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이름에는 도시가 추구하는 가치 담겨 있다
고재원 기자 입력 2021. 07. 05. 11:53 댓글 0개
프랑스 파리에는 이탈리아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스트리토노믹스 분석법을 활용해 인물의 직업과 성별, 생존연대 등을 색깔로 구분해 나타냈다. 스트리토노믹스 홈페이지 캡쳐
도시의 거리 이름은 그 도시의 역사와 함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가치를 담고 있다. 2019년 미국 워싱턴DC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본부 앞 거리인 ‘E 스트리트 SW 300’의 이름을 ‘히든 피겨스 웨이’로 바꿨다. 1960년대 미국 유인 우주탐사 프로그램에 공헌한 숨은 공로자들이던 흑인 여성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기리는 뜻에서다. 영국 런던에는 1940~1950년대 총리를 역임한 원스턴 처칠의 이름을, 프랑스 파리에는 생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꼽히는 루이 파스퇴르의 이름을 가진 거리가 있다. 국내에도 사람의 이름을 딴 길이 있다. 서울 용산구에는 유관순 열사의 이름을, 은평구에는 정지용 시인 이름을, 부산 금정구에는 일본 지하철에서 생명을 구하고 숨진 의인 이수현씨 이름을 딴 길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거리명이 도시가 추구하는 가치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영국 케임브리지 노키아벨연구소와 킹스칼리지 런던대,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 독일 뮌헨공대, 덴마크 코펜하겐IT대 연구팀은 거리의 이름을 통해 도시의 문화적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국제학술지 플로스원에 1일 발표했다.
'스트리토노믹스'라는 이름의 이 방법은 거리 이름을 통해 도시와 도시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 가치를 평가하는 새로운 사회 공학의 분석법이다. 연구팀은 도시의 거리명을 보면 그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를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거리명에 사용된 인물의 직업과 성별, 생존연대, 외국인 여부를 정량화해 해당 도시가 중시하는 문화적 가치를 엿보는 방식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도시에 남녀차별이 있는지, 어떤 직업을 엘리트로 우대하는지, 얼마나 개방적인지 파악이 가능하다. 연구팀은 “사람은 자신이 소속한 사회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데 지금까지는 주로 경험과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만 이를 파악했다”며 “새 방법을 통해 도시 곳곳에 거리명을 살펴보면 도시의 문화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서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도시인 프랑스 파리와 오스트리아 빈, 영국 런던, 미국 뉴욕에 있는 4932곳의 거리명을 분석했다. 도시마다 거리명에 여성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시대에 해당인물이 살았는지, 직업이 무엇인지 등을 따졌다.
그 결과 빈은 여성의 이름을 딴 거리가 가장 많은 도시로 꼽혔다. 분석 대상이 된 빈의 거리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54%가 여성에서 이름을 따왔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출생의 19세기 여성주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헬렌 다이너, 독일 나치 점령 치하에 태어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도 들어있다. 런던도 거리명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으로 나타났다. 반면 뉴욕은 26%, 파리는 4%만이 여성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파리는 나폴레옹3세가 통치하며 파리를 현대적 수도로 바꾸던 1860년대에 큰 가치를 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활동한 인물들이 거리명에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가 다시 성장하던 시기를 살던 인물이, 런던은 1666년 런던 대화재 이후 조시 3세가 통치하던 1700~1800년대 살던 인물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뉴욕은 1950~2000년대 인물들이 주를 이뤘다.
이들 네 도시는 공통적으로 예술가를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술가를 기리는 거리명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파리는 예술가 외에도 작가와 과학자, 군인의 이름을 딴 거리가 많다. 빈은 법조계 인사와 사회필수인력이, 런던은 영국왕실과 정치인, 군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뉴욕은 911 테러 희생자가 거리명의 36%를 차지해 테러에 대한 경각과 희생자에 대한 추모 정신이 도시가 추구하는 가치에 녹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빈은 거리명에 다른 나라 출신의 인물을 쓰는 경우가 45%로 가장 많았다. 그만큼 빈이 외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고 외국인에 대해 개방성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반면 국제화된 도시로 알려진 런던은 14.6%, 파리는 10.9%, 뉴욕은 3.2%만 외국인 이름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컨스탄티니데스 연구원은 “도시의 거리명은 해당 사회가 중시해온 가치를 담고 있다”며 “이를 잘 활용하면 도시의 문화를 연구하고 시간 경과에 따른 변화를 추적할 있다”고 밝혔다.
[고재원 기자 jawon12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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