨 게
   ‘상수역(象數易)’이다.”

점치는 책으로 알려진 주역을 공자는 철학화했다. [중앙포토]

듣고 보니 ‘주역’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대부분 잘 먹고 잘사는 걸
중시합니다.
그래서 점을 친다고 했습니다.
그걸 “주역의 소인적 용법”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주역’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종의 명상입니다.
그걸 “주역의 군자적 용법”이라고
부르더군요.

사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종교라 하더라도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기복의 종교가 되기도 하고,
깨달음과 영성의 종교가 되기도 하니까요.

#풍경3

예전에 해외 출장을 갔다가
타로 점(占)을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마침 여행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었고,
당시에는 큰 유행이라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주역에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삶의 균형을 찾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 [중앙포토]

저에게 카드를 내밀면서
서너장을 뽑으라고 했습니다.
뽑은 카드를 보여주자
삶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을 했습니다.
타로 카드의 기능이 뭘까,
설명을 찬찬히 들어보니까
일종의 ‘평형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너무 뜨겁고
때로는 너무 차갑습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고
때로는 너무 즐겁습니다.
때로는 앞으로 기울고
때로는 뒤로 기울어집니다.

점을 쳐주던 외국인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타로 점은 결국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한
   조언입니까?”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게 타로 점의 본질이라고 하더군요.

주역은 본질은 점 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을 거울에도 비유한다. [중앙포토]

사실 주역도 그렇습니다.
주역의 본질은 ‘거울’이라고 합니다.
무슨 거울이냐고요?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이둔 박태섭 씨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먼저 차분하게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를 짚어본다.
   내 마음과 마음을 둘러싼 시ㆍ공간적 환경을
   64개의 괘에 맞추어 본다.
   내가 처한 시간과 공간을 주역의 괘에
   맞추어 보는 것이다.
   그럼 해당하는 괘가 나오고,
   앞으로의 흐름이 나온다.”

듣고 보니 괘를 통해 마음을 보는 게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통해 괘를 보는 식이었습니다.
주역의 본질은 ‘점’이 아니라
‘명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마음을 통해
앞으로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어낸 결과를 통해
내 삶의 균형추를 맞추는 일입니다.

만약 주역에서 명상이 빠져버리면 점 치는 책으로 전락하고 만다. [중앙포토]

우리는 그걸 ‘지혜’라고 부릅니다.
서리가 내리면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땅이 녹으면 곧 꽃이 핀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럼 거기에 맞춰서 내 삶을 지혜롭게
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주역에서 깊은 흐름을
읽어내려면
먼저 내 마음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가 봐야 합니다.

#풍경4

그렇습니다.
주역의 본질은 점이 아니라 명상입니다.

종교의 본질도 그렇습니다.
에고를 키우는 기복이 아니라
에고를 비우는 깨달음과 영성입니다.

주역에도 명상이 필요하고
종교에도 명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주역에는 세상 이치의 모든 게
담겨 있을까요.
박태섭 씨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주역에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길 바란다.
   그런데 아니다.
   다만 주역의 형식을 통해서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우주의 섭리를
   역(易) 속에서 보려고 한 것일 따름이다.”

인간의 지성이 우주의 섭리를 역을 통해 보고자 한 노력의 결과물이 주역이다. [중앙포토]

그래서 주역은 불완전하다고 했습니다.
우주의 섭리와 주역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게 주역의 한계라고 했습니다.

유가(儒家)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주역을 깊이 명상한다.”

단순히 괘와 숫자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맞추는 일이 아닙니다.
깊은 명상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돌아본 나를 통해 우주를 보는 일입니다.
그게 주역의 한계를 뛰어넘는
돌파구가 아닐까요.

주역의 핵심은 점 치는 기능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는 명상에 있다. [중앙포토]

그러니 명상이 빠진 주역은
‘앙꼬 없는 찐빵’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점에서 주역과 종교는
무척이나 닮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