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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비춤’에서 만난 선불교와 하이데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4. 16. 14:41

‘고요한 비춤’에서 만난 선불교와 하이데거

  • 수정 2026-04-11 07:57

 

불교의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 범어로 `적광’ 또는 `광명'을 의미한다. 적광은 번뇌가 사라진 열반의 자리에서 나오는 진리의 빛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송 고형곤(1906~2004)은 불교적인 ‘깨달음’을 존재론적으로 해명함으로써 현대 불교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청송은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으로써 선적(禪的) 깨달음의 경지를 밝혀주었고, 그의 이런 해명은 불교 철학의 이해와 하이데거 철학의 이해에 공히 결정적인 분기점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청송은 조선조에서 편찬된 ‘선종영가집’에서 한 구절─전반부와 후반부가 서로 대조를 이루는 구절─을 끄집어내어, 그 전반부는 후설의 현상학으로써 후반부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써 해명한다. 전반부가 ‘생멸상속’(生滅相續)하는 세계, 그리고 윤회라는 착각이 지배하는 무명(無明)의 삶과 관련된다면, 후반부는 이와 대조적인 ‘본지풍광’(本地風光)의 세계, 깨달음의 길에 관련된다.

생멸상속하는 세계는 ‘흐르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크로노스의 시간에 입각해 살아가는 세계이다. 청송은 이 세계를 후설의 현상학적 시간론을 동원해 해명한다. 이 시간에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如如)의 세계, ‘본지풍광’의 세계(the World as it is)를 보지 못하고, 그것에 생멸심(生滅心)을 투사해서 흐르는 세계로 본다. 하여 깨닫지 못한 이런 주체에게 세계와 삶은 곧 ‘윤회’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청송은 이와 대조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사문 행정(行靖)에게서 유래한 “생멸멸이 적조현전”(生滅滅已 寂照現前)이라는 구절을 실마리 삼아 해명한다. 이 구절은 생멸상속이 이미 사라졌을 때(生滅滅已) 즉 윤회의 시간이 사라졌을 때, 거기에 남아 있는 것, 드러나는 것은 바로 ‘고요한 비춤’이라는 것(寂照現前)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고요한 비춤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불교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선정(禪定)이라든가 지관(止觀)은 큰 의미를 띤다. ‘적조현전’에서의 ‘寂’은 선정에서의 ‘定’이라든가 지관에서의 ‘止’와 통하는 개념으로서, 대상과 주체 사이의 표상 관계가 극복된, 다시 말해 인간의 주관성에 의해 대상이 구성되는 관계를 벗어난 경지를 뜻한다. 교토 북부 오하라의 자코인, 곧 적광원(寂光院)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고요한 빛’(寂光, solitary light)은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를 잘 나타낸다. 이 경지는 곧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사라진” 경지이다.(‘영락경’)

그러나 ‘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모든 것이 멸한 허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캄캄한 밤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모든 빛이 사라진 캄캄한 하늘은 절대 무가 아니라, 모든 빛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무이다. 깨달음의 경지인 고요함은 칠흑 같은 밤과 같은 곳이 아니다. 오히려 이 고요함의 경지에는 모든 것을 비추어주는 빛이, ‘비춤’(照)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이 경지는 ‘고요한 비춤’, ‘고요한 빛’의 경지이다.

