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마음이 빚어낸 윤회라는 착각 [.txt]
- 한겨레 수정 2026-03-14 09:28


한국 철학의 한 세기 l 불교철학과 현상학 접목한 청송 고형곤

지난 한 세기에 걸쳐 한국에서는 어떤 철학적 사상들이 펼쳐졌을까. 현대 한국 철학의 100년을 찬찬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이런 음미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남겨진 철학적 자산이 어떤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사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듯이, 한 철학사상의 침체기가 끝나고 새롭게 활기가 돌게 되는 중요한 계기는 그것이 어떤 타자, 다른 철학적 흐름과 마주치게 되는 사건에 있다.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 사유의 새로운 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 한국 불교철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서구 철학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불교적 사유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20세기는 한국 불교철학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된 획기적인 시대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특히 하나의 굵직한 사유-계열을 형성해 온 것은 바로 불교철학과 하이데거 철학 사이의, 보다 넓게는 불교철학과 현상학 사이의 대화이다. 고형곤, 신오현, 김형효를 필두로 한 여러 철학자들이 불교철학과 현상학적 사유를 비교하면서 흥미로운 논변들을 펼쳐냈다. 이 흐름은 20세기 한국 철학이 이룩한 가장 빛나는 성취들 중 하나이다.
불교적 깨달음은 세계에 대한 인간 주관의 인식을 비워내고 고요함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세계가 절대무의 세계는 아니다. 비워냄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표상의 껍질이 벗겨졌을 때 만나게 되는 ‘있는-그대로의 세계’이다. 그것은 밝아오는 새벽에 마주치는 본연의 진리이고, 고즈넉한 저녁에 맞이하는 ‘고요한 빛’이다. 청송(廳松) 고형곤(1906~2004)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통해서 이런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청송은 이 깨달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포착한다. “존재는 이미 훤하게 현전해 있고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현전성인 ‘상주열반’(常住涅槃)이건만, 인간의 무명불료(無名不了)로 말미암은 주-객 대립의 표상체계 속에 존재는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선(禪)의 세계’, 122쪽) 이런 깨달음의 경지를 해명하기 위해 청송은 조선 시대에 편찬된 ‘선종영가집’의 다음 구절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前則滅ᄒᆞ며 滅ᄒᆞ야 引知ᄒᆞ고, 後則知ᄒᆞ며 知ᄒᆞ야 續滅ᄒᆞᄂᆞ니. 生滅이 相續호미 自是輪廻之道니라.”
(전즉 멸하며 멸하여 인지를 하고, 후즉 지하며 지하여 속멸하나니. 생멸이 상속함이 자시 윤회지도니라.
앞의 ‘지’(知)가 멸하면서 이 멸한 지가 다른 지를 끌어오매, 계속 지가 생겨나고 또 멸해 간다. 이렇게 생멸이 계속 이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윤회의 과정이다. )
이 인용문은 흐르는 시간, 삶의 시간을 말하고 있다. 청송은 이 구절을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서 현대적인 방식으로 해명한다. 여기에서 ‘지’는 곧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는 ‘념’(念)을 뜻한다. 후설은 인식 주체가 대상을 지각할 때 반드시 시간을 그 선험적 조건으로 한다는 점을 중시해,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행한 바 있다. 청송은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 입각해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이어지면서 흐르는 시간을 형성하는가를 밝힌다.
인용한 구절은 ‘흐름’을 말하고 있다. 흐름은 연속성의 이미지를 띠고 있지만, 분절 없는 연속성은 흐름이 될 수 없다. 흐름이란 연속성에 무들이 틈입(闖入)해 분절들이 반복될 때, 역으로 말해 분절들이 촘촘히 이어질 때 성립한다. 물이 흐른다는 것은 물의 상태가 그대로라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물은 오히려 멈추어 있는 것이다), 물결이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는 반복적 운동을 한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그저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시간은 오히려 멈추고 있는 것이다), 각종 사건들로 계속 분절되면서 이어진다는 뜻이다. 이런 연속적 분절, 분절적 연속이 시간에 있어 성립할 때, ‘시간의 흐름’이 성립한다. 시간의 이런 흐름, “앞의 ‘지’가 멸하면서 이 멸한 ‘지’가 다른 ‘지’를 끌어오매, 계속 ‘지’가 생겨나고 또 멸해” 가는 흐름이 곧 ‘생’(生)과 ‘멸’(滅)이 계속 이어지는 생멸상속(生滅相續)이다. 이 흐르는 시간을 해명하는 것은 곧 현재, 과거, 미래라는 크로노스의 세 차원을 해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설 시간론의 출발점에는 ‘지금’(現今)의 개념이 있다. 현상학의 출발점이 ‘현상=나타남’에 있다고 한다면, 지금이란 이 나타남의 시간론적 맥락이다. 지금에는 지각하는 의식과 지각되는 대상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론에서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무엇이건 어떤 것을 현재로서-놓는 행위 자체이다. 이때 현재의 무엇인가로서 놓아지는 것을 후설은 ‘원시 인상’이라고 부른다. 지금 내가 눈앞에 사과를 보고 있다면, 이 사과의 형태, 색깔 등이 원시 인상이다. 다만, 후설은 사과가 있어서 내가 본다기보다 내가 보는 행위를 통해서 사과의 존재가 확인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 의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금’들을 맞이하면서 지속한다. 그러나 이 지금들은 단절된 점들의 병치가 아니라 계속 ‘수축’됨으로써 연속체를 이룬다. 시계가 세번 종을 쳤을 때, 내가 첫번째 소리, 두번째 소리, 세번째 소리를 ‘수축’하지 못한다면, 즉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해 지각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하나의 종소리만을 들을 것이다. 이런 수축을 통해서 연속체가 성립한다. 이 연속체는 곧 시간과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연속체이다. 여기에서 ‘흐름’이란 지금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면서도 동시에 과거로 사라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흐름=생멸상속’이란 현재로부터 과거로의 이런 퇴색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넓게 볼 때, 흐름이란 현재가 과거, 미래와 3차원적 전체를 이루면서 진행되는 거시적 과정을 뜻한다.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파지’(把持)의 개념을 통해서 해명된다. 파지는 이제 막 흘러간 지금을 붙드는, 그것이 지각되지는 않지만 사라지지도 않도록 수축하는 의식의 작용이다. 이런 파지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방금 일들을 곧 잊어버리고 계속 현재만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파지는 파지의 파지, 파지의 파지의 파지…로 계속되면서 연속체를 형성한다. 이 파지라는 근본적 조건 위에서 일정한 기억이 형성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현재와 미래의 관계는 ‘예기’(豫期) 개념을 통해서 이해된다. (원시)인상-파지-예기의 이런 입체적 작용을 통해서 현재-과거-미래의 시간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청송은 이렇게 후설의 시간론에 입각해서 인용문의 전반부, 즉 “앞의 지가 멸하면서 이 멸한 지가 다른 지를 끌어오매, 계속 지가 생겨나고 또 멸해 간다”를 해명했다.
이제 인용문의 후반부, 즉 “이렇게 생멸이 계속 이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윤회의 과정이다”를 해명해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까지 ‘생멸상속’에 대해 논했거니와, 그렇다면 이 생멸상속이 어떤 의미에서 윤회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가? 요컨대 흐르는 시간과 윤회의 관계는 무엇인가?

