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과의 대화

덕수궁 시체더미서 가져갔다…어느 미군의 ‘양말 속 국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0. 5. 15:07

                                            덕수궁 시체더미서 가져갔다…어느 미군의 ‘양말 속 국새’

                                                            중앙일보  카드 발행 일시2023.12.07
                                                                에디터
                                                                강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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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헤리티지: 번외편② 문화유산 환수 실무 15년 김병연 사무관

“혹시 이 인장이 한국의 것인가?”

2013년 9월 23일 미국 국토안보수사국 직원으로부터 받은 e메일을 문화재청 김병연(50) 사무관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7개 인장(7 chops)’이라는 제목의 e메일에는 이 같은 문의와 함께 사진 일곱 장이 첨부돼 있었다. 사진 속 용 모양의 뉴(紐, 손잡이)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자주국가의 의지를 상징하기 위해 새로 제작한 국새·어보의 특징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썼다. “당신이 보낸 것은 한국의 역사다.”

2008년부터 올해 초까지 문화재청에서 김병연 사무관이 담당한 주 업무가 국외에 있는 문화재 환수다. 대학에서 한문학·국제정치학을,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독도 영유권 등 한국사 이슈에 관심이 많았다. 국립중앙박물관 7급 행정직으로 입사해 2007년 문화재청으로 소속을 옮겼고 이후 수많은 문화유산 환수 업무에 관여해왔다. 이로부터 얻은 폭넓은 시각과 현장 경험을 살려 최근 『모나리자의 집은 어디인가』(역사비평사)라는 책을 펴냈다.

김병연 문화재청 사무관이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구한말 고종(재위 1863~1907)의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가 2008년부터 2023년 4월까지 문화재청에서 국외문화재 환수 업무를 담당하면서 환수에 관여한 유물 중 하나다. 장진영 기자

모나리자? 왜 하필 루브르박물관에 속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의 그림을 제목으로 했을까. 이에 앞서 독자 여러분께 묻겠다. 고려가 찍어낸,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는 어디에 있을까? 그렇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다. 이곳은 외규장각 의궤 297책을 영구임대 형식으로 2011년 한국에 돌려준 바 있다. 그렇다면 직지도 돌려달라 해야 하지 않나. 그들은 왜 돌려주지 않는가. 하다못해 한국에서 전시라도 하게 해줘야 하지 않나.

“1911년 모나리자가 루브르에서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2년여 만에 잡힌 범인은 이탈리아 태생이었어요. 그는 법정에서 모나리자가 이탈리아인의 그림이며 나폴레옹이 약탈해 갔기 때문에 애국심 차원에서 훔친 거라고 항변했죠. 하지만 모나리자는 루브르로 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이 약탈한 게 아니라 프랑스 국왕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로부터 값을 치르고 적법하게 구매한 그림이었으니까요.”

이탈리아에선 2019년에도 다빈치 서거 500주년을 맞아 일부 극우 정치인(마테오 살비니 등)까지 나서 모나리자 환수 운동을 펼쳤다. 화제성으로 주목받긴 했지만 국제사회에서 별다른 호응을 이끌진 못했다. 오히려 유네스코 산하 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이탈리아 출신 국제법 교수는 단호하게 “모나리자 반환을 위해서는 명백한 불법·부당성의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모나리자에서 직지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먼저 김 사무관이 소개하는 문화유산 환수의 뒷얘기부터 들어보자.

2014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당시 직함)이 방한했을 때 가지고 온 인장 9과가 미국에서 도난품으로 압수된 것이었지요.

“정확히 말하면 도난품으로 압수되게끔 한·미가 공조한 결과죠. 2012년 미국 스미스소니언국립자연사박물관의 한 큐레이터(학예사)가 ‘곧 경매에 나올 유품 가운데 한국 정부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 있다’고 미 수사당국에 알렸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었지만, 앞서 스미소니언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조창수(1925~2009)씨가 고종 어보 환수에 노력한 바 있어 문제의 유품 중에서 비슷하게 생긴 걸 알아본 거죠(※조창수씨는 미국 경매에 나온 어보 등 유물 93점을 구입해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조선 왕실 공식 인장이 외국의 개인에게 흘러간 것은 ‘도난’ 이외 경로를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한국전쟁 발발 3개월째였던 1950년 9월. 미 해병 윌리엄 패턴은 서울 덕수궁 정문 인근에 쌓인 북한군 시체를 치우던 중 독특한 물건을 발견했다. 그는 이들을 양말에 넣어 1951년 미국으로 귀국할 때 가져갔다. 이후 60년 넘게 이 유물들은 패턴의 집 장식장에서 보관돼 있었다. 2012년 6월 패턴이 사망하자 가족들은 그가 남긴 물품의 가치와 가격을 알아보러 나섰고 이 과정에서 정보가 흘러나갔다. 미국 이민관세청(ICE) 산하 국토안보조사국(HSI) 서울지부로부터 ‘7개 인장(7 chops)’이라는 제목의 e메일이 날아온 게 그때다. 정밀히 들여다보니 패턴 유족이 소장한 인장은 총 9과로 파악됐다.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불법 반출되었다가 2014년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반환된 조선왕조 인장 9과.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유서지보, 수강태황제보, 황제지보, 준명지보, 연향, 춘화, 향천심정서화지기, 쌍리, 우천하사.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1952년 2월 18일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헌병대와 검찰국이 합동 수사를 통해 서울 고물상에 보관된 옥새와 보검을 압수했다는 내용이다. 전쟁 중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국유물인 국새 관리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미국에서 발견된 조선왕조 인장을 도난품으로 압수, 환수할 수 있게 우리 측이 작성한 수사요청서에도 이 같은 사실이 강조됐다. 사진 경향신문 캡처, 김병연