청송은 이 점을 하이데거와 연결해 설명한다. 청송은 고요한 비춤에서 고요함을 하이데거의 무(Nichts, 니히츠)에, 비춤을 하이데거의 ‘리히퉁’(Lichtung, 밝아짐)에 상응시킨다. 선불교에서 고요함이 허무가 아니라 그 안에 비춤을 내포하고 있듯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도 무는 오히려 환히-비춤을 내포하고 있다. 청송은 바로 이 점을 부각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존재는 그 어떤 존재자도 아니기에 무이다. ‘존재’는 산도 사람도 사슴도 진달래도 선풍기도 아니다. 이 모두는 ‘존재자’들이다. 그렇기에 묘하게도 존재는 존재자들의 차원에서 본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이다. 존재자들은 유(有)이지만, 오히려 존재는 무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자들을 존재케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자들을 존재케 하는 것은 바로 이 무로서의 존재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자들로 하여금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환한-빈터(Weiträumigkeit)를 우리는 무에서 경험한다”고 말한다.(‘존재 물음을 향해’) 그래서 무=존재의 본질은 곧 환히-드러남이다. 이 환히-드러남이 다름 아닌 ‘조’(照, 비추다)이며, 그래서 무로서의 ‘적’(寂, 고요하다)은 단적인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을 존재케 하는, 존재가 존재자들을 환히 드러나게 하는 비춤을 품고 있다. ‘선종영가집’에서는 이를 “표상 관계를 끊어냈을 때 도래하는 것은 고요하고 또 고요한 상태이지만, 이 상태는 그저 단순한 단멸(소멸 상태)이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의 경지가 또렷하게 빛나는 상태일 뿐”이라고 말한다.

‘선종영가집’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서구 인식론의 전통에 따른다면 ‘관념’─을 ‘지’(知, 알다)라 이른다.(일반적으로는 ‘념’(念, 생각)을 많이 쓴다. 서구어 ‘아이디어’(idea)를 ‘관념’(觀念) 또는 ‘이념’(理念)으로 번역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은 경지에서의 ‘지’에 대해서, 이때의 ‘지’란 “단지 知 그것일 따름”임을 역설하다. 따라서 깨달은 경지에서의 ‘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 즉 대상에 관련된 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으로서의 지로서, 말하자면 무-속에서-깨어-있는 지(/마음)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이때의 지를 주체가 의식할 경우, 그 지는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또 그것을 의식하는 지 또한 대상에 관한 지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그 지를 대상으로 격하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붓다도 아난다에게 “그 견(見)[지,知]이 네 앞에 나타나 있다면 어디 손으로 분명히 가리켜보아라”고 했던 것이다.

청송은 이 지를 ‘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의 ‘견성’으로 이해한다. 선불교는 이전의 불교에 대립하면서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등의 슬로건을 제시했거니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견성성불’이다. 견성이란 환히-드러남의 한가운데에서 깨달은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존재(이자 무)에 의한 환히-드러남이며, 다름 아닌 ‘적조’ 속에 들어서 있는 ‘청정심’(淸淨心)이다. 따라서 청송에 따르면, 대상에 관련된 지가 아니라 “단지 지 그것일 따름”인 지는 곧 고요한 빛(/비춤) 속에 들어서 있는 청정심과 같은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의 환히-드러남에 대해서 논했거니와, 이는 곧 존재 현현(Ereignis)과 같다. 존재 현현, 존재의 환히-드러남은 곧 존재와 인간 사이의 동(同)근원적 관계를 가리킨다. 존재는 오직 인간에게만 드러나고, 인간이야말로 존재의 목동이자 무의 불침번이기 때문이다. “존재 현현은 인간과 존재를 본질적 공동성에 있어 드러낸다.”(‘동일성과 차이’) 존재 현현을 이해하는 존재자는 오로지 실존으로서의 인간, 본래적인 인간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본래적인 것들에 코가 꿰인 인간, 존재자들(자동차, 아파트, 주식, 직위…)에만 주목하는 인간이 아니라 본래적인 것을 지향하는 인간, 즉 존재의 목동이자 무의 불침번인 인간에게만 존재가 현현한다. “인간은 존재가 현현하는 ‘곳’(Da), 즉 존재가 환히-드러나는-곳으로서 존재한다.”(‘플라톤의 진리론’) 그래서 인간은 ‘다자인’(Dasein, 현존재, 現存在)이고, 또 존재의 환히-빛남 안에 들어서 있는 존재자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존재=무가 오로지 그에게만 ‘바로-앞에-드러나-있음’(현전성, Anwesenheit)으로서 나타나는 탁월한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서구 형이상학의 핵심 테제였던 ‘존재와 사유의 일치’를 이렇게 독자적인 방식으로 부활시켰다.

