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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세월이 가면' 작사, 1970년대 히트곡으로… '목마와 숙녀' 시인 박인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3. 20. 13:45

술집에서 '세월이 가면' 작사, 1970년대 히트곡으로… '목마와 숙녀' 시인 박인환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56년 3월 20일 30세

입력 2026.03.20. 05:00업데이트 2026.03.20. 09:31
 
 
 
박인환문학관 마당에 서 있는 시인 박인환의 동상.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1926~1956)은 서른 살 때인 1956년 3월 20일 서울 세종로 자택에서 급서했다. 선배 시인 이상을 기린다며 사흘간 폭음했다고 한다. 사망 아흐레 전 조선일보에 그의 시가 실렸다. 고향 강원도 인제를 제목으로 한 시 ‘인제’였다.

인제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철렵 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아무도 모르는 산간 벽촌에
나는 자라서
고향을 생각하며 지금 시를 쓰는
사나이
나의 기묘한 꿈이라 할까
부지럽고나.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엔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
눈 이여
옛날 시몽의 얼굴을 곱게 덮혀준
눈 이여
너에게는 정서와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
(1956년 3월 11일 자 4면)
1956년 3월 11일자 4면.

박인환은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종로에 책방 ‘마리서사’를 열었다. 많은 문인이 드나들며 친교를 맺었다. 180㎝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 술 좋아하고 말을 잘해 인기가 있었다. 나이가 많은 선배 문인에게도 반말을 하며 스스럼없이 대해 때로는 무례하다는 평도 들었다. ‘명동 백작’ ‘댄디 보이’ 같은 별명을 얻었다. ‘명동 백작’은 기자이자 소설가로 에세이 ‘명동 20년’을 남긴 이봉구의 별칭이라고도 한다.

1956년 9월 29일자 4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1970년대 박인희가 불러 히트한 이 노래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일화는 박인환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관련 기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에피소드다. 2004년 EBS 드라마 ‘명동 백작’에도 일화로 등장한다.

1956년 박인환이 명동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취기가 돌자 시를 쓰고 극작가 이진섭이 곡을 붙였다. 마침 자리에 있던 가수 나애심이 악보를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때 술집이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이라고도 하고 또는 ‘경상도집’이었다고도 한다. 테너 임만석이 노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76년 3월 19일자 5면.

1976년 박인환 20주기를 맞아 소설가이자 조선일보 논설위원 송지영은 ‘세월이 가면’이 탄생한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서 일화를 소개했다. 현장 증언이니 아마도 가장 원형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박(인환) 시인이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우리들이 잘 모이던 동방살롱에서 인환, 진섭, 나애심, 나 넷이 만나 그냥 헤어지기 서운하니 아무 데서나 한잔 하자고 하여 바로 길 건너 대포집으로 들어가 (중략) 박 형은 취흥을 빌어 즉석에서 가사를 썼고 진섭 형이 또한 그 자리에서 곡을 만들었다. 가사와 곡을 들여다보며 나 양은 저절로 흥이 솟구쳐 그 맑고 구성진 목청으로 노래를 불렀다. (중략) 그날 밤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오늘까지도 널리 애창되는 ‘세월이 가면’인 줄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1976년 3월 19일 자 5면)

 
1955년 5월 13일자 4면.

시인 김수영과는 절친한 친구였다가 사이가 틀어졌다. 김수영은 “어떤 사람들은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라고 비판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와 숙녀’ 일부).

1955년 7월 24일자 4면.

박인환도 김수영을 은근히 조롱했다.

“6·25때 북한 의용군에 끌려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 생활을 거친 시인 김수영은 포로 체험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었다. 문단 모임에서 그가 6·25때 어디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금기 사항에 속했다. 한편 ‘목마와 숙녀’의 시인 박인환은 김수영과 친구이자 경쟁 관계였다. 어느날 박인환이 현란한 수사학이 넘치는 시를 발표하자, 김수영이 그 중 한 단어를 두고 도대체 무슨 뜻이냐며 은근히 힐난했다. 박인환이 받아쳤다. “그건 네가 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 생긴 말이야.””(1999년 4월 27일자 35면)

1955년 11월 28일자 4면.
 

박인환은 6·25전쟁 이후 시인이자 영화 평론가로 활동했다. 조선일보에도 여러 차례 기고했다. 1955년 19일간 미국을 여행하고 쓴 ‘19일간의 아메리카’(1955년 5월 13일·17일), 영화 평론 ‘시네마 스코프의 문제’(7월 24일), ‘서구와 미국 영화’(10월 9일·11일), 시론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11월 28일·29일) 등이다.

타계 두 달 전 첫 시집 ‘박인환 선시집’을 냈다. 소설가 겸 문학평론가 홍효민은 조선일보에 기고한 시평에서 “이 시인은 참으로 시를 주무를 줄 알고 시를 다룰 줄 안다. 시란 언어의 주옥(珠玉)이다. 언어가 주옥 같이 되지 않고는 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면서 “시인의 황금시대가 되어 우리나라의 ‘루넷쌍스’가 이루어지기를 이 시집을 읽고 다시금 느끼었다”(1956년 1월 22일자 4면)고 적었다.

타계 6개월 후인 1956년 9월 망우리 묘지에 이봉구를 비롯한 동료 문인들이 ‘세월이 가면’ 일부 구절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2012년 인제에 박인환문학관이 개관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