문제는 그때부터다. 1948년 제정한 미 연방도품법(NSPA)에 따르면 불법 취득한 해외 유물은 매매가 금지되지만 그러려면 이게 도난품이란 게 입증돼야 했다. 이때부터 김 사무관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한국 법은 물론 미국 법과 국제 조약, 관례 등을 탈탈 털어 압수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논리를 구성했다. 당시 우리 측이 2주가량 밤샘 작업을 거쳐 HSI 측에 보낸 수사요청서의 요지는 ▶해당 유물은 대한민국 국유재산법에 의해 보호되는 유물이란 사실 ▶미국 법이 이제까지 도난 물품에 대해 원소유자의 권익을 보호해준 판례 등을 광범위하게 아울렀다.

“미국 수사관들이 날마다 처리할 일이 얼마나 많아요. 게다가 그들은 한국의 국새·어보 중요성이나 가치를 거의 모르죠. 이 때문에 논리를 탄탄하게 작성하고, 매일 재촉하는 게 필요했어요. 당시 HSI 한국지부의 조태국 지부장, 김종호 수사관이 본부에 엄청 독려했죠. ‘이걸 돌려받는 게 한·미 우호에 엄청난 일이 될 것’이라고 압박하면서요.”

HSI는 수사 착수 30일이 채 안 돼 패턴 유족으로부터 인장 9과를 압수했다. 유족 측도 순순히 동의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문화재청은 2014년 미국 국토안보부(DHS) 산하 이민관세청(ICE)와 ‘한·미 문화재 환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한다. 첫 결실이 2017년 돌아온 문정왕후 어보와 현종 어보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LACMA)에 소장돼 있던 걸 기나긴 협상과 수사 공조 끝에 2017년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한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김병연 문화재청 사무관이 국립고궁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전시된 고종의 국새 '대군주보'를 응시하고 있다. 이 유물은 1990년대 후반 한 경매사이트에 나온 것을 재미교포 사업가가 사들였다가 2020년 기증 형태로 국내에 환수됐다. 장진영 기자

2020년 문화재청이 재미교포로부터 기증받은 고종의 국새 '대군주보'. 뒷면 거북 손잡이 꼬리 아래에서 ‘W B. Tom’이라는 영문 음각이 발견됐다. 해외에 밀반출된 후 소장했던 외국인이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문화재청

환수 작업에 노력한 문화재 중에 또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업무 초반에 진행했던 진해 망주석(望柱石, 무덤 앞 석조물의 일종)입니다. 실은 앞서 담당자들이 다 해놓은 일에 숟가락 얹듯이 유물만 실어오러 갔어요. 당시에 망주석은 일본 가고시마현 난슈 신사에 있었는데, 이 신사의 대표인 쓰루타 궁사께서 애초엔 돌려주는 데 소극적이었어요. 그러다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나자 모든 걸 정리하는 마음으로 기증을 결심하셨죠. 한국의 진해시와 주일 한국문화원도 노력했지만 현지의 친한파 분들 협조 없인 불가능했어요.”

문제의 망주석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데, 1910년대 초 일본군이 진해시에서 군 시설 정비 중에 발굴했다. 한자로 ‘조선석 명치 43년 8월 29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명치 43년(1910년) 8월 29일 조선 주권을 강탈한 날을 기념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측은 이를 대표적인 정한론(征韓論) 주창자인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의 호(號)를 딴 난슈 신사에 기증해 보관해 왔다.



이를 한국에 돌려주자는 운동을 1980년 14대 도공 심수관 선생(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심당길 선생의 14대손)이 펼치다가 일본 우익의 위협을 받아 중단했다. 부친에 이어 15대 심수관 선생이 적극적으로 쓰루타 궁사를 설득했고, 가고시마현 의원(야마구치 오사무) 등 각계의 전방위적인 지원·협력이 맞물리면서 망주석은 지난 2009년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국내에서 다른 짝을 찾아내 현재는 한 쌍이 창원진해박물관 후문에 전시돼 있다.

