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편지

오래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 잎 위에 피어난 특별한 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5. 13. 12:04
 

[나무편지] 오래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 잎 위에 피어난 특별한 꽃

   ★ 1,287번째 《나무편지》 ★

   먹을 걸 탐하지 않으면서 가만가만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식물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제 몸을 유지할 영양분,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필요한 에너지를 얻으려 분주히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나 동물과 달리 가만히 스스로 제게 필요한 영양소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다르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지않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건 똑같습니다. 식물이 고요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초록의 잎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김새와 빛깔은 제가끔 달라도, 제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잎이 똑같습니다. 잎 위에 비쳐든 햇살이 더 신비롭고 예뻐 보이는 건 어쩌면 말없이 잎이 생명의 양식을 지어내는 첫 순간인 때문일 겁니다.

   잎들의 활동은 놀라울 정도로 왕성합니다. 지구 전체에 살아있는 식물의 잎들은 해마다 약 2천억 톤의 당을 생산할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잎 위로 내리 쪼이는 햇살 한 가닥까지도 소중하게 모아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을 먹여 살립니다. 아름다움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이뤄내는 소중한 근원이라는 점에서도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은 지치지 않고 늘 즐겁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생명의 에너지를 넉넉히 충전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결코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가만히 나뭇잎 가까이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의 양식을 지어내는 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식물의 잎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식물이 있습니다. 아마도 잎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특별함 가운데에 가장 극단적이지 싶어서 ‘궁극의 잎’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잎입니다. 루스쿠스 종류의 잎이 그것입니다. 우리 땅에 자생하지 않아서 쉽게 만날 수는 없는 식물입니다. 작은 키의 식물 루스쿠스가 살아있는 우리 수목원을 가게 되면 언제라도 그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며칠 전에 천리포수목원을 찾았을 때에도 루스쿠스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즈음이면 분명 그 잎이 왜 궁극의 잎으로 불러야 하는지의 신비로운 광경을 보여주리라 생각한 때문에 더 그랬습니다.

   루스쿠스는 유럽의 서부에서 남부를 비롯해 북서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로 잘 자라야 일 미터 정도까지 자라는 게 고작인 상록성 작은키나무입니다. 이 나무가 특별한 건 바로 잎입니다. 여느 식물에서 관찰할 수 없는 독특함을 가진 잎이지요.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관찰하지 않는다면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겨울정원 한켠 길섶에 자리잡고 자라는 식물이지만, 이 숲을 찾으신 분들도 루스쿠스 잎의 신비로운 모습을 지나치기 십상입니다. 루스쿠스는 고작해야 어른 무릎쯤도 안 되는 오십 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거든요. 눈길을 끄는 키 큰 식물들 사이에 납작 주저앉아있는 셈이지요. 쪼그리고 앉아서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습니다.

   루스쿠스의 잎에는 다른 식물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잎의 한가운데에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작은 잎이 반대 방향으로 돋아나 있거든요. 잎 위에 또 하나의 잎. 여느 식물의 잎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특별하달 수 있는데, 꽃 피어날 때에는 더 놀랍습니다. 루스쿠스의 꽃은 잎에서 솟아난 또 하나의 작은 잎 아래 쪽에 숨어서 피어납니다. 서서 아래 쪽을 내려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잎 위의 잎을 우산처럼 뒤집어쓰고 아주 자잘하게 피어나기 때문에 위에서는 보이지 않거든요.

   이맘 때가 바로 루스쿠스의 꽃이 피어나는 시절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잎 위의 잎 그 사이에서 앙증맞은 꽃이 피어난 겁니다. 잎 한가운데에서 또 한 장의 잎을 거꾸로 돋워내면서 그 사이에서 피운 꽃입니다. 가운데에 꽃술이 모여있고, 그 바깥으로 여섯 개의 꽃잎을 갖춘 꽃입니다. 꽃 부분을 잘 보실 수 있도록 근접해 촬영한 사진이지만, 실제로는 이 꽃송이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꽃잎 한 개의 길이가 대략 5밀리미터도 채 안 되는 정도입니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오래 바라보아야만 보이는 경이로움입니다.

   이 앙증맞은 꽃이 진 다음에는 당연히 다른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힙니다. 열매는 일 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작은 크기의 동그란 구슬 모양입니다. 우리 눈으로는 초록의 크고 작은 잎 사이에서 빨갛게 맺힌 구슬 모양의 열매 또한 놀랍고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제 그 빨간 열매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의 식물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앞에 오래 머물러야 하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온 몸으로 다가서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루스쿠스 작은 꽃 앞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루스쿠스 앞에 발이 저릴 정도로 오래 쪼그리고 앉아서 이 작은 꽃송이에 눈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어느 곳에서라도 다른 생명체와 충분히 느낌을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5월 12일 아침에 1,287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