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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언어에 지친 국민들… 화해의 등불 밝히고 '최초의 악수' 나누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6. 5. 16:42

증오의 언어에 지친 국민들… 화해의 등불 밝히고 '최초의 악수' 나누자

[윤동주 80주기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6] 쉽게 씌어진 시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입력 2025.06.04. 23:56업데이트 2025.06.05.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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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1942. 6. 3.

일러스트=이철원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처럼 마음 안에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넘어서서 자아의 합일에 이를 수는 없을까? 윤동주의 시를 보면 여러 작품에서 자아의 갈등 양상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상반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고(‘자화상’), 십자가에 오르지 못하고 망설이는 ‘나’와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겠다는 ‘나’로 분열된 의식을 드러내기도 하고(‘십자가’), 백골처럼 무력하게 누워 있는 ‘나’와 그것을 보고 눈물짓는 또 다른 ‘나’ 사이의 갈등을 나타내기도 했다(‘또 다른 고향’). ‘쉽게 씌어진 시’는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는 모습이 담긴 중요한 작품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릿쿄대학에 다니던 1942년 초여름의 비 오는 밤에 썼다. 이때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중심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역설하며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시를 쓰는 윤동주의 모습은 나약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존재가 바닥으로 점차 가라앉아 간다고 생각하고, 외롭게 시를 쓰는 자신을 슬프고 부끄러운 존재로 표현했다. 이러한 무력감 속에서 밤비가 속살거리는 가운데 떠오른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인식은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육첩방’이란 여섯 개의 다다미를 깐 작은 방을 뜻한다. 이 평범한 방이 ‘남의 나라’로 느껴진다는 말은 일제강점기 현실에 대한 자각과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자아의 불안감을 함께 드러낸다.

깊은 고민 끝에 그가 도달한 ‘나’의 모습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나’다. 이것이 시인이 도달할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것이기에 “최후의 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시행에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라는 구절을 새겨 넣었다. 자신을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로 보는 ‘나’와 현재 상태를 넘어서서 옳은 길로 나아가려는 ‘나’가 화합을 이루는 장면이다. 이 표현 속에 자아의 갈등과 분열 속에 보낸 숱한 고뇌의 나날들이 응축되어 있다. 태평양전쟁의 불길이 무섭게 타오르던 1942년 6월 3일 일본의 수도 한 하숙방에서 윤동주는 비로소 번민을 극복하고 자아의 합일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무력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눈물과 위안으로 감싸안고 하나가 되려 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모는 일, 작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나누는 일이다. 우리 사회는 갈등의 골이 깊고 대결의 단층이 날카롭다. 증오의 언어에 지친 국민은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있을까? 현재 상태를 이대로 답습할 수는 없다. 윤동주가 그랬던 것처럼, 어둠을 조금이나마 내몰 수 있도록 화해의 등불을 밝히고, 서로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나눠 보는 것은 어떨까?

정지용 “淫虐한 주사 한 대, 원통한 나이 29세로 갔다”… 미제로 남은 생체실험 의혹

윤동주의 시를 보관하고 있던 친구 강처중이 해방 후 경향신문사에 취직해 주필 정지용에게 보여주자, 정지용은 ‘쉽게 씌어진 시’를 1947년 2월 13일 자 ‘경향신문’에 게재하고 가슴 아픈 촌평을 남겼다. 그 기사에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 재학 중 일본 헌병에게 잡히어 무조건 2개년 언도, 후쿠오카 수용소에서 복역 중 음학(淫虐)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원통하고 아까운 나이 29세로 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음학한(음흉하고 잔혹한) 주사 한 대를 맞고 윤동주가 절명했다고 언급한 것이다.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는 1943년 7월에 교토에서 체포돼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12월에 검찰로 송치되었고, 1944년 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한 달 이상의 재판을 받은 후 윤동주와 송몽규는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후쿠오카 형무소에 함께 수용되어 복역하다가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새벽 세상을 떠났고 송몽규도 1945년 3월 7일 같은 감옥에서 사망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부친과 당숙이 형무소에 갔을 때 송몽규를 면회했다. 단단하던 송몽규의 모습이 너무나도 피폐해 있어 이유를 묻자, 저들이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동주도 죽고 자신도 몸이 쇠약해졌다고 했다. 이 말이 세상에 알려져 두 사람의 죽음이 생체 실험의 결과라는 의혹이 널리 퍼졌다. 앞에 인용한 정지용의 말도 유족의 증언을 듣고 나온 말일 것이다.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 형무소 근처에 있던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 개발을 위해 생체 실험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밝혀진 사례는 아직 없다.

[윤동주와 사람들]

외삼촌 김약연은 명동학교 설립한 독립운동가… 윤동주 애국혼을 키웠다

19세기 중엽 만주 동쪽 북간도 지역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물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시작했다. 하천 유역에 논을 만들고 벼를 경작하자 원주민들은 척박한 땅에 벼농사가 되겠느냐고 비웃었지만, 한국인 특유의 끈질긴 노력으로 벼농사에 성공했다. 쌀이 만주 농업 경제의 상위에 오르면서 한국인 마을은 경제적 부를 획득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인들은 학교를 세우고 후세 교육에 주력했다. 만주의 척박한 땅에서 한국인 DNA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윤동주 집안은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가 함경북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로 이주했고 1900년 조부 윤하현 때 명동촌에 정착했다. 1899년 함경북도에서 명동촌으로 이주한 한학자 김약연이 명동학교를 세우고 기독교에 입교하자 윤하현 집안도 기독교에 입교했다. 기독교 신앙으로 결속한 한국인 마을 명동촌에서 1910년 윤하현의 아들 윤영석과 김약연의 여동생 김룡이 결혼했고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가 출생했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독립기념관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1868~1942)은 일찍이 신학문 전수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교육 사업에 주력했다. 명동학교를 개설해 유능한 교사를 배치하고 교장을 맡아 학교를 운영했다. 1910년 한국인 자치 기구가 결성되자 대표직을 맡아 ‘북간도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됐을 때 공동 대표 39인의 하나로 이름을 올렸고, 그해 3월 용정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세의 변화로 명동학교 운영이 어려워지자,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 연수를 받고 1930년 명동교회 목사가 되어 한국인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다. 명동에서 용정으로 이주한 후에도 목회를 운영하며 은진중학교 이사장을 맡아 전도와 교육에 전념했다. 윤동주는 김약연이 세우고 운영한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를 다녔고 명동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 윤동주에게 김약연의 정신과 활동이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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