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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시 한 편 외우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1. 4. 22:25

[에디터 프리즘] 

‘얼떨결에’ 시 한 편 외우기
중앙선데이 입력 2026.01.03 00:30 업데이트 2026.01.03 10:07
서정민 기자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의 첫 구절이다. 매일 반복되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소소한 행동이 거대한 지구의 한 부분을 바꿀 수 있다는 시인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시를 알게 된 건 지난해 11월 사진가 김녕만을 인터뷰하면서다. 당시 그는 2023년부터 2년 간 격주로 본지에 게재했던 사진과 짧은 에세이를 묶어 사진집 『사진의 향기』를 출간했다. 대학 졸업 때까지 카메라를 가져본 적 없는 ‘촌놈’이 어떻게 사진을 찍게 됐는지부터 각양각색 사진의 뒷이야기들을 듣다가 “좋은 기록사진이란 뭔가” 물었다. 그는 빙그레 웃더니 “나태주 선생 초청으로 공주문화원에서 사진 강의를 했을 때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며 “내 주변의 한 모퉁이를 찍었더니 대한민국의 역사 중 한 모퉁이를 기록하게 됐다” 답했다고 했다. 선생의 시를 인용한 대답이 위트 넘치는 김 사진가답다.

2026 트렌드 ‘AI보다 아날로그 감성’
시 속에서 아름다운 메시지 발견하길

지난해는 유난히 ‘시’를 사랑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 가만히 있기도 더운 한여름에 ‘시경(詩經)’을 읽자는 기획을 했고 김영죽 성균관대 동아시아미래가치연구소 책임연구원에게 글을 부탁했다. ‘산울림’의 둘째인 가수 김창훈씨도 시 때문에 만났다. 당시 그는 1000편의 시에 1000개의 곡을 붙여 ‘시노래’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끝내고 콘서트를 앞두고 있었다. 기사에는 미처 소개하지 못했지만 1000개의 시를 선정하기 위해 그가 들인 노력은 실로 엄청났다. 해방 이후부터 각종 책과 자료를 찾아 1000명의 시인을 찾았고, 그들의 수많은 작품을 일일이 읽은 후 마음을 울리는 시 딱 한 편만 짚어내는 작업을 그는 5년간 반복했다.

“기자님은 어떤 시를 외우시나요?”

이 질문을 예상은 했지만 답을 미리 준비할 수 없었다. 서점에서 시집을 산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외우고 있는 시가 있을까. 질문에 그럴싸하게 대답하기 위해 시 한 편을 급히 외워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뒀다. 짧은 시 한 편을 대충 찾아 외워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옹색한 대답이 “정현종 시인의 ‘좋은 풍경’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시를 다 외우진 못하지만 ‘얼떨결에’라는 단어가 너무 인상적이어서요”였다.

나무 밑에서 ‘그 짓’을 하는 남녀 한 쌍 때문에 밤나무는 여러 날 걸려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았다는 내용이다. ‘얼떨결에’라는 단어와 밤나무의 당황스러움이 어찌나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지, 시 전체를 외우진 못해도 정말 ‘좋은 풍경’으로 기억하고 있는 시다.

새해 벽두부터 ‘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이 올해 하고 싶은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때이기 때문이다. 새해에 유행할 여러 가지 트렌드를 예측하는 책들에선 AI라는 혁신기술이 숨 가쁘게 현실을 바꿔놓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아날로그 감성에 집중할 거라고 한다. 실제로 소셜 빅데이터상에선 아날로그 연관어로 ‘LP’ ‘필름 카메라’ ‘뜨개질’ ‘다이어리’ 등이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출판 시장에서도 좋은 글귀들을 모아 묶은 후, 한쪽 면을 공백으로 비워 독자가 직접 문장을 따라 써보는 ‘필사’ 책들이 이미 여러 권 출간됐다.

사람들이 프롬프트 한 번이면 최상의 대답을 찾아내놓는 AI의 기술에 의존하기보다,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쓰며 좋은 글귀를 읊조리는 자신의 손에 더 충실하길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시인들이 단어 하나하나 고민을 거듭하며 심어 놓은 아름다운 문장을, 무릎 탁 치게 하는 메시지를 시 한 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새해의 시작이 얼마나 풍성하고 향기로울까.

나태주 시인도 시 ‘마당을 쓸었습니다’ 뒷 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서정민 문화에디터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94775

 

[에디터 프리즘] ‘얼떨결에’ 시 한 편 외우기 | 중앙일보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질문에 그럴싸하게 대답하기 위해 시 한 편을 급히 외워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뒀다. 이런 과정에서 시인들이 단어 하나하나 고민을 거

www.joongang.co.kr

참고

좋은 풍경


정현종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