창원진해박물관 후문을 장식하고 있는 망주석(望柱石) 한쌍. 오른쪽이 1910년대 일본에 의해 반출돼 가고시마현 난슈 신사에 소장돼 있다가 2009년 진해로 돌아온 것이고, 왼쪽은 이후 창원시에서 수소문해서 진해에서 찾은 것이다. 2022년 7월 창원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지난 11월 현재와 같이 배치되면서 100여 년 만에 한쌍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사진 창원시

일본이 약탈해 간 것이라 해도 돌려받을 땐 애국심만으론 안 되는군요.

“우리 쪽 요구와 달리, 그쪽에선 이미 사유재산이고, 수십 년간 자기들 집안·나라의 역사도 함께 쌓인 유물인데 무작정 내놔라 할 수 없죠. 그걸 내줌으로써 그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 있는데 이를 상쇄하려면 그럴 듯한 명분과 역할을 만들어줘야 해요. 국가적 차원에서 잘 된 사례가 일본 궁내청 도서 환수예요. 당시에 한일합병 100년이란 역사적 계기를 맞아 양국 정부의 물밑 움직임이 강했고 일본의 친한파 의원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2010년 일명 ‘한·일 도서협정’이 체결되죠. 덕분에 이듬해 조선왕실의궤 등 귀한 도서들이 100년 만에 환수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책 『모나리자의 집은 어디인가』는 문화유산이란 개념이 비교적 최근인 1954년에야 국제법에 등장했다는 점, 승전을 기념하는 전리품이 상대국에겐 약탈된 유물이 되는 이해관계의 차이 등을 꼼꼼히 짚는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건 사람 간의, 국가 간의 상호 이해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문화유산이란 게 빨리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돌아오는가가 더 중요할 수 있어요. 반환·기증·임대 과정에서 서로 교류하고 이해 협력한 게 다음 세대를 위한 자산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최근 수년간 한·일 외교 냉각기 동안 민간의 환수 노력이 탄력 받지 못하고 문화교류도 주춤했던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2012년 국내 반환을 기념해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의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 책자 내용을 확대한 영상물과 진열 도서를 둘러보고 있다. 중앙포토

이제 다시 처음 질문. 프랑스는 왜 직지를 돌려주지 않는가로 돌아가보자. 이 질문을 바꿔 그들이 왜 돌려줘야 할까에 우리는 합리적으로 답할 수 있는가. 예컨대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와 직지는 유출 경위가 다르다.

직지는 외규장각 의궤보다 모나리자에 가까운 건가요.

“많은 분들이 직지도 병인양요 때 가져간 것으로 착각하는데, 실은 19세기 말 주한프랑스공사였던 콜랭 드 플랑시가 조선에서 수집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한국관에 전시된 게 시초입니다. 이후 고서수집가의 손을 거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된 케이스예요. 프랑스는 직지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웃나라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훨씬 앞서 인쇄된 금속활자본을 소장하고 있단 걸 적극 내세워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프랑스의 신청으로 직지가 등재됐을 때도 한국 정부가 문제 삼지 않은 게 유출 과정에서 불법·부당성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죠. 직지가 프랑스와 한국을 이어주는 가교로 활용되면 좋은데, 우리 쪽에서 계속 환수 얘기가 나오면 한국에 전시 대여해 주는 것조차 꺼리게 돼요.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명분과 절차를 만들어가는 과정 없이 될 문제가 아니란 얘기죠.”
그러면서 그는 이번 책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덧붙였다.

 문화유산 환수를 말하면 학생·젊은이들이 뜨겁게 반응해요. 그런데 저는 만날 강조하는 게 ‘차가운 머리로 대응하자’입니다. 문화유산 반환이나 기증에는 많은 분들의 끈기와 노력이 필요해요. 우리 세대에 너무 욕심내지 말고 자주 만날 수 있는 여건을 더 만들고 다음 세대에 넘기는 것까지 염두에 두면서, 우리 스스로도 문화유산에 대해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됐으면 합니다. 


국립춘천박물관 상설전시실 단독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한송사 터 석조보살(국보). 1965년 타결된 한일기본조약, 일명 한일협정에 따라 1966년 일본에서 반환된 문화재 1326점 가운데 하나다. 당초 우리 정부는 이보다 훨씬 많은 4479점을 반환 청구했지만 일본은 불법 반출은 없었다는 기본 입장 하에 일부 문화재를 '기증'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고려 10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이 대리석 불상은 1911년 일본인이 빼돌린 정황이 당시 일본 잡지에 명확히 기술돼 있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사진 국립춘천박물관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