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신춘문예 당선시

202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3. 24. 10:29

202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셰어 하우스 / 박은우

그늘도 태초엔 빛이었다 신이 자꾸 사람을 빚어

방이 늘어난다

관리자가 저장 강박에 대해 설명한다

누가 열다 만 병조림에서 단내가 흘러나온다

악취는 돌려 쓰는 생활이다

흠집을 무늬로 이해한다 스와핑 스네일링 스너글링 금지

그날그날 달라지는 영역, 새들은 공중을 나눠 쓰다가 둥지를 바꿔 알을 낳는다

산책을 권하는 이가 생긴다면 떠날 때가 됐다는 뜻

일 인분은 양보다 자세의 문제다 거실 벽지는 띠부띠부씰이 아니다 스티커를 한곳에 모아 놓고 보면 어른용 캐릭터 셔츠를 닮았다

바다 뷰는 다음 생에

당분간이다 웰컴티는 우롱차, 여러 마리 길고양이는 모두 누리는 휴식이다 주인 냄새를 지우고 상자 속의 상자 속의 상자가 되는 놀이

정체성은 넣어 두자 약정된 일조량은 하루 늦게 도착하고

신은 그늘을 살피느라 백반증을 앓는다

나는 일반인처럼 웃는 연습을 한다

화분 아래 비상 열쇠와 관람용 바게트빵 방금 건넨 인사는 공동 주방과 어울린다 한쪽 면만 맞춘 큐브와 겹눈 달린 파티션, 휴게실에는

다인용 테이블과 보드게임판 당신이 젠가를 무너뜨려도 빌런 취급하지 않는다 무관심은 너무 많은 눈주름을 가지고 있어서

가지를 볶는 중국식 젓가락이나 포도 물 밴 앞섶에서 취향을 발견하는 것

발견하자마자 못 본 척해 주는 것

발소리마저 죽여 기척을 비인칭으로 변환한다

무음은 누구나 반기는 소음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싶다면 짐을 꾸릴 때가 됐다는 신호다 그림자마저 시끄러운

첫발부터 마지막까지 튜토리얼이다 길들지 않는 이곳은

여행자가 꾸린 가방 속이다

[당선소감]

 

"시집 속 그리운 마녀" 드디어 생긴 문

 

동화 속 마녀의 손톱은 아래로 굽어 있었다. 그녀는 그믐달과 부엉이 눈알과 어린애 심장을 파내 수프를 끓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혼자 놀다 돌아버린 사람, 누구도 보듬어주지 않아 등이 굽은 사람, 망토를 펼쳐 웃풍을 일으키다 자기 손톱에 찔려 죽는 사람이었다.

 

마녀를 고아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마녀는 수다쟁이였다. 예쁜 건 몸에 해롭다거나 이름을 묻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줬다. 사랑하면 먹어 치우라고. 너처럼. 너처럼.

 

끝없이 속살거렸다.

 

내가 자랄수록 마녀는 멈췄다. 한해살이풀은 정말 한 해만 살고 싶은 식물인지 투명 인간도 망토를 다림질해 입고 싶어 하는지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부터 열고 싶은 마음이 문을 만드는 거라고 믿었다. 기다리면 문이 생길 거라고.

 

노크 소리가 들려올 동안 닥치는 대로 시집을 읽었다. 찢어진 마녀, 6기통 마녀, 결식 마녀, 연체된 마녀, 반건조 마녀···

 

시집 속엔 그리운 마녀가 가득했고 난 연필심이 닳도록 그녀를 옮겨 적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나는 마녀일 수 있다. 그들을 파먹으며 살아내고 시를 쓴다.

 

그러니 그대들, 온전하시기를.

 

어머니의 노환이 깊다. 남은 힘을 돌아가는 일에 쓰시려나 보다. 애잔하게 바라볼 뿐이다.

 

사랑하는 영채. 새해에도 건강하고 아름답기를.

 

책장에 꽂힌 셀 수 없는 시인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나를 호명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부산일보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박은우 시인

 

충남 온양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시 심사평

 

 

뿌리뽑힌 현대인, 그 존재 방식 표현

 

 

올해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투고작은 601명의 2506편이다. 신춘문예란 성격을 고려하여 작품의 완성도, 창의적 발상, 사회적 문제의식 등을 선정기준으로 정하고 심사에 임하였다. 그 결과 남호순의 ‘우주설비’, 전병숙의 ‘야간 보안대원 Kim’, 차정희의 ‘항상성’, 전재운의 ‘화해’, 박은우의 ‘셰어 하우스’가 최종 심의 대상이 되었다. 모두 당선작으로 할 만한 작품이었지만, 심사 기준을 고려하여 박은우의 ‘셰어 하우스’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우주설비’는 보일러 수리공의 삶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점이 돋보였으나, 너무 이미지의 참신함에 치우쳐 사회적 삶이 관념적으로 제시되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야간 보안대원 Kim’ 역시 하층 노동자의 삶을 참신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으나, 표현의 긴밀성이 떨어지고 의미 전달이 모호해지는 부분들이 아쉬운 점으로 언급되었다. ‘항상성’은 현대적 삶을 살아가는 당대인의 심정을 매우 아름다운 표현으로 담아내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지만, 동시대적 문제에 대한 사색이 빈약해 보이는 점이 약점으로 논의되었다. ‘화해’는 이사가 잦은 현대적 삶의 문제를 탁월한 이미지와 따뜻한 시각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관심을 끌었으나, 시적 전개에서 표현의 긴밀성을 깨뜨리고 있는 부분이 아쉬운 점으로 지적되었다.

 

박은우의 ‘셰어 하우스’는 현대인의 불안한 주거방식을 “악취는 돌려쓰는 생활이다”, “첫발부터 마지막까지 튜토리얼이다” 등 촌철살인의 포착과 깊은 사색을 통해 뿌리뽑힌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잘 표현하고 있고, 시적 발상의 정합성과 표현의 긴밀성을 잘 살려냄으로써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셰어 하우스’를 당선작으로 정하자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는 정진하여 한국 시단의 별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김경복 문학평론가, 신정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