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펠·디오스·쏘나타… 별나고 멋진 K중산층 만든 디자인
[당신의 리스트] [21]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K-중산층을 만든 디자인 5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편집디자인=홍은주
편집디자인=김형재
입력 2021.07.28 03:00
이 글의 제목은 영국의 팝아트 작가 리처드 해밀턴의 1956년 작 ‘오늘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에서 빌려왔다. 당대의 대중문화에서 수집한 이미지들을 콜라주한 이 작품은 전후 소비 사회가 만들어 놓은 새로운 일상 경관을 독특한 화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도 해밀턴처럼 우리의 일상 경관을 바꿔놓은 디자인들을 수집해보면 어떨까. 본격 소비 사회에 진입한 지 30여 년이 지난 만큼, 자원은 무궁무진하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중산층은 아파트, 승용차, 가전제품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표준적인 소비 프레임을 만들고, 세대와 시대에 따라 구색을 바꾸면서 자신의 일상 경관을 변모시켜 왔다. 다들 개인사를 들춰보며 자신만의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을 법한데, 여기서는 한국적 특색을 잘 드러내는 다섯 가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아파트 실내를 배경으로 2006년 전후로 출시된 보르도 텔레비전, 딤채 아트워크 김치냉장고, 지펠 '앙드레 김' 냉장고, 휘센 아트쿨 에어컨, 스팀트롬 세탁기 스페셜 에디션, 한룩스 시스템소파, 쿠첸 압력밥솥, NF 쏘나타 트랜스폼 등의 이미지를 콜라주했다. 창밖의 이미지는 이 시기에 입주한 도곡렉슬이다.
아파트
2021년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아파트에 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아파트가 한국 경제의 유동성을 지역과 평수에 따라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독특한 장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별다른 울림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시선을 약간 다른 쪽으로 돌려 아파트가 지닌 또 다른 힘에 주목해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이런 사례. 강남의 30평형대 아파트에 사는 A씨, 김포 신도시의 30평형대 아파트에 사는 B씨, 경북 영주의 30평형대 아파트에 사는 C씨는 거의 유사한 평면의 실내 공간을 점유하며 일상을 살아간다. 대량 복제된 실내 공간 앞에서 계층, 소득, 자산, 지역, 학력의 차이가 사실상 무력해지는 셈이다. 물론 현관 바깥으로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제각각 다른 풍경이 펼쳐지겠지만 말이다.
아파트의 비판자들이 가장 못마땅하게 느끼는 것도 이 대목일 것이다. 그들은 이 상황을 두고 ‘주거의 획일화'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자. 한국 사회가 거센 소득 양극화와 지역 간 격차 확대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도 바로 아파트가 지닌 이 획일화의 힘 덕분이 아닐까? 자신을 ‘중산층’으로 상상하는 아파트 거주자들을 통해서 말이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건 노태우 정권이 1980년대 후반의 주택난을 체제 전복의 위협 요인으로 간주하고 ‘신도시 개발과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획일화가 표준화의 다른 말로, 보통 사람들이 일상의 삶을 세밀화로 그려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밑그림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획일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농담을 반쯤 섞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지역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아파트의 가격이 보유자가 속한 계층을 갈라놓지만, 거주자의 의식 구조는 가격보다는 평형대, 그러니까 거실과 주방의 크기, 그리고 방의 개수에 더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한국형 가전
일본에 전기밥솥과 워크맨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자국의 문화적 토양에 바탕을 둔 신제품 개발. 이것은 산업화에 뛰어든 제품 디자이너들에게 화두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디자이너들도 다르지 않았다. 한때 전통의 해석을 통해 한국적 조형미가 담긴 제품을 디자인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신제품 개발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기회가 온 것은 1990년대 초반. 드디어 한국적 생활 양식에 바탕을 둔 제품 개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정말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국내 가전 업체들은 돌솥밥 전기밥솥, 뚝배기 전자레인지, 물걸레 진공청소기, 김장독 냉장고 등에 ‘한국형 가전’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차례대로 시장에 선보였다. 김치냉장고는 그중 최고 히트작이었다.
김치냉장고가 처음 시장에 선보인 것은 1995년. 수백만 명의 인구가 수도권 신도시와 지방 신시가지에 건설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이주를 마무리한 시점이었다. 한국 사람은 김치 없이 못 산다고 믿는 대다수 사람들이 꼼짝없이 장독대 없는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치냉장고는 바로 이 ‘한국 사람들’의 식생활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신제품이었다.
