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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깨뜨린 철학자의 시집… 출간한 지 2주 만에 증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4. 11. 14:07

언어 깨뜨린 철학자의 시집… 출간한 지 2주 만에 증쇄

獨철학교수 박술의 '오토파일럿'… 첫 시집 증쇄하는 건 드문 경우

입력 2025.04.11. 00:51
 
 
 
/아침달

 

“F(MBTI 감정형)가 넘쳐나는 한국 시단에 신선한 T(사고형)의 시집이 나타났다. 세속의 뜨거운 광풍이 남긴 것을 이성으로 줍는다.”(전승민 문학평론가)

박술(39)의 첫 시집 ‘오토파일럿’(아침달)이 화제다. 지난달 말 서울 혜화동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에서 진행한 낭독회는 티켓 판매 하루 만에 매진됐고, 출간 2주 만에 증쇄를 찍었다. 시인 고선경·유선혜 등을 제외하고 첫 시집 증쇄는 요즘 드문 일이다.

김혜순 시인이 이례적으로 발문을 써 주목받았다. “이 시집엔 히브리어·라틴어·영어·독일어·한국어·안달루시아어 등등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언어에 대한 감각이 있고, 그것의 지정학을 몸으로 앓는 화자가 있다. 요즘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이미지의 세계와 문장 구성이 발생했다.”

박술은 2012년 시 전문 잡지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했으나, 시집을 낸 건 이번이 처음. 고등학교 때 한국을 떠나 독일로 갔다. 지금은 독일 힐데스하임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간 횔덜린·트라클 등 독일어권 시인의 시를 한국어로 옮겨 번역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올해 독일에서 출간된 김혜순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번역했다. 그 인연을 계기로 발문을 받았다.

/ⓒ신예규

 

박술은 모국어와 외국어를 행성에 빗댄다. ‘두 중력체 사이에서 몸이 뒤집어질 때 느껴지는 잠깐의 무중력’(‘무성’) 속을 유영한다. ‘입안에 침이 고이듯/ 한국말이 고였다’(‘쟤네말’)고 하지만, 모국어를 내어준다. ‘지금 여기말에, 자기말을, 내어주기. 지금 여기, 말의 평야를, 가로지르기. 도움닫기 없이 날기. 지금 여기.’(‘도움닫기 없이 날기’). 자동 조종 장치인 ‘오토파일럿’이 작동하는 순간이다.

 

100매에 달하는 장시 ‘망치의 방’이 압권이다. 근대 사상을 깨부수고자 했던 니체가 ‘망치의 철학자’로 불리듯, 박술도 망치를 휘두른다. 그러나 망치 쥔 시인은 철학의 중력을 거슬러 본다. ‘내가 망치고 망치가 나라는 것./ 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너만을 위한 망치를 만들어 가지는 일이란 것.’ 박술은 “의도, 체계, 개념을 가지지 않고 움직이는 철학적 언어가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실험”이라고 했다.

시인·평론가들은 한국 문학 자장(磁場) 밖의 낯섦을 반긴다. 유희경 시인은 “자기 안에서의 시인과 철학자의 다툼이 있는데, 그 조율이 절묘하다”고 했다. 강동호 문학평론가는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시적 언어의 독특한 음악성과 그것을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언어 자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보기 드문 시적 개성을 발휘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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