청송은 이에 대해 일체중생은 생성이 없는 곳에서 생성을 본다고 착각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윤회와 생사를 논하는 것이다. 생성이 없는 곳에서 생성을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흐르는 시간에 입각해서 세계를 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단지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를 흐르는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그것을 ‘윤회’라든가 ‘생사’로 설명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청송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인간은 생멸심(生滅心)의 입장에서(생멸상속의 입장에서) 원각성(圓覺性)을 보는 고로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원각성도 생멸의 상(相)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선의 세계’, 149~150쪽)
‘원각경’에서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마치 움직이는 눈이 고요한 물을 흔드는 것과도 같고, 또 고요한 눈 속에서 돌아가는 바퀴는 회전하는 불에서 말미암는 것과 같고, 구름이 흘러가니 달이 가고 배가 가니 언덕이 움직이는 것과도 같다.”(‘금강장보살장’)
요컨대 중생이 윤회생사를 겪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흔들리는 마음으로써 세계의 흐름을 겪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눈, 귀, 코, 혀, 피부, 마음의 인식 능력들)에 얽매여 생겨나는 그림자 같은 마음에 지배되어 끝없이 생성하는 것으로서 나타나는 세계를 살아가기 때문인 것이다.
이 내용을 좀 더 풀어서 이해하려면 다음 두 명제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1. 윤회는 망유(妄有, 없음을 있음으로 착각한 거짓된 있음)에의 집념(執念)에서 온다. 2. 망유는 생멸상속으로부터 구성된다.
윤회생사에 대한 표상이 망유에의 집념에서 온다는 것을 ‘원각경’에서는 “망유로 말미암아 생사에 윤회하니, 이를 무명(無明)이라 한다”고 설명한다. “선남자야, 허공에는 실로 꽃이 없는데 눈병이 난 사람이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이니, 이 망집(妄執)으로 말미암아 허공의 자성(自性)만 혼미할 뿐 아니라, 또한 다시 저 꽃이 피는 곳도 혼미한 것이다. 이리하여 허망하게 생사 윤전(輪轉)이 있으므로 무명이라고 부른다.”(‘문수보살장’) 앞에서 생멸상속이 윤회의 길이라 했으니, 망유에의 집념과 생멸상속이 공히 윤회의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자의 관계는 무엇인가. 망유가 생멸상속으로부터 구성된다는 것이 그 답이다. 생멸상속이라는 근저에서 망유가 구성되고, 이 망유에의 집착을 통해 윤회의 길―생사에 윤회한다는 표상과 더불어 사는 삶―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멸상속으로부터 망유가 구성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생멸상속이란 우리의 ‘식’(識)의 작용에 따라 생성하는 것이건만, 거기에서 어떤 고정된 대상들을 구성하려 한다는 것을 뜻한다. 주관적인 인식 조건에 대한 반성의 결여가 객관적 대상의 존재론적 실체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중생은 생성이 없는 곳에서 생성을 본다고 착각하고, 생성을 초월하는 본질들을 헛되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망유에의 집착이 결국 윤회의 과정이라는 착각을 낳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멸상속, 망유, 윤회의 차원, 흐르는 시간의 차원을 벗어나 깨달음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 실마리는 흐르지 않는 시간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인용부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이제 ‘지’라고 하는 것은 다른 ‘지’를 필요로 하는 ‘지’가 아니라 단지 ‘지’ 그것일 따름이니. 하여 앞으로는 멸한 것과 접하지 않고 뒤로는 새로운 것을 일으키지 않아서, 앞뒤가 다 끊어져 그 가운데 홀로 자재하는 것이다.” 이런 흐르지 않는 시간은 일찍이 승조(僧肇), 도겐(道元) 등이 논한 바 있거니와, 청송은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 입각해 이 시간, 깨달음의 시간, ‘있는-그대로의 세계’의 시간을 해명한다. 이 깨달음의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나아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이정우 l 서울대학교에서 미셸 푸코로 학위를 받았다. 대안공간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 강좌를 열었고, 지금은 소운서원에서 후학 양성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철학사’ 4부작(2011~2024)을 펴냈고, 현재는 ‘소운 철학 대계’를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