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 묘에서 나온 사발 글씨, 정약용이 썼다”
“윤지충 묘에서 나온 사발 글씨, 정약용이 썼다”
천주교 최초 순교자 무덤서 발굴, 다산 전문가 정민 교수 주장
“다산, 사촌 윤지충 천주교 이끌어… 순교 자책감에 1년 후 직접 쓴 듯”
입력 2021.10.11 03:00
윤지충·권상연 묘에서 출토된 사발 글씨와 정약용의 친필을 한 글자씩 대조한 표. 윗줄은 사발 글씨, 아랫줄은 정약용 친필. 정민 교수가 다산의 친필을 구해 대조했다. /정민 교수 제공
한국 천주교 최초 순교자인 윤지충(1759~1791)의 묘에서 발견된 백자사발지석에 쓰인 글씨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다산 전문 연구자인 정민 한양대 교수가 지석 글씨와 다산의 생전 필체를 비교 분석한 결과다. 정 교수는 10일 자로 발행된 가톨릭평화신문에 이 같은 주장을 기고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초기 한국 천주교 역사의 풍경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지충(왼쪽)과 권상연(오른쪽)의 묘에서 출토된 사발지석. 정민 교수는 사발 속 글씨가 정약용의 필체인 것으로 추정한다. /천주교 전주교구
백자사발지석은 지난 3월 윤지충·권상연의 묘 발굴 당시 출토됐다. 백자 사발 안쪽에 무덤 주인의 이름과 세례명, 생년, 본관과 무덤 조성 일자 등 79자(字)가 적혀 있었다. 전주교구는 지난 9월 이 같은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 정 교수는 10일 본지 통화에서 “지난 10여 년간 다산의 친필이 있다면 전국 어디든 다니며 실물을 확인하고 사진을 촬영했다”며 “이번 윤지충 묘 사발지석 사진을 보는 순간 매우 익숙한 글씨체, 즉 다산의 친필일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윤지충 묘 사발지석과 정약용 글씨체 비교
사발지석에서 나온 글씨체는 정자체인 해서(楷書). 정 교수는 이중 사발 바닥 글씨 등 47자를 ‘여유당시집’ ‘산재냉화’ ‘백운첩’ 등 다산의 해서체 글씨와 대조했다. 평평한 종이에 쓴 글씨와 사발 안쪽에 쓰는 글씨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과는 대조 샘플이 늘어날수록 필체의 유사도가 매우 높아진다는 것. 정 교수는 “고작 47자의 샘플 비교만 가지고, 이 글씨를 다산이 썼다고 단정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추사 김정희 등 다른 사람의 샘플에서 뽑아서 비교했을 때 이 같은 유사도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정약용의 표준영정(왼쪽)과 윤지충의 초상화. 두 사람은 내외종 사촌지간이었으며 윤지충은 정약용 형제에 의해 천주교를 접했다. /한국문화정보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 교수는 사발 글씨를 다산의 필체로 볼 수 있는 다른 근거도 밝혔다. 우선 윤지충과의 관계. 다산의 어머니는 윤지충의 고모로, 두 사람은 내외종 사촌지간이다. 윤지충이 천주교를 접한 것도 다산 형제를 통해서였다. 이 때문에 윤지충의 순교에 다산은 자책감을 가졌을 것이란 추측이다. 또한 다산의 거처인 양평 두물머리에서 도자기를 굽던 광주 분원(分院)은 지근거리다. 이 때문에 다산이 사발 안쪽에 글씨를 쓰고 분원에서 유약을 발라 구워 윤지충·권상연의 묘소로 옮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양대 정민 교수. 정 교수는 10여년간 정약용의 친필을 조사하고 있으며 한국 천주교 초기 역사도 연구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생활을 밝히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회갑 때 스스로 쓴 묘지명에서 “정미년(1787) 이후 4~5년간 서학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며 “신해년(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윤지충·권상연의 순교 1년 후 이장할 때 분묘에 넣은 사발 글씨가 자신의 것이 맞는다면 다산은 적어도 1792년 말까지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 핵심 지도층으로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지충·권상연의 이장은 한국 천주교 교회 차원의 행사였을 수 있다는 것이 정민 교수의 분석이다.
지난 3월 전주교구 초남이성지 조성 중 우연히 발견된 230년 전 최초 순교자 무덤은 우리 학계에 계속 연구거리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