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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품의 비애, 감미로운 차향에 날려 보낸 최치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2. 18. 18:58

 

육두품의 비애, 감미로운 차향에 날려 보낸 최치원

차(茶)와 사람 ② 고운 최치원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 제359호 | 20140126 입력
중국 양저우((揚州)시 당성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최치원은 이 지역에 5년간 살면서 『토황소격문』 외에 ‘계원필경’ 같은 많은 글을 썼다. 조용철 기자
당(唐)에서 이름을 날린 신라인 고운(孤雲) 최치원(857~?)은 한반도 초기 차 역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당 유학 시절, 그는 당시 지식인의 정신 음료였던 차를 본격적으로 접했다. 신라에 들어온 차는 처음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물이었다가 최치원의 시대엔 선진문물로 인식돼 귀족층으로 확산됐다. 왕실과 귀족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던 차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은 제한적이었다. 육두품 출신인 최치원으로선 차를 접하기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에서 돌아온 대렴이 차 씨를 가져와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로부터 성해졌다”고 하였다. 이는 신라 말, 음다(飮茶) 열풍이 불었음을 의미한다. 차는 음다인(飮茶人)의 격조와 품위를 부여했다. 따라서 흥덕왕 3년(828) 당 사신 김대렴이 차 씨를 가져 온 것도 귀족 중심으로 차의 수요가 확산돼 있음을 보여준다. 흥덕왕은 지리산에 차 씨를 심어 큰 차밭을 만들었다. 그런데 왜 지리산이었을까.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없지만 해석의 실마리는 있다. 당에서 귀국한 후 지리산 옥천사(玉泉寺현 쌍계사)에서 수행했던 진감국사가 바로 흥덕왕의 스승이었다. 게다가 차는 불가에서 수행(修行)을 돕는 음료로 간주됐다.

이외에도 신라 유학생, 특히 당나라 관료로 진출했던 이들이 차를 즐겼다. 최치원도 차를 즐겼음이 『사신차장(謝新茶狀)』에서 확인된다. 내용은 이렇다.

“저는 오늘 중군사(中軍使) 유공초(兪公楚)가 처분할 일을 전하기에 처리했더니 차를 보내셨습니다. 생각건대 이 차는 촉(蜀)의 언덕에서 빼어난 기운을 받고 자랐으며, 수원(隋苑)에서 차 싹을 피운 것입니다. 비로소 (차를) 따는 공력을 다해 순수하고, 빼어난 맛을 갖추었으니 귀한 솥에 차를 달여, 향기로운 차를 옥잔에 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고요히 선승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면 한가히 신선을 대접해야 할 차이거늘 뜻밖에 훌륭한 선물을 외람되게도 보내시니 매림(梅林)을 빌리지 않아도 절로 갈증이 멈추고, 훤초(萱草)를 구하지 않아도 근심을 잊을 수 있습니다.”

당시 최치원은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고변(高騈821~887)의 종사관(서기)이었다. 유공초는 ‘황소의 난’ 평정에 나선 중군사(中軍使). 그가 부탁한 일을 잘 처리한 답례로, 최치원에게 촉의 수원에서 자란 귀한 차를 보냈다. 수원은 황실용 차밭이라 짐작된다. 그러기에 최치원은 ‘선승이나 신선을 대접하는 차를 받았다’고 했고, ‘귀한 솥에 차를 달여 옥잔에 담는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차가 갈증과 근심을 없애준다고 여겼다. 차를 마시면 몸과 마음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변화를 매 순간 관찰하여 이에 따른 즐거움을 노동(蘆仝795~835)은 『칠완다가(七碗茶歌)』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당(唐) 사신 김대렴이 가져온 차씨가 처음 뿌려진 지리산 옥천사(지금의 쌍계사)의 기념비. 박동춘
첫 잔은 입술과 목젖을 적시고
( 一碗喉吻潤)
둘째 잔은 근심을 없애주네
(兩碗破孤悶)
셋째 잔은 삭막해진 마음을 더듬어
오천 권의 문자를 떠오르게 하고
(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넷째 잔을 마시니 살짝 땀이 나는 듯,
일상의 불편한 일들이
모두 땀구멍 사이로 사라지네
(四碗發輕汗 平生不平事盡向毛孔散)
다섯째 잔은 뼛속까지 맑게 하여
(五碗肌骨淸)
여섯째 잔을 마시니 신령한 신선과 통하네
(六碗通仙靈)
일곱째 잔은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겨드랑이 사이로 스멀스멀 맑은 바람이
이는 것을 알겠구나
(七碗喫不得 唯覺兩腋習習淸風生)

노동의 이 시는 다시(茶詩)의 백미(白眉)로 꼽히며 후일 다시(茶詩)의 규범이 됐다. 육우의 『다경』이 차 문화를 집대성했다면 노동은 시 한편으로 세상을 평정한 셈이다. 최치원이 ‘절로 갈증이 사라지고, 훤초를 구하지 않아도 근심이 사라진다’고 한 표현의 원류는 『칠완다가』와 닿아 있는 것이다.

최치원이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溧水縣尉)로 있을 때 급료 지급을 요청한 『사탐청료전장(謝探請料錢狀)』엔 ‘다만 부모를 그리는 시나 읊으며, 바다 건너로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본국 사신의 배가 바다를 건너간다 하니 차와 약을 사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함께 부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신라 말, 당의 차를 신라에 소개한 부류가 당의 관료로 진출했던 인사들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차 얘기를 계속하기 전에 최치원의 삶을 잠깐 풀어보자.

