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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와 ‘노원을 걷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 22. 13:25

[아무튼, 주말]

폐철길 따라 걷는 숲길, 55년 자취 품고 사라질 백사마을 골목까지... 길 위에서 이야기를 짓다

서울 속 아날로그 감성
구효서와 ‘노원을 걷다’

구효서 작가와 함께 하는 노원 여행
입력 2022.01.22 03:00
 
 
 
 
 
소설가 구효서가 경춘선 숲길을 따라 걷다가 잠시 폐철로에 앉았다. 정면에 높이 솟은 아파트가 보인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소설가 구효서(64)는 길 위에서 이야기를 짓는다. 글이 막히면 노트북을 덮고 일어선다. 서울 공릉동 작업실을 나와 경춘선 숲길을 걸으며 궁리하고, 그래도 실타래가 안 풀리면 옛 화랑대역을 지나 조선왕릉인 태릉과 강릉까지 걷는다. 25년째 노원구에 살면서 한 번도 노원을 떠난 적 없다는 그에게, 노원은 집이자 일터이고, 쉼터이자 놀이터다.

작가가 걷는 길이 새삼 궁금해진 건 지난 연말 출간된 ‘노원을 걷다’를 읽고 난 뒤다. 구효서를 비롯해 문인 17명이 자기만의 추억이 깃든 노원의 역사와 문화, 감성을 풀어냈다. 외부인에겐 아파트 지나 아파트가 나오는 심심한 동네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겐 천상병 시인이 한때 살았던 곳으로, 또 누군가에겐 생태 하천이 손짓하는 곳, 혹은 살롱 같은 동네 책방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겨울 바람 적당히 불던 지난 주말, 구효서와 함께 노원을 걸었다.

구효서 작가가 폐철로를 따라 경춘선 숲길을 걷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경춘선 숲길 따라 옛 화랑대역까지

출발은 그의 ‘직장’이다. 30년 된 공릉동 아파트를 나오니 폐철길을 따라 아날로그 감성의 산책로가 이어진다. 기차 여행의 낭만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경춘선. MT나 근교 데이트로 설레는 청춘을 실어 나르던 경춘선은 2010년 멈췄지만, 녹슨 철로는 경춘선 숲길로 변신해 시민에게 개방됐다. “작업하다가 밥 먹으러 가거나, 글이 안 풀리면 걷는 길이 바로 이 경춘선 숲길이에요. 숲길을 걸으면서 나무도 보고, 꽃도 보고, 풍경도 감상하고, 사람도 감상하죠.”

1939년 건설됐다는 경춘철교에서 시작해 육군사관학교 앞을 지나 옛 화랑대역까지 약 5㎞를 걸었다. 구간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정면에 높이 솟은 아파트를 보며 걷다 보면, 어느새 주택들이 있는 골목이 나오고, 세련된 카페와 식당이 옹기종기 들어선 공트럴파크(공릉동+센트럴파크)도 지난다. 등록문화재인 옛 화랑대역에선 간이역 특유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일대를 철도 공원으로 꾸몄고, 밤이 되면 불빛 정원으로 변신한다. 역사(驛舍) 주변에 증기기관차, 협궤 열차 등이 전시돼 낭만적 분위기를 더한다. “여기까지 걷고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면 돌아가는 거죠. 안 풀리면 플라타너스 길까지 내리 걷고요.”

전업 작가인 그는 주중엔 중계동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25분 달려 작업실로 출근한다. 당현천에서 중랑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출퇴근길.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 글쓰기 원칙을 칼같이 지킨다는 그는 “내버려 두면 종일 꾸물거리기만 할 거니까 스스로 만든 원칙을 오지게 거는 것”이라고 했다.

