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열의 시창작론

시는 깨달음의 경전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기도문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21. 14:03

나의 시, 나의 시론

나호열

 

<대표시>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 『당신에게 말걸기』 (2007)

 

시는 깨달음의 경전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기도문이다.

나호열

 

시 공부에 입문한 지 오십 년, 고희를 맞이하여 시선집『울타리가 없는 집』(2023)를 냈습니다. 첫 시집『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1989)를 발간한 이후 시집『안부』(2021)까지 21권의 시집 중에서 200편을 선정하기로 하고 작품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얼추 천 오백 편의 시에서 어떻게 골라낼까 고심을 했는데 의외로 짧은 시간에 선정 작업이 끝났습니다. 내게는 모두 소중했지만 제법 시를 가려보는 안목이 높아졌는지 선정 작업은 수월했습니다. 내용은 부실하고 겉멋만 잔뜩 들어간 시, 절실하지 않은 서사敍事를 침소봉대한 시, 특히 혼자 남은 견자見者인 양 거드름을 피는 시들을 빼고 나니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존재의 아름다움을 찾아보려던 만행의 발자국이 보이는 시, 굳어진 형식의 틀을 깨보려고 없는 길을 만들어보려던 몸짓이 보이는 시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좋게 말하면 부지런한 것이고, 약간의 조소를 곁든다면 남발이라 할 만큼 열심히 일기 쓰듯 써왔는데 막상 시들을 선정하고 나니 씁쓸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사회적 존재인 ‘나’가 오염되지 않은 내면의 ‘나’를 찾는 작업이 시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비겁한 사회적 존재의 넋두리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세 가지다 / 가고 없는 사람 앞에 서성이듯 / 스스로 그 벽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기다리거나 / 아예 그 사람 잊어버리듯 / 벽을 잊어버리거나 / 아니면 벽을 뚫고 벽을 넘어서거나//

그러나 오늘도 나는 / 내 앞에 버티고 선 우람한 벽을 / 밀어보려고 한다 / 사실은 꿈쩍도 하지 않는데 / 사실은 벽 때문에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을 뿐인데//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라고 / 한 줄이면 다 끝나버릴 텐데

         

- 전문 (시집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1999,)

 

지난 세월을 생각해보니 ‘나 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분투해왔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시의 진정한 정수는 ‘예민한 감각과 관찰력을 들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대상들은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치밀한 대상 파악을 바탕으로 하여 그 속성을 존재 자체로 형상화시키는 능력이 우수하다’ (정한용「존재와 인식의 먼 길,1989)는 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내친 김에 지난 시집들에 실린 평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1993년 시와 시학사에서 펴낸 시집 『칼과 집』의 해설은 나의 시의 행로를 짚어주는 소중한 지적이었습니다.

 

그의 시는 싸늘하리만치 냉정한 시선과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방향감의 폭과 깊이를 가늠하게 해준다. 그것은 곧 그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긴장이 시와 현실의 길 위에 선한 휴머니스트의 투영으로 빋아들여지기 때문이다.

 

- 「사회적 존재의 탐색과 휴머니즘의 길」, 박윤우 문학평론가

 

나는 물었다

나무에게, 구름이며 꽃에게

흐르는 길이며 강물에게

그들은 말하지 않고

조용히 몸짓으로 보여 주었다

일인극의 무대

굴뚝이 연기를 높이 피워 올렸다

절해고도 표류자의 독백처럼

표정이 없는 희망이 되는

사전에 없는 어휘가 되는

물음들

아직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본다

나무의, 구름의, 꽃의, 흐르는 길과 강물의

커져가는 귀를 본다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

 

- 「나는 물었다」전문 (시집『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1999,)

 

시인은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생명의 본질을 찾아내고자 질문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명쾌한 답을 찾지 못했기에 앞으로 더 시를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가 ‘말놀이’인 것은 틀림 없지만 언어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를 섬기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삶의 본질 또는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들여다보기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자들이 지닌 존재의 독자성을 존재론적 환원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로 육박해 들어가려는 시인의 내면적인 고심이 ‘커져가는 귀’ 또는 ‘귀는 물음표를 닮았다’라는 질문 제기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 김재홍,「존재의 내면 들여다보기,1999)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김재홍 선생님은 시업을 중단한 저에게 다시 재기의 길을 열어주신 분입니다. 저의 시작의 방향성을 짚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모국어를 사랑해야 하는 시인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기도 했습니다.

 

시는 이미지이다!

 

여울에 몰린 銀魚떼 / 가응 가응 수워얼래이//

목을 빼면 서름이 솟고 //

白薔微밭에 / 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보자/ 강강술래//

뉘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 술보다 독한 것//

갈대가 스러진다/ 旗幅이 찢어진다 //

강강술래 / 강강술래

 

- 「강강술래」 전문

 

위의 시는 이동주 시인의 유고 시선집『散調』(1979)에 실린 「강강술래」입니다. 요즘에는 강강술래의 군무를 보기 어렵지만 동영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를 나름의 명편으로 뽑습니다. 역동적이고 그러면서도 운율을 살리면서 군무 속에 담긴 우리의 애환을 살린 이미지가 선연한 시로 감상합니다. 변화가 미덕이고 모든 가치가 소모품으로 소비되어가는 현실에서 시를 대하는 방식도 유행을 따라갑니다. 딱딱한 번역투의 장시가 요즘의 대세인 것 같습니다. 시들을 안 읽는 세태라고 하는데 오늘 신문에 육만 부가 팔린 시집이 있다고 나옵니다. 발랄하고 재치가 있는 발상이 돋보인다는 평도 있습니다. 어림짐작이지만 대형출판사의 마케팅과 더불어 젊은 시인의 감각에 호응하는 젊은 독자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누구를 위해서 시를 쓸까요? 저는 일차적으로 저의 정화淨化를 위해 씁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저의 이름 석자를 처음 보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간간이 잡지를 통해서, 시집을 통해서 발표를 하기는 하지만 독자의 선호는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저는 쉬운 시, 짧은 시를 써왔습니다. 한 장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직관의 힘을 시로 구현하고 싶습니다.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쉽게 쓴 시! 가능할까요? 오래전 퇴근길에 차 안에서 시 한 편이 흘러나왔습니다. ‘들을 만하군!’ 저는 기억을 못했는데 저의 시「당신에게 말 걸기」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봄 구경 나갔다가 응달에 핀 제비꽃을 보고 쓴 시입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십 년이 지난 후 2007년 시집에 수록했습니다.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곷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 「당신에게 말 걸기」전문

 

세상이 흉흉합니다. 그럴수록 사나워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원융의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저의 오랜 친구가 저의 호를 지어주었습니다. 50년 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제 품성이 울타리가 없는 집 같다고 없을 무無에 울타리 리籬, 즉 무리가 되는데 그저 무이라고 부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지만 그나마 자위할 수 있는 것은 시를 통해서 허황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자는 설니홍조 雪泥鴻爪와 멈추지 말고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자지자기 自止自棄의 뜻을 어렴풋이나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