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편지

[나무편지] 오래된 옛 일 떠올리게 하는 우리 땅의 우리 봄꽃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4. 22. 10:57

[나무편지] 오래된 옛 일 떠올리게 하는 우리 땅의 우리 봄꽃들

   ★ 1,284번째 《나무편지》 ★

   전라북도 진안 정천면의 옥녀봉 자락에 자리잡은 ‘진안고원 치유숲’을 다녀왔습니다. 나무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어려운 상대라 할 수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나무 이야기를 나누고, 숲길을 함께 걸으며 나무를 살펴보는 일이 있어서였어요. 걱정 많았지만, 총명한 아이들 덕에 생각보다 즐겁고 보람된 시간이었습니다.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어린 아이들과 함께 숲 속을 걸으며 자연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람살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어린 시절에 겪게 되는 자연 체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의 밑거름이 된다는 레이첼 카슨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 건 자연스런 순서였겠지요.

   아이들과 걸으며 길섶에 피어난 ‘철쭉’ 꽃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철쭉’과 ‘진달래’를 구별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뜻밖에도 곧바로 아이들이 정확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참 총명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진달래 지고 피어나는 철쭉 꽃으로는 조금 이르게 피어난 것 아닌가 생각하면서 이 봄에 만난 진달래 꽃들이 떠올랐습니다. 전해드리고 싶은 봄꽃들이 워낙 많은 탓에 진달래는 일쑤 젖혀놓지 않았나 싶어서 더 그랬습니다. 진달래야말로 우리 산천의 봄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바로 우리의 나무, 우리의 꽃이지만, 너무나 흔한 탓에 그런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나무편지》는 이 봄에 만난 우리의 꽃, 진달래 꽃으로 열었습니다.

   이 땅의 봄을 상징하는 여러 봄꽃이 있지만, 우리네 봄의 상징은 뭐니뭐니 해도 진달래와 개나리 아닐까요. 진달래와 개나리만큼 우리 민족의 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봄꽃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적 느낌 때문일 수 있습니다. 개나리에 얽힌 경험이 조금 남다르긴 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까지 내가 다닌 모든 학교의 교목(校木)이나 교화(校花)가 모두 개나리였거든요. 혹시 해서 지금 그 학교들의 홈페이지를 하나하나 찾아보았습니다. 기억대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화는 개나리가 맞는데, 내가 다닌 초등학교의 교목 교화는 ‘소나무’ ‘장미’로 돼 있고, 대학교의 경우는 아예 확인할 수도 없네요. 심지어 그 똑똑하다는 AI도 “확인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내 기억에 오류가 생긴 건 아닐 게 확실합니다. 초등학교를 떠나온 게 육십 년 가까이 됐으니, 그 사이에 어떤 이유로 바뀐 걸로 생각됩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세상의 한 집단에 처음으로 속했던 어릴 때에는 그 집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잖아요. 학교를 나타내는 모든 것을 줄줄 외는 걸 자랑삼지 않았던가요? 아무리 오래 전의 이야기라지만, 그때의 사정은 분명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개나리는 우리, 최소한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 안에 선명한 노란 색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학교가 아니라 해도 우리 땅 어디에서도 개나리 없는 봄은 없을 겁니다. 도시 시골 할 것없이 모두가 당연히 우리 곁에 있어야 할 봄꽃입니다.

   이 봄의 꽃을 이야기할라치면 ‘벚나무’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지난 주말에 비 내리고 바람 불어 집앞의 벚꽃은 모두 꽃잎을 떨구었습니다. 화려하게 꽃 피웠던 집 앞의 벚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니, 꽃잎은 하나도 남지 않고 꽃받침만 또 하나의 자디잔 꽃처럼 연둣빛 잎사귀 사이로 점점이 남아있었습니다. 내 집앞뿐 아니라 어디에서라도 지금은 벚나무 꽃잎은 모두 떨어졌겠지요. 주말에 비바람까지 불어왔으니 더 그럴 겁니다. 우리의 봄은 벚꽃과 함께 해온 게 분명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 어린 시절인 육십년 전쯤에도 벚꽃을 찾아 나들이를 하곤 했습니다. 가만히 눈 감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벚꽃 핀 어느 봄 날, ‘서울구경’하러 나섰던 오래 전 사진을 떠올려보게 됩니다.

   꽃 피는 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워진 때문에 요즘은 지자체마다 벚꽃 잔치 시기를 잡는 게 아슬아슬합니다. 지난 해에는 대개의 지자체들이 벌이는 벚꽃 잔치 기간에 꽃이 피지 않아 당황했다는 소식이 많았는데요. 올 봄에는 그나마 잔치 중에 꽃이 활짝 피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벚꽃은 굳이 일정한 잔치 장소를 찾아가지 않는다 해도 어디에서든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거 아시나요? 벚나무가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나무의 순위에서 소나무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는 것 말입니다. 벚나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갤럽 조사에서 그렇게 나온 건 몇 해 전일 뿐이지요. 그게 어쩌면 ‘벚꽃’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 때문이기도 싶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좋아하는 꽃인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봄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흔히 볼 수 있는 풀꽃으로는 ‘수선화’를 꼽게 됩니다. 개나리 진달래처럼 우리 땅에서 오래 함께 한 풀꽃이 아니어서, 지금도 아무데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은 물론 아닙니다. 물론 오래된 노래 가운데에 ‘수선화’를 노래한 대중가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외국 노래를 번역한 노래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식물원 수목원에서라면 빠짐없이 보게 되는 봄꽃이 수선화입니다. 그저 노란 색 배경으로만으로도 봄 빛을 더 없이 아름답게 하는 꽃입니다만, 수선화 꽃은 한 송이 한 송이를 꼼꼼히 바라보면 더 예쁘고 더 특별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여느 꽃송이들과 달리 나팔 모양으로 봉긋 솟아난 꽃송이를 한참 바라보면 꽃송이 안쪽에서 봄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향긋하게 울려퍼질 듯합니다.

   이른 아침에 드리던 《나무편지》가 오늘은 조금 늦었습니다. 언제나 봄이면 그렇지만, 이 봄은 유난스레 분주하네요. 지난 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몸이 느려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무편지》 한 통, 편안하고 넉넉하게 쓸 시간이 점점 모자라집니다.

   오늘 《나무편지》는 우리의 봄을 우리답게 하는 꽃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진달래, 개나리, 벚나무, 수선화. 이 봄의 풍경을 이야기할 때에 빠뜨릴 수 없는 아름다운 꽃들입니다. 《나무편지》 덕에 육십년 전의 초등학교를 비롯해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사십년 전의 대학교 홈페이지까지 들어가 옛 일 떠올렸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운 얼굴 담긴 옛날 사진을 한참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나무와 꽃은 그저 식물이 아니라, 사람살이를 오래 기억하게 한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떠올린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4월 21일 아침에 1,284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