이 환히 드러난 곳, 이곳은 바로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인간의 표상을 통해 포착된, 주체에 의해 대상화된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이 능(能)·소 (所) 대립을, 생·멸의 흐름을 벗어난 ‘적조’의 경지에서 나타난 본연의 세계이다. 안 (眼)·이 (耳)·비 (鼻)·설( 舌)·신 (身)·의 (意)의 육식(六識)에 의해 가려졌던 세계가 적조의 경지에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청송은 “단지 知 그것일 따름이니”에서의 ‘지’는 “인간의 知라기보다는 차라리 산하대지, 즉 존재 전체의 자명편조(自明徧照, 스스로-빛나 밝게-비춤)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드러난 세계가 바로 ‘본지풍광’으로서의 세계이다. ‘금강경’에서는 이 본지풍광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밝힌다.

“하니 수보리야, 보살 마하살 모두는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하리니. 마땅히 ‘색’(色)에 머물기보다 그리고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 머물기보다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 마땅히 머무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하느니라.”(‘장엄정토분 제10’)

‘색성향미촉법’에 머물기보다 마음을 내어야 함이란 무엇을 뜻할까? 색성향미촉법(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가 나는 것…)에 즉 대상들의 세계에 머묾이란 곧 대상들을 표상하는 자신의 생각에 머묾, 즉 ‘집념’(執念)을 뜻한다. 이런 마음에게 ‘본지풍광’은 가리어져 나타나지 않는다. 달리 말해, 주체가 개별 표상들에 집착할 때 세계 전체의 존재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본래적 인간은 본래 무=존재 안에 들어서 있는 존재자, 존재의 목동이자 무의 불침번이건만, 존재자들에 대한 집착은 존재와 인간(/사유)의 이 공속성을 가려버리는 것이다. 오로지 마음을 냄으로써만,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어 본래의 마음을 비춤으로써만(回光返照, 회광반조) 본연의 세계, 본지풍광으로서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해,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으로써만 회역(會域, Gegnet)으로서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동일성과 차이’)

‘진리’란 무엇인가? 여기저기에서 ‘진리’를 말하거니와, 진리라는 개념의 뜻은 무엇인가? 표상적 사유에서 진리란 ‘사태와 명제 사이의 일치’이다. “눈은 희다”는 실제 눈이 흴 때에 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일찍이 그리스에서의 ‘진리’(alētheia)란 은폐(/망각, lēthē)로부터 탈-은폐로 나아감, 즉 ‘탈은폐성’을 뜻했음을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이 진리 개념을 ‘존재의 진리’ 개념으로 이해한다. 즉, 존재의 진리란 바로 탈-은폐성인 것이다. 앞에서 논의했던 환히-드러남, 존재 현현, 현전성은, 그리고 환한-빈터, 회역 등은 모두 이 점과 연관된다. 그리고 이때의 드러남, 현현, 현전성은 모두 인간이 존재의 빛 아래에 들어설 때 성립하는 것이다.

“존재가 필연적으로 거기에서 열리는 장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정초되어야 한다. 인간이란 저 스스로 열린 거기(Da)이다. 이 존재 열림의 장으로서의 현-존재(Da-sein)의 본질에, 존재 열림에의 착안점이 근원적으로 정초되지 않으면 안 된다.”(‘형이상학 입문’)

표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존재가 열리는 곳, 이 환한-빈터, 회역에 들어설 때, 인간은 본지풍광의 세계를 맞이하게 되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청송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갈음한다. “존재는 이미 훤하게 현전해 있고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현전성인 ‘상주열반’(常住涅槃)이건만, 인간의 ‘무명불료’(無明不了)로 말미암은 주-객 대립의 표상체계 속에 존재는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이정우 철학자

이정우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

청송 고형곤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특히 후기 하이데거가 추구한 본질적 사유와 존재의 현전(現前) 개념을 통해 불교의 선사상을 현대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윌리 프래거 촬영. 위키미디어 코먼스
서양 철학적 토대 위에서 한국의 불교 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 노력했던 청송 고형곤. 청송장학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