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 이야기

'앙큼하도록 농밀한' 은방울꽃 향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5. 8. 14:46

'앙큼하도록 농밀한' 은방울꽃 향기

[김민철의 꽃이야기]

<236회>

입력 2025.04.29. 00:05
 
 

박완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소설에 유난히 꽃이 많이 나오네’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싱아·박태기나무·능소화와 함께 요즘 막 피기 시작한 은방울꽃도 박완서 소설에 많이 나오는 꽃 중 하나다.

작가의 연작소설 중 하나인 ‘저문 날의 삽화 5’는 필자가 읽어본 소설 중에서 은방울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이 소설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 서울을 벗어난 교외에서 조용히 사는 은퇴 공무원이다. 자식들을 분가시키고 조금 외롭지만 편안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 숲과 나무를 보며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특히 가까운 계곡에 있는 은방울꽃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요즘 막 피기 시작한 은방울꽃. 향기가 참 좋다.

 

◇‘은방울꽃 황홀경’

<봄이 끝나갈 무렵 계곡을 감미롭고 환상적인 향기로 가득 채우는 은방울꽃에 대해선 그만이 알고 있었다. 밋밋하게 웅덩이가 진 골짜기는 은방울꽃 군생지였다. 넓고 건강해 보이는 잎 사이에 숨다시피 고개를 숙이고 피는 작다란 흰꽃 어디에 그런 요요하고 강렬한 향기의 꿀샘이 있는지, 그 골짜기는 눈 감고도 찾을 수가 있었고 그 한가운데 들면 생전 못 빠져나가지 싶은 공포와 절망에 가까운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이처럼 좋은 자연환경에서 노년을 보내는 부부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우리 식구가 순서껏 죽게 해달라’는 아내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기도를 거스르는, 뜻밖의 반전이 부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은방울꽃. 작은 꽃송이들은 여섯 갈래의 잎끝이 뒤로 살짝 말려 있다.

 

작가의 대표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은방울꽃이 나오고 있다. 일제 말기, 작가가 숙명고녀에 다니다 고향에 내려가 머문 시절에 우연히 산길에서 발견한 꽃이었다.

<혼자서 산길을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음습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진하면서도 고상한, 환각이 아닌가 싶게 비현실적인 향기에 이끌려서였다. 그늘진 평평한 골짜기에 그림으로만 본 은방울꽃이 쫙 깔려 있었다. 아니 꽃이 깔려 있다기보다는 그 풍성하고 잘생긴 잎이 깔려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밥풀만 한 크기의 작은 종이 조롱조롱 맺은 것 같은 흰 꽃은 잎 사이에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앙큼하도록 농밀한 꿀샘을 가지고 있었다. 은방울꽃은 숙명의 교화(校花)였다.>

 

◇금방이라도 딸랑딸랑 울릴 듯

 

작가가 쓴 에세이 ‘꽃 출석부’를 보면 노년을 보낸 구리 아차산 아래 노란집 마당에도 은방울꽃을 심은 것을 알 수 있다. 은방울꽃은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나무가 들어찬 숲속이나 숲 가장자리, 물 빠짐이 좋은 반그늘이 은방울꽃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서울대공원에서 출발해 청계산을 오르다 보면 매봉 조금 못 가서 상당히 큰 은방울꽃 군락지를 만날 수 있다.

 
요즘 막 피기 시작한 은방울꽃. 향기가 참 좋다.

은방울꽃 꽃송이들은 작은 데다 넓적한 두 갈래 잎새 뒤에 숨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서둘러 지나가는 사람은 은방울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두 갈래 잎새를 들추면 작고도 순결한 백색의 꽃들이 조랑조랑 매달려 있다. 은방울꽃이란 이름은 이 꽃의 모양을 따 붙인 것이다. 작은 꽃송이들은 여섯 갈래의 잎 끝이 뒤로 살짝 말려 있다.

이 은방울꽃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딸랑딸랑!’ 하고 맑은 은방울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은방울꽃은 소설에 나오는 대로 향기도 참 좋다. 이 은방울꽃 향기로 고급 향수를 만든다. 이 꽃으로 결혼식 날 신부의 꽃다발을 만드는 것도 순백의 색에다 이 향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지고 나면 한두 달 지나 빨간색의 동그란 열매가 매달리는데, 그 모습 역시 꽃쟁이들이 담고 싶어 하는 사진 중 하나다. 다만 은방울꽃은 생긴 것과는 달리 독성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잎이 산마늘(명이나물)이나 박새와 비슷한데, 잘못 먹으면 심부전증을 일으켜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독성 식물이다.

앙증맞은 은방울꽃이 회사 화단에도 피기 시작했다. 수줍은 듯 고개 숙인 모습이 참 귀엽다. 은방울꽃을 만나면 바닥에 엎드려서라도, 박완서 작가가 ‘앙큼하도록 농밀’하다고 표현한, 진하면서도 맑은 은방울꽃 향기를 꼭 음미해보기 바란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위주로, 꽃이야기와 빛깔, 향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