최치원은 사비로 당 유학을 떠났다. 가문을 건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골품제도가 엄격했던 신라에서 육두품인 그는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었다.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12세 어린 나이에 상선을 탔다. 아버지는 ‘10년 내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가서 원대한 꿈을 이루는 데 힘쓰라’고 했다. 그의 비장한 각오와 노력은 『계원필경집』에 “다른 사람이 백을 (공부)하면 나는 천을 노력했다”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 노력 덕에 유학 6년 만에 진공과에 합격해 금방(金榜과거 합격자 명단)의 끝 자리에 이름을 걸 수 있었다. 도전은 계속됐다. 잠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라는 과거를 준비했지만 경제적 뒷받침이 없어 중도에서 포기한다. 그러다 선주의 율수현위가 됐지만 사정이 편치 않았다. 급료를 요청한 『사탐청료전장』에 ‘엄한 질책을 무릅쓰고 다시 궁한 사정을 아룁니다’라고 쓴 것이 이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환관의 전횡과 문벌세가의 파벌, 관리의 부패로 농민 폭동이 빈발했다. 최치원의 지위가 보장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당나라 조정은 신라 출신 급제자를 하급관리나 변방 관리로 보냈다. 월급도 못 받고 말단 관리로 울분이 쌓인 최치원은 877년 율수현위를 사직했다.

그의 행로를 밝혀준 고변(高騈821~887)을 만난 것은 그 이듬해다. 그의 문객이 되어 관역순관(館驛巡官)과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됐으니 입신양명의 꿈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고변은 ‘황소의 난’을 평정하라는 왕명을 받는다. 최치원은 서기로 따라가 출세작이 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쓴다. 황소는 격문 중의 ‘세상 사람들이 죽이려 생각할 뿐만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논의한다’라는 대목을 읽다 자신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앉았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어쨌든 황소의 난은 평정된다. 이 공으로, 최치원은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랐고, 황제에게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는다.

하지만 행운은 늘 짧고 아쉬운 것.

그는 28세에 당을 떠나 이듬해 3월 신라로 돌아온다. 부모 봉양이 이유였지만 실제론 고변이 신선술에 빠져서였다. 만년에 더욱 오만해진 고변은 위험한 상황에 빠지고 최치원은 서둘러 귀국한 것이다. 3년 뒤 회남의 난이 일어나 고변은 피살된다.

최치원은 금의환향하지 못했다. 그래도 도통순관까지 지낸 사람이어서 신라 조정에선 한림학사 겸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에 임명됐다. 당 황제가 하사한 ‘비은어대’의 권위도 힘이 됐다. 그러나 관직은 순탄치 않았다. 흉년이 계속됐고 정치적 혼란으로 국정이 문란해졌다.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가 점점 어려웠고 육두품 신분도 발목을 잡았다. 입당 유학파와 국내파의 갈등도 심했다.

그는 답답한 현실을 따스하고 감미로운 차향에 날려 보냈다. 신라 문인들은 최치원의 당 경험과 차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를 짓고, 차를 마시며 당시 암울했던 정치적 현실을 떠나 이상적인 삶을 동경했다. 이는 근거가 없는 추측이 아니다. 최치원은 풍류도(風流道)를 했기 때문에 차를 즐기며 심신을 수련했다, 신라의 화랑과 낭도들도 오래전부터 수려한 산천을 찾아다니고, 차를 마시며 수련했다.

풍류도는 한민족의 고유사상이다. 그가 『난랑비서문』에 쓴 풍류의 설명을 보면 “나라에 지극하고 오묘한 도가 있다. 유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하며, 만물을 교화한다”고 했다. 특히 유불선(儒佛仙)에 밝았던 그가 도인이 됐다는 이야기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전한다.

“곡성(谷城)은 남월(南越)의 이인(異人)이다. 일찍이 그의 집 하인에게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가 친구에게 편지를 전하게 했다. 하인이 들어가 보니 단청(丹靑)한 누각이 깨끗하고 조용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한 도인이 노승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은 고운(최치원의 호)이고, 노승은 현준(玄俊)인데, 현준은 고운의 외종형’이라고 했다. 편지를 전하고 나오는데 올 때는 9월도 안 됐는데 동구 밖은 이미 2월이 됐다.”

하인이 본 노승은 화엄에 밝았던 승려로, 최치원의 형이다. 그는 최치원에게 도교의 환반법(還反法)시해법(尸解法)을 전수했다. 도인들의 곁에는 도인의 음료인 차와 이를 달이는 동자가 있었으리라. 실제로 도가는 심신을 맑게 한다는 차의 원리를 가장 먼저 양생에 응용했다.

그러나 가야산에 은둔하기 전, 최치원은 사력을 다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회생시키려 시무책 10여 조를 올린다. 왕은 이를 수용해 그를 아찬(阿飡)에 임명했지만 귀족들이 저항했다. 결국 효공왕 2년(898)에 면직되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둔한다. 후인들은 그가 은거해 살던 집을 ‘상서장(上書莊)’이라 했다.

최치원은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 정신과 향학열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한국의 인물이다. 지금도 어딘가에 신선이 되어 산다는데…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가 차와 함께 잠시라도 머문 자리엔 장황하게 윤색(潤色)된 전설이 남아 있으니 여전히 그는 우리 가슴속에 살아 있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박동춘 철학 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 문화융성위원회 전문위원. 저서론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다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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