경춘선 숲길을 걷다보면 구간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작가가 '오픈 갤러리'로 장식된 구간을 지나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등록문화재인 옛 화랑대역은 간이역 특유의 정취가 물씬 난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모세혈관 같은 백사마을 골목

“머잖아 없어질 길”이라며 작가가 또 다른 길을 안내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중계본동 백사마을. 빠르게 걸을 수 없는 길이다. “오래된 길이라서, 좁은 길이라서, 비탈길이라서가 아니다. 보이는 게 많고, 생각할 게 많고, 빠져들 게 많아서 그렇다. (중략) 사람들이 이곳에 어떻게 왔고 집을 지었는지, 얼마나 숨 가쁘게 오르내리며 이웃과는 어떤 정을 나누고 의지했는지, 숱한 길 위에 새겨진 슬픔과 기쁨 그리고 꿈의 결들을 낱낱이 어루만져야 한 발짝 지날 수 있으므로 걸음이 빨라질 수 없다.”(’노원을 걷다’ 중에서)

 
구효서 작가가 철거가 얼마 남지 않은 백사마을 골목을 천천히 걷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개발 사업 시행 인가가 나서 빈집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연탄 때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모세혈관 같은 길들을 오르내리면서 그는 “곧 철거 예정이라 아마도 이게 마지막 모습일 것”이라며 “55년 삶의 자취들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위안을 받는다고 해야 하나, 여길 걸으면 괜히 울컥해지면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에요. 아마도 내 첫 서울살이 집이 떠올라서 그러나 봅니다.” 1972년 소년 구효서가 고향 떠나 서울에서 처음 만난 집이 구로2동 공영주택 576호다. “백사마을의 벽돌이며 기와랑 똑같은 집들이었죠. 이제 이 마을의 역사와 생활, 문화를 생생하게 기록해온 숱한 길을 몇 개월 지나면 볼 수 없게 됩니다. 아쉽지만 이제 새 길이 생기는 거니까, 새 길은 새 시간을 담아내겠지요.”

구효서 소설가가 철거가 얼마 남지 않은 백사마을 계단에 앉아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영화와 그림, 빵과 면을 사랑하는 작가

작업실과 산책로 말고 그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또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더 숲이다. 커피 향과 빵 굽는 냄새가 구수한 카페이자 갤러리이고, 영화관도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최근엔 이곳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만족스럽게 봤다고 했다. 마침 이날 오후엔 영화에 출연한 젊은 한국인 배우들의 사인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진 찍어서 자랑해야지~.” 작가가 휴대폰 카메라로 그들을 담으며 소년처럼 웃었다.

구효서 작가가 복합문화공간 '더 숲' 북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복합문화공간 '더 숲' 내부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중계동 북서울미술관에선 영국 테이트미술관 소장품을 소개하는 특별전 ‘빛’(5월 8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등 근대 화가부터 애니시 커푸어, 쿠사마 야요이 등 현대미술 거장까지 면면이 화려하다. 미술관을 즐겨 찾는 그는 일찌감치 이 전시를 예매해놓고 벼르고 있다고 했다. 그의 작업실엔 물방울 작가 김창열과 프랑스 화가 베르나르 뷔페의 판화가 걸려 있다.

'공릉우동집'의 대표 메뉴인 비빔국수.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그는 빵과 면을 사랑한다. 지난해 12월 출간한 장편소설 제목이 ‘빵 좋아하세요?’다. 자전거를 타고 열심히 걷는 것도 “좋아하는 빵과 국수를 실컷 먹기 위해서”다. 경춘선 숲길 따라 걷다가 출출하면 공릉우동집에 들러 잔치국수 한 그릇 먹고 또 걷는다. “늘 잔치국수만 먹는데, 어느 날 보니까 비빔국수 맛집이라고 붙어있더라고요.” 그래도 비빔국수는 한 번도 시켜본 적 없을 정도로 취향이 분명하다. 유명한 공릉동 국수 골목 가까이에다 작업실을 잡은 까닭도 달리 없다. “멸치국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으니 아무리 먹는다”고 했다.

공릉동 도깨비시장의 유명 맛집인 '만두장성'의 찐만두.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경춘선 숲길 산책로에 있는 브레드 스팟은 즐겨 찾는 동네 빵집. “여기 빵은 전부 맛있지만, 치즈찰빵이 특히 맛있다”고. 인근 표준커피는 공트럴파크에서도 요즘 핫한 카페다. 쓰고 탄 맛이 싫어 커피를 못 마시던 아내를 위해 주인장이 개발한 ‘근희라떼’와 당근 케이크가 시그니처 메뉴다. 재래시장인 공릉동 도깨비시장은 그의 주전부리 맛집. 만두장성의 찐만두와 꽈배기가 유명하지만, 그는 시장 입구 떡집의 모싯잎떡을 더 좋아한다.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산책로에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재래시장인 공릉동 도깨비시장 내부 모습.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