따져 보면, 사실 한국형 가전이란 많은 사람들이 의자보다는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는 데 익숙하고 김치를 집에서 담가 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에 통할 만한 제품이었다. 달리 말해, 그런 시절이 가고 나면 한국형 가전 역시 퇴장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주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김치냉장고만큼은 예외지만 말이다. 국내 제품 디자이너들은 한국형 가전의 개발 경험을 디딤돌로 딛고 올라, 선진국 디자인을 따라 하던 모방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펠과 디오스
지펠과 디오스. 두 냉장고 브랜드의 시작은 원래 거창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제품의 독무대나 다름없던 고급 양문형 냉장고 시장에 도전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 시장은 전체 냉장고 시장의 5% 안팎을 차지하던 틈새시장. 일반형 냉장고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였던 터라, 나름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IMF 외환 위기 이후의 변화된 세상은 이 두 브랜드를 틈새시장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소득과 소비의 양극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명품 선호 경향이 두드러졌고, 신축 아파트들은 주방의 크기를 키우고 아일랜드 작업대가 장착된 대면형 주방을 선보였다. 이와 동시에 중산층 주부들도 가사 노동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 계발, 자녀 교육, 재테크에 능숙한 가정 경영의 전문가로 변신을 시도했다. 이 두 브랜드는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편승해 대면형 주방을 자신의 무대로 삼았고 새로운 모습의 주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펠과 디오스가 큰 성공을 거두자, 다른 생활 가전도 휘센, 트롬, 하우젠 등의 브랜드로 옷을 바꿔 입고 고급화에 나섰다. 아파트도 뒤질세라 외벽에 브랜드 로고를 부착했다. 래미안, 자이, 캐슬, 푸르지오, 힐스테이트 등등. 동시다발적으로 가정 공간 구석구석에 브랜드가 자리하기 시작했다. 2006년, 지펠과 디오스가 ‘명품 디자인 전략'을 내세워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꽃 패턴과 하상림 작가의 꽃 그림을 냉장고에 장식한 것은 이런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 덕분에 주방은 난데없이 꽃무늬의 경연장이 되기도 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다분히 한국적 현상이었다.
한편, 지펠과 디오스가 주방의 풍경을 바꾸기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비스포크와 오브제가 생활 가전 브랜드의 세대교체를 외치고 있다. MZ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경쾌한 실내 경관을 꾸미는 중이랄까.
보르도 텔레비전
2000년대 초반, 거실의 왕으로 군림하던 텔레비전 디자인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브라운관을 대체하는 액정 디스플레이, 즉 LCD가 변화의 핵이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디자이너들은 이 얇고 납작한 평판이 거실의 풍경을 과연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골몰했다.
2006년 삼성전자가 출시한 ‘보르도'라는 이름의, 와인 잔을 닮은 텔레비전도 그중 하나였다. 디자인이 너무 앞서가서 소비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소비자들에게 딱 와인 잔만큼의 친밀감으로 다가갔던 것일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300만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삼성전자는 여세를 몰아 그해에 LCD 텔레비전 세계 1위에 올라섰다. ‘트리니트론’이라는 독자 기술로 세계 시장을 제패한 소니의 아성을 무너트렸던 것이다.
보르도 텔레비전이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간의 의견 조율이 문제였다. 디자이너는 더 얇고 세련된 디자인을 추구한 반면, 엔지니어는 더 많은 기능에 중점을 뒀다. 양측의 아이디어를 본 사업부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디자인은 밀라노의 디자이너들이 한 것처럼 보이는데, 엔지니어링은 중국의 엔지니어들이 한 것 같군요.” 사실상 디자이너 손을 들어줬던 것이다.
보르도의 등장 이후, 텔레비전은 납작한 액자 프레임처럼 다뤄졌다. 크기는 더욱 커졌고 해상도 역시 높아졌다. 두루마리처럼 말 수 있는 텔레비전도 나왔다. 하지만 문제도 있다. 텔레비전의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대화를 나누던 가족 구성원 모두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면서, 가족 간 대화는 단톡방 메시지로, 텔레비전 시청은 유튜브 구독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지상파나 종편 채널에 별 관심 없는 아이들의 세상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현대 쏘나타
1985년, 중형 세단 쏘나타가 등장했을 때, 누구도 이 브랜드가 이토록 오랜 시간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차의 대표 모델이자 단일 차종 중 최장수 모델인 쏘나타는 8세대에 걸쳐 진화를 거듭하며 201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870만대 이상을 생산하고 국내 시장에서 355만대 이상을 판매했다.
첫 출시 당시 ‘에어로다이나믹 스타일'을 강조하던 쏘나타는 기존의 중형 세단과는 약간 다른 소비자층을 겨냥하고 있었다. 포니를 몰던 젊은 중산층이 다음 교체 차량으로 고려할 법한 패밀리카 자리에 놓여 있었다고 할까? 중형 세단이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 남성의 권위를 떠올리던 시대 분위기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경제성장과 중산층 증가는 승용차 차종의 위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1950년대, 프랑스 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프랑스산 승용차, 시트로엥 DS를 두고 ‘위대한 고딕 성당'에 견줄 만한 현대성의 상징이라며, 프랑스의 소시민들을 단번에 매혹시키는 우아한 여성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도 바르트를 흉내 내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세대교체로 변신을 거듭한 쏘나타의 외형이야말로 한국 중산층의 성장 과정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금자탑이자, 시대별 남녀 운전자의 평균적 미적 취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2019년 현대차가 ‘센슈어스 스포트니스(Sensuous Sportiness)’라는 디자인 콘셉트와 함께 야심차게 내놓은 8세대 쏘나타의 인기가 국민차라는 명성에 못 미친다는 소식이다. 6세대 이후 ‘플루이딕 스컬프처(Fluidic Sculpture)’라는 콘셉트를 통해 내세웠던 특유의 날카롭고 공격적인 면모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예전이라면 쏘나타를 선택했을 소비자들이 상위 차종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이왕이면 큰 차'를 선호하는 경향에 더해, 중산층의 허리가 그만큼 얇아진 탓일까?
☞박해천씨는
디자인 연구자.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게임'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등의 책을 통해 아파트와 중산층의 기묘한 공생 관계를 다루면서 현대 시각 문화의 변화상을 살펴봤다. 현재는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1990년대 디자인 문화’를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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