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편지

[나무편지] 봄의 발걸음을 재우치며 피어난 할미꽃에서 얼레지까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4. 14. 15:03

[나무편지] 봄의 발걸음을 재우치며 피어난 할미꽃에서 얼레지까지

   ★ 1,283번째 《나무편지》 ★

   계절의 흐름이 빨라진 것과 정반대로 사람의 발걸음은 느려졌습니다.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입니다. 잘 채비해두고도 떠나지 못하는 일이 생각보다 잦아져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 한창 마무리 중인 새 책과 관련한 일이 밀려 있다는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고, 예상치 않았던 이런저런 사정이 자주 벌어지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천생 게으름의 관성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 머뭇거리는 사이에 세찬 비바람 몰아치고, 강산을 화려하게 물들인 봄꽃들이 속절없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결국 목련 잔치가 한창인 천리포수목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봄볕 아쉬워 하릴없이 가까이 찾아갈 수 있는 인천 장수동의 ‘인천수목원’에 다녀왔습니다. 지금 이 땅의 어디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인천수목원에서도 하얀 목련이 한창입니다. 나라 안의 여느 식물원 수목원에 비하면 전체 면적도 작고, 찾아볼 수 있는 식물 종류도 그리 많은 건 아닙니다만, 환히 스민 봄빛을 느끼기에는 넉넉해서 좋았습니다. 평일 한낮이었는데도 봄마중에 나선 상춘객들로 넓은 주차장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백목련과 함께 봄마중에 나선 여러 종류의 풀꽃들을 반가이 만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낮은 키로 땅 가까이에서 피어난 작고 예쁜 꽃을 바라보려면 그 작은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도 한참 수그려야 합니다. 그렇게 만난 여러 가지 꽃들 가운데에 ‘할미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허리가 꼬부라진 채로 흰 머리카락으로 가득 덮인 머리를 수그리고 피어난다고 해서, 또 이 꽃 지고나면 맺히는 열매가 흰 머리카락이 뭉친 듯해서 할머니를 떠올리고 ‘할미꽃’이라 부른 우리의 풀입니다. 예전에 한자로 노고초(老姑草), 백두옹(白頭翁)이라고 썼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할미꽃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무엇보다 꽃송이 안쪽의 노란 꽃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낮은 키인데다 고개를 푹 숙이고 피어나는 까닭에 할미꽃의 꽃송이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죠. 꽃송이 안을 들여다볼 요량으로 가만히 피어있는 꽃송이를 들척거리는 일도 할미꽃을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요. 그래도 가끔은 고개를 덜 숙인 꽃송이를 찾아내 한참 바라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흰 머리카락으로 가득 덮인 보랏빛 꽃잎 안쪽에 노란 꽃술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바라보자면 할미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속내를 숨기고 있는 할미꽃을 더 잘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우리의 토종 풀꽃 가운데에는 아예 고개를 바짝 쳐들고 피어나는 할미꽃이 있습니다. 바로 ‘동강할미꽃’입니다. 강원도 영월 동강 지역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이어서 아예 ‘동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 토종 풀꽃입니다. 우리 ‘할미꽃’에서 제대로 보기 어려웠던 꽃송이 안쪽을 들여다볼 기회입니다. ‘동강할미꽃’은 할미꽃 종류이지만 꽃대를 구부리지 않고 곧게 선 채로 꽃대를 올리고 하늘 향해 혹은 바라보는 사람을 향해 꽃잎 펼치고 눈맞춤을 합니다. 보랏빛 꽃잎 안쪽의 노란 꽃술이 참 예쁩니다.

   동강 지역 외에서는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꽃이 아니건만 인천수목원에서 넉넉히 만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꽤 지난 이야기입니다만, 천리포수목원의 숲길 한켠에서 자라던 동강할미꽃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이 아니어서, 오붓하게 이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요. 그 꽃이 활짝 피고난 바로 뒤에 다시 꽃을 찾았는데, 글쎄 그 동강할미꽃이 뿌리째 뽑혀나가고 없었어요. 누군가가 그야말로 ‘도둑질’을 해서 훔쳐간 거였어요. 최근 들어 좀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렇게 수목원에서 식물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엊그제 인천수목원에서 또 반가이 만난 봄꽃으로 ‘얼레지’가 있습니다. 혹시 지난 해 이맘 때의 《나무편지》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해에는 얼레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얼레지 진 뒤에 노란 색 꽃을 피우는 얼레지 품종의 꽃을 보여드리면서 우리의 얼레지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하겠다고 했던 겁니다. 인천수목원을 찾은 그 날 한낮에는 우리의 얼레지를 여러 송이 볼 수 있어 반갑고 지난 해의 아쉬움까지 풀 수 있었습니다.

   사진첩에 저장해두고 아직 《나무편지》에 드러내지 못한 복수초 노루귀의 앙증맞은 꽃들은 벌써 시들어가는 중입니다. 수선화 앵초를 비롯해 개나리 진달래 벚나무 꽃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주말의 비바람에 봄꽃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지난 주에 찾아본 인천수목원에서 만난 꽃 가운데 히어리도 보여드리고 싶은데, 봄은 언제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울컥 다가왔다가 화들짝 사라지겠지요. 게다가 이 즈음의 예측을 허락지 않는 이상한 기후는 봄을 더 빨리 우리 곁에서 밀어내지 싶네요.

   작지만 더 없이 아름다운 우리의 봄꽃들을 봄 다 지나고 뜨거운 햇살 내리쬐는 한여름의 《나무편지》에 담아 띄우는 일을, 올해는 해야 할 지도, 아니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언제나 계절의 흐름을 《나무편지》로, 글로 온전히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4월 14일 아침에 1,283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