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천 비둘기낭폭포
비 내리면 더 굵어지는 물줄기
병풍 같은 협곡이 웅장함 더해
△ 담양 죽녹원
빗물 맞은 대나무 초록빛 가득
바깥보다 4~5도 낮아 시원함도
△ 제주 사려니숲길
삼나무 사이로 번지는 물안개
운무 끼면 더욱 신비로운 풍경
△ 진도 운림산방
아침저녁 안개가 구름숲 이뤄
여름 연못에 피는 수련도 일품

글·사진=박경일 전임기자
장마가 시작되면 여행 계획부터 접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비를 피하지 말고 비를 맞으러 가야 제 모습을 보여주는 곳들이 있다. 폭포는 물이 불어야 우렁차고, 대숲은 젖어야 색이 짙어진다. 맑은 날의 여행자는 부지런히 걷고 많이 본다. 비 오는 날의 여행자는 자주 멈추고 오래 본다. 빗줄기가 시야를 좁히는 대신, 그 좁아진 자리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게 비 오는 날에 볼만한 네 곳을 골랐다.
# 물이 불어야 우렁차다… 포천 비둘기낭폭포
경기 포천 비둘기낭폭포는 비 온 뒤에 가야 한다. 약 27만 년 전 화산이 분출한 용암이 식으며 만들어진 한탄강 현무암 협곡에 자리한 폭포다. 폭포 뒤편 동굴에 수백 마리의 백비둘기가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해서, 둥지를 뜻하는 한자 ‘낭’을 붙여 비둘기낭이라 불린다.
검은 주상절리 절벽이 병풍처럼 두른 자리에 폭포가 쏟아지고, 그 아래로 짙푸른 소(沼)가 고인다. 평소에는 수량이 많지 않아 물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지만 비가 내려 물이 불으면 검은 협곡을 타고 내리는 물줄기가 굵어진다. 검은 현무암과 흰 물줄기, 그리고 옥빛 물색의 대비가 이때 가장 선명하다. 독특한 경관 덕에 드라마 ‘추노’ ‘킹덤’ ‘아스달 연대기’, 영화 ‘최종병기 활’ 등의 촬영지가 됐고, 2012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폭포 인근에는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하늘다리가 있다. 길이 200m, 폭 2m의 출렁다리로, 다리에 올라 까마득한 협곡을 내려다보는 맛이 아찔하다. 폭포에서 하늘다리를 거쳐 멍우리협곡으로 이어지는 주상절리길은 비 온 뒤 물이 불으면 더 볼만하다. 서울양양고속도로나 세종포천고속도로 포천IC에서 30분 거리. 주차장은 무료다.
# 젖어야 색이 짙어진다… 담양 죽녹원
전남광주 담양 죽녹원은 비에 젖으면 대숲의 색이 짙어진다. 죽녹원은 담양군이 2003년부터 성안산 자락에 조성한 대나무숲 정원으로, 약 31만㎡ 대숲 사이로 2.2㎞ 남짓한 산책로가 나 있다.
마른 날의 대나무가 밝은 초록이라면, 비에 젖은 대나무는 윤기가 돌며 색이 짙고 깊어진다. 여기에 빗소리까지 더해진다. 수천 그루의 대나무 잎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숲을 채운다. 눈으로 보는 풍경에 귀로 듣는 풍경이 겹쳐지는 셈이다. ‘서늘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대숲 안 기온이 바깥보다 4∼5도 낮아 한여름에도 덜 덥다.
산책로는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철학자의 길, 사색의 길 등 여덟 갈래로 나뉜다. 다 걷지 않아도 1∼2시간이면 핵심 코스를 돌아볼 수 있다. 담양은 가사문화의 산실로 꼽히는 곳. 죽녹원 안에 담양의 이름난 정자인 면앙정, 식영정, 송강정 등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시가문화촌을 조성해놓았다.
정문으로 나오면 영산강 최상류인 담양천이 흐르는 천변에 국수거리가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맛보는 국수 한 그릇은 어떨까. 국숫집 옆으로 수령 300년이 넘는 나무들이 늘어선 관방제림이 이어진다. 입장료는 성인 3000원. 65세 이상은 무료다.
# 안개가 숲을 감싼다… 제주 사려니숲길
사려니숲길은 비자림로에서 시작해 물찻오름을 지나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지는 한라산 중산간 숲길로, 평균 고도가 550m에 이른다. 200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제주 생물권보전지역이다.
제주 사려니숲길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비 오는 날 운무가 피어오를 때다. ‘사려니’는 ‘신성한 숲’이라는 뜻인데, 운무로 가득한 숲은 한층 더 신비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하늘로 곧게 뻗은 삼나무가 머리 위로 둥근 그늘을 드리우고, 바닥에는 화산송이가 깔려 붉은빛을 띤다. 비가 내리면 붉은 흙길과 초록 나무의 대비가 선명해지고, 삼나무 사이로 물안개가 번진다. 숲에는 삼나무 외에 졸참나무, 서어나무, 편백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어우러졌다.
코스는 걷는 방향에 따라 2시간에서 3시간 30분까지 다양하다. 붉은오름 쪽으로 진입하면 더 깊고 고요한 숲을 느낄 수 있다. 비자림로 입구 주변에는 주차 공간이 거의 없으니 남조로변 붉은오름 쪽에 차를 대는 게 편하다. 숲 보호를 위해 음식물 반입은 금지되고, 플라스틱 물병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
# 안개와 구름을 걸다… 진도 운림산방
전남광주 진도 운림산방(雲林山房). 운림(雲林)이란 이름은 첨찰산을 지붕 삼아 사방으로 봉우리가 어우러진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룬다 해서 붙여졌다.
이곳은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말년에 지은 화실이다. 허련은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워 남화의 대가가 됐고, 스승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 진도로 돌아와 이 집을 지었다. 그의 나이 49세 때인 1857년의 일이다. 이후 5대에 걸쳐 후손 화가들이 대를 이으며 호남 화단의 산실이 됐다.
‘ㄷ’자 기와집 화실과 초가 살림채, 오각형 연못으로 이뤄져 있다. 여름이면 연못에는 흰 수련이 피고, 가운데 원형 섬의 배롱나무가 꽃을 피운다. 평생 수묵으로 산수를 그린 화가의 집이, 비 오는 날 안개에 감싸이면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림을 그리던 자리가 스스로 그림이 되는 셈이다. 소치기념관에는 허련부터 후손까지 5대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 연중무휴다.